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제주4·3평화재단)
1947년 3월 1일 제주 관덕정 앞 시위행렬 모습. (사진=제주4·3평화재단)

“3·1발포사건은 갑자기 터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날 말을 탄 군인이 아이를 치고 도망간 것은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뿐이고요. 직전까지 폭발할 듯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제주도가 그전까지 평온하다가 갑자기 터졌다고 볼 수 없죠.”

1947년 3월 1일 오후 2시45분쯤 제주 관덕정 앞 광장. 한 기마 경관이 자신이 탄 말에 갑자기 튀어나온 6세 정도의 어린아이를 치고도 그대로 가려 하자 주변에 있던 군중들이 야유를 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황한 경관은 경찰서로 말을 돌렸다. 
 
이를 본 동료 경찰들은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사람들을 향해 총을 쐈다. 이 사건으로 민간인 6명이 숨졌는데 이 중엔 국민학생과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성도 있었다. 제주4·3의 도화선이 된 ‘3·1발포사건’이다.

지난 20일 김종민 전 제주4·3위원회 전문위원은 국가인권위원회 제주출장소 교육관에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바로읽기’ 세 번째 강연을 진행했다. 

이날은 ‘3·1사건과 무장봉기의 전조’를 주제로 3·1발포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당시 세계사와 한국사, 제주사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졌다. 

사건이 있었던 1일 오전 11시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 대략 2만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산되는 군중이 모였다.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수다. 

이날 행사를 준비한 ‘3·1 기념투쟁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안세훈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은 “3·1정신을 계승해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고 연설했다. 여기서 ‘외세’는 당시 38선 이남을 점령했던 미군을 뜻한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중앙청 앞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를 게양하는 모습. (사진=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중앙청 앞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를 게양하는 모습. (사진=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일장기 내려가자 성조기가 올라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하고 우리나라는 36년간 일제 통치에서 벗어났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같은 해 9월 9일 조선총독부가 있던 중앙청에는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게양됐다. 일제강점기가 끝나자 남한에서 미군정 시대가 시작한 것이다.

이틀 전인 7일 더글러스 맥아더 태평양 미국 육군 총사령관은 일명 ‘맥아더 포고’를 발표했고 다음 날인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조선의 치안을 유지해 재건을 돕겠다는 명분이었다. 맥아더 포고 1호는 ‘미군이 한반도 38선 이남 지역에서 미군정을 실시하겠다’는 내용이고 2호는 ‘미군정에 반항하거나 명령을 거역하는 자를 처벌하겠다’는 내용이다. 다음 달인 10월엔 포고 2호령을 구체화한 법령 19호를 공포했다. 

“미군정 당시 기사들을 보면 이 시기 열렸던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 판결문엔 대부분 예외 없이 ‘포고 2호와 법령 19호 위반’이라는 죄목이 쓰여있습니다. 특히 법령 19호 4조 ‘민중행복에 불리한 행위에 대한 공중의 보호’가 가장 핵심인데 미군정에 반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겁니다. 조선인을 가장 옥죄는 장치였죠.”

#“신탁 vs. 반탁” 좌익-우익 간 최초의 이데올로기적 대립

미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이틀 전인 1945년 9월6일. 해방 직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발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초대하지도 않았던 미군이 상륙하기 전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건준은 전국적으로 ‘행정기구’를 표방하는 인민위원회로 전환해갔다. 

미군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 계열 조직으로 여겨 탄압했다. 이에 미군과 인민위원회는 대립 구도를 이어갔다. 같은 해 12월 12일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이 사실상 물리적 탄압을 지시했다. 같은 달 19일 미군은 자신들에게 걸림돌이었던 서울 중앙인민위원회 사무소를 습격했고 이후 인민위는 만들어진 지 석 달 만에 무력화했다. 

그리고 같은 달 열린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선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원조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최장 5년까지 4대국(미·영·중·소)이 임시정부와 협의해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결정이 났다. 이를 두고 동아일보는 “미국은 조선의 즉시 독립을,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오보를 냈다. 

“이때를 계기로 그동안 일본에 빌붙어 살아왔던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 납작 엎드려 살다가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한다는 듯 신탁통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반대를 했어요. 기회주의자인 이들이 볼 때 현재 가장 센 곳에 붙어야 하는데 38선 이남을 점령하고 있는 미군에 잘 보이기 위해서 친미반소를 하기로 한 거죠. 미국에서 당시 반공산주의 여론이 컸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살아날 길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당시 조선에서 우익 진영은 신탁에 반대하는 ‘반탁’을, 좌익 진영은 처음엔 ‘반탁’을 주장하다가 3상회의 결정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라며 ‘신탁’ 지지로 입장을 선회했다. 이는 국내 정치세력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최초로 명백하게 표출한 계기가 됐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중 하나인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기에 앞서 좌익과 우익 진영은 회의에서 영향력을 차지하기 위한 단체 늘리기에 나선다. 미군은 우익 세력의 결집을 위해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발족했다. 이에 맞서 좌익 진영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이하 민전)’을 결성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 모습. (사진=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 모습. (사진=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일제강점기는 끝났는데 친일 경찰은 그대로…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만 해도 환영 인사까지 나갔던 조선 민심은 분노로 바뀌었다. 미군의 실정(失政) 때문이었다. 

미군은 갑작스런 행정 공백으로 인한 혼란을 줄이기 위해 경찰 및 주요 관직에 친일세력을 등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민족을 탄압했던 친일파 경찰이 해방이 되고 나서 아무런 처벌 없이 다시 경찰이 된 셈이었다. 1946년 말 군정경찰 경위급 이상 간부 1157명 중 82%인 949명이 일제경찰 출신이었다. 

또 남북 분단 정책과 매점매석으로 쌀값 폭등현상을 불러온 미곡 자유판매제 도입, 쌀 공출제도(미곡수집령)의 부활, 군정 관리의 부정부패 등이 민심을 잃은 요인이 됐다. 

#제주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이 육지부보다 1년 늦어진 이유

“전국적으로 민전이 결성된 게 1946년 2월 15일. 그리고 제주도에서 민전이 만들어진 건 이듬해 2월 23일입니다. 제주에선 왜 1년씩이나 민전을 만들지 않다가 갑자기 만들었을까…. 이게 바로 3·1발포사건 발단이 된 키워드입니다.”

제주에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상륙한 때는 1945년 11월 9일. 당시만 해도 미군 숫자가 수십 명에 불과했다. 이 병력으로는 제주를 통치할 수가 없어 미군은 육지부 인민위원회와 대립했던 것과는 달리 제주도 인민위원회와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미군정은 1946년 8월 1일 제주를 전라남도에서 분리해 도(道)로 승격시켰다. 이때 행정기관과 함께 경찰기구도 커졌다. 제주경찰서는 감찰서로, 다음달엔 감찰청(지금의 경찰청)으로 승격됐다. 경찰력은 해방 직후 101명에서 이 무렵 300여명으로 늘어난다. 또 조선경비대 9연대가 창설돼 조선에 미군 1개 연대가 늘어났다. 제주에서도 군에 의한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1947년 2월23일엔 3·1절 시위에 대비해 충남·충북 경찰청 소속 각 50명씩 모두 100명으로 구성된 응원경찰대가 제주에 들어왔다. 이 응원경찰들은 일주일 뒤 3·1발포사건을 유발한다. 

1940년대 제주항 모습. (사진=제주특별자치도)
1940년대 제주항 모습. (사진=제주특별자치도)

게다가 미군 관리의 부정부패도 심각했다. 전쟁이 끝나면서 국내 공장이 파괴되고 일본에서 물품을 들여올 수 없게 되자 생필품이 굉장히 부족했다. 제주지역의 경우 일본을 자주 오가던 사람들이 많아 마치 ‘보따리 장수’처럼 배에 생필품을 싣고 와서 파는 일이 성행했다. 당시 미군과 경찰은 이를 “밀무역”이라며 물품을 압수해 착복하는 일이 많았다. 

복시환 사건이 대표 사례다. 1947년 1월 서귀포 법환리 출신 재일동포들이 고향 마을에 전기를 놓기 위해 기증한 전기 자재를 싣고 오던 ‘복시환’이란 선박이 경찰에 적발됐다. 이 자재를 미군과 경찰이 나눠 가지자 제주신보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중앙언론에선 “모리 천하 제주”란 제목으로 보도되며 전국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일본에서 물품을 배에 싣고 들어와 판 일은 밀수라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엔 생활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해방 이후 조선인들은 고무신이 없어 맨발로 다녔다고 합니다. 짚신은 눈이나 비가 오면 젖어 상하게 되니까 아까워서 손에 들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이전까지 제주에선 육지부와 달리 인민위원회가 강력했고 주민들의 지지도 높아 민전 결성의 필요성이 없었다. 하지만 군대 창설 이후 군·경의 탄압이 시작되고 미군 관리와 경찰의 부정부패 등으로 불만이 커지자 결국 제주에서도 민전이 만들어졌다. 3·1발포사건이 있기 일주일 전이었다. 

한편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주최하고 사단법인 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가 주관하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바로읽기’ 강연은 오는 10월 17일까지 격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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