지난 2일 4·3도민연대가 ‘4·3항쟁 75주년 전주형무소 터 및 희생지역 순례’에서 답사 참가자와 취재진들에게 양승천씨 인터뷰 영상 '사라져버린 이름'을 공개하고 있다. 사진은 고 양회천 이등상사의 학생 시절 모습.(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2일 4·3도민연대가 ‘4·3항쟁 75주년 전주형무소 터 및 희생지역 순례’에서 답사 참가자와 취재진들에게 양승천씨 인터뷰 영상 '사라져버린 이름'을 공개하고 있다. 사진은 고 양회천 이등상사의 학생 시절 모습.(사진=조수진 기자)

4·3 당시 “제주도민 모두를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며 도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일 것을 지휘했던 제9연대장 박진경 중령. 그는 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한 달여만에 도민 6000여명을 체포하는 ‘성과’를 올린다. 그의 강경진압 작전을 높이 평가했던 미군정청 딘 소장은 박진경을 대령으로 진급시켰다.

1948년 6월18일은 박진경 대령의 진급 축하연이 열린 날이었다. 이날 연회가 끝난 뒤 잠을 자던 박진경은 부하들이 쏜 총탄에 목숨을 잃는다. 제주 사람들에 대한 반인권적인 탄압을 저지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방아쇠를 당긴 건 손선호 하사, 이 작전을 지휘한 건 문상길 중위였다.

둘 외에도 ‘거사’에 참여한 군인이 7명이 더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양회천 이등상사다. 양회천은 그날 밤 박진경이 묵던 숙소에서 근무했던 당직사관이었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대표 양동윤·이하 도민연대)는 양회천의 이후 행방을 추적했다.

도민연대는 조사 중에 양회천의 조카인 양승천씨가 광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지난 여름 인터뷰를 진행했다. 해당 내용은 지난 2일 ‘4·3항쟁 75주년 전주형무소 터 및 희생지역 순례’에서 답사 참가자와 취재진들에게 공개됐다. 

“제가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할머니가 막걸리 한 잔 하시거나 하면 마루에서 그렇게 ‘회천아, 회천아’했어요. 우리는 그 때 회천이 삼촌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아버지도 (삼촌 관련된)아무 말도 없었고. 사진도 없애버린 거 같아. 근데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에 회천이 삼촌 옛날 얘기를 자세히 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다 적었죠.”

지난 2일 4·3도민연대가 ‘4·3항쟁 75주년 전주형무소 터 및 희생지역 순례’에서 답사 참가자와 취재진들에게 양승천씨 인터뷰 영상 '사라져버린 이름'을 공개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2일 4·3도민연대가 ‘4·3항쟁 75주년 전주형무소 터 및 희생지역 순례’에서 답사 참가자와 취재진들에게 양승천씨 인터뷰 영상 '사라져버린 이름'을 공개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양승천씨에 따르면 양회천은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입이 크고 성격이 굉장히 아쌀(‘뒤끝 없이 개운하고 분명하다’는 뜻의 사투리)해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양회천은 중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다녔고 열아홉 또는 스무살쯤 일본군에 입대했다. 해방 후 인솔자로 고국으로 돌아왔고 목포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다가 4·3 당시 ‘제주에 큰 사건이 났으니 가보라’며 제주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제주로 가보니 군은 ‘폭도’를 진압하는 게 아니라 무자비하게 민간인을 죽이고 체포하고 있었다. 양회천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을 매일 같이 마주하며 고민이 많아졌다. 당시 심정을 동생과 편지로 나누기도 했는데 특히 박진경 연대장이 화북에서 한 여성을 총으로 쏴 죽이는 걸 보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1948년 6월 가족들은 양회천이 상사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재판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재판에서 양회천은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마을면장이었던 아버지(양승천의 할아버지)가 선처를 호소하는 연판을 제출했던 게 형량을 낮춘 데 영향을 준 것으로 가족들은 짐작했다. 

이후 양회천은 마포형무소에서 전주형무소로 이감돼 수감 생활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국군들이 형무소 재소자들을 학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은 ‘회천이를 구해야 한다’며 전주형무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들이자 동생이자 형인 양회천을 만날 수 없었다.

한국군이 정치사범인 재소자들을 학살하고 구덩이를 파 시체를 모두 묻어버렸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시신을 찾지 못해 묘비 하나 못 세웠다. 이후 ‘멋쟁이 청년’ 양회천은 호적에서도 지워진, ‘사라져버린 이름’(인터뷰 영상 가제)이 됐다.   

지난 1일 4·3도민연대는 전북 전주시 황방산 기슭에서  ‘4·3항쟁 제75주년 전주형무소 희생자 진혼제’를 봉행했다. 사진은 전주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 유해발굴이 진행된 황방산 일대. 바퀴가 지나간 듯한 길게 이어진 부분 아래에서 유해 100여구가 엉켜있는 도둑이 발견됐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일 4·3도민연대는 전북 전주시 황방산 기슭에서 ‘4·3항쟁 제75주년 전주형무소 희생자 진혼제’를 봉행했다. 사진은 전주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 유해발굴이 진행된 황방산 일대. 바퀴가 지나간 듯한 길게 이어진 부분 아래에서 유해 100여구가 엉켜있는 도둑이 발견됐다. (사진=조수진 기자)

인터뷰 영상에서 양승천씨는 “삼촌 제사도 못 지냈다. 그래도 제주 사람들은 알아줘야 하지 않느냐”며 “삼촌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제주 사람들이 덜 희생됐다는 사실을 제주에서만큼은 밝혀줘야 하지 않느냐. 의로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울분을 터뜨렸다. 

20대 청년이 군인 신분으로 상사를 암살하는 데 가담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양승천씨의 ‘울분’은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이들이 4·3 역사로 기록되고 기억해야 한다는 호소이기도 했다. 

도민연대도 이와 같은 취지로 수년 전부터 박진경 암살에 참여한 군인 9명에 대한 조사에 나서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지난해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진혼제를 올리고 문상길 중위의 생가 답사를 진행했다. 지난 1일 봉행한 전주형무소 4·3희생자 진혼제엔 양회천 이등상사의 이름도 포함됐다.

지난 1일 전라북도 전주시 황방산 기슭에서 봉행된 ‘4·3항쟁 제75주년 전주형무소 희생자 진혼제’ 에서 강미경 4·3도민연대 조사연구실장이 초혼을 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일 전라북도 전주시 황방산 기슭에서 봉행된 ‘4·3항쟁 제75주년 전주형무소 희생자 진혼제’ 에서 강미경 4·3도민연대 조사연구실장이 초혼을 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양동윤 대표는 “9명 모두 해방된 조선 땅에서 나라를 지키겠다고 군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제주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청년들 아니냐”며 “그들을 기억하는 건 인간의 최소한의 도리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살았던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있다”고 한탄했다. 

이어 “이들은 묻혀진 역사가 됐다. 우리가 묻어버린 역사일지도 모르겠다”며 “4·3의 비극을 막아보려 했던 사람을 찾는 작업은 누군가는 해야하지 않겠느냐. 아무도 하고 있지 않아서 우리가 하고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1월26일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인근 망월산이 보이는 공터에서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가 봉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해 11월26일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인근 망월산이 보이는 공터에서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가 봉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