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장마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릴 거라는 기상청 예보와는 달리 7월 이후 역대급으로 짧게 흐지부지 끝나는 듯했다. 맑은 날을 좋아라하는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장마 후 당연히 햇살 쨍쨍한 폭염이어야 할 8월이 뒤통수를 쳤다. 반짝 무더위인가 싶더니 8월 초순부터 지금까지 때 이른 가을장마가 이어지고 있다. 중산간 350고지에 위치한 우리 마을은 지형적인 이유로 해안지역보다 훨씬 비가 많이 내렸다. 마을 인근에 설치된 기상청관측자료시스템(AWS) 자료를 확인해보니 8월 중 비 내린 날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8월 25일)을 기준으로 무려 18일이다. 강수량이 10mm 이상인 날만 꼽아도 13일이나 된다. 기상청 슈퍼컴퓨터느님께서는 이 사태를 미리 예상했던 것일까?

가을 장맛비가 십 여일째 계속되니, 건조기가 없는 우리로서는 빨래 말리기가 참 곤욕이다. 4식구가 벗어던진 땀내 나는 옷가지들과 수건들이 한라산처럼 높이 쌓여만 간다. 잠시 해가 나는 듯해서 급히 세탁기를 돌려 마당에 내어 말렸다간 열대 스콜(squall)처럼 퍼붓는 빗줄기에 쫄딱 젖기 일쑤다. 장마로 습도가 올라가자 불쾌지수마저 덩달아 높아진 것도 큰 문제다. 여름방학과 코로나로 아이들까지 집 안에서 복닥거린다. 이럴 땐 서로(특히 남성) 말 한 마디라도 조심해야 한다. 평소 아무렇지 않고 넘어갈 말 한 마디에, 며칠간 식사가 부실해지고 잠자리까지 바뀔 수 있다. 이 시기를 잘 버텨야 한다.

8월 4일, 리사무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사무장님이 전화를 받아보란다. 제민일보 기자라고 한다. 기자는 대뜸 ‘제주동물테마파크가 건축 허가를 진행하고 있다는데 알고 있었느냐?’며 물었다. 순간 ‘올 것이 또 왔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일단 연락줘서 고맙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난 7월말 곶자왈 생태조사 때 사업지 안을 보니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길래 그러려니 방심했는데, 그냥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유없는 삽질은 군대에만 있나보다. 2016년 12월, 몇 번의 삽질만으로 공사중지 6년 11개월 만에 환경영향평가 재평가를 교묘히 회피한 전력이 있는 그들이 아니던가?

사실 지난 3월 3일 제주도 개발사업심의위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변경승인이 부결될 때만 해도 주민들 모두 한시름 놓았던 게 사실이다. 기존 조랑말 중심 테마파크 방식의 사업은 현실적으로 수익성이 떨어지니까 사업자가 ‘기존 사업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쉽게 생각했었다. 또 5월 말에는 제주동물테마파크 대표이사 S씨가 전 이장에게 사업 찬성을 댓가로 금품을 제공한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나 검찰에 기소되었으니 더 기대를 했었나보다. 하지만 그건 우리들만의 순진한 바램이라는 게 드러나는 데에는 오랜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던 셈이다.

급히 제주도 건축지적과에 전화해보니 담당 공무원은 제주동물테마파크 사업자가 기존에 승인받은 계획(조랑말 중심의 테마파크)으로 대규모 숙박시설, 동식물 관련시설 등 4건에 대해 건축계획심의를 신청했다고 한다. 일단 건축계획심의위원회에서는 심의기준에 맞게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며 ‘재심의’ 의견을 낸 상태라고 한다. 만약 건축심의를 통과하고 건축허가를 받게 된다면, 사업자는 3년이라는 공사시간을 얻게 된다. 올해로 사업기간이 끝나는 사업자는 건축허가를 빌미로 사업기간 연장을 투자유치과에 요구할 요량인 듯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내 전화를 받은 건축지적과 담당 공무원이 바로 10년 가까이 투자유치과에서 근무하면서 제주동물테마파크 사업승인을 위해 발벗고 뛰었던 그 주무관이라는 것이다. 마을총회 결과를 무시하는 투자유치과에 주민들과 함께 항의하러 갔을 때 “자신은 이장이 도장찍어 보낸 공문만 믿는다.”며 큰 소리로 우리에게 면박을 줬던 그 인물이다. 지난해 말 다른 부서로 옮겨가서 속이 시원하더니, 옮겨간 곳에서도 또다시 제주동물테마파크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우연이기만 할까? 암튼 선흘2리 이장이라고 밝히고 그에게 여러 질문을 하자, 되려 “왜 동물테마파크 건축심의에 대해 묻느냐?”고 퉁명스럽게 묻는다. 나는 “동물테마파크를 담당했던 당신이 그 이유를 더 잘 알지 않느냐?”며 쏘아 붙였다.

 번영로변에 새로 단장한 대형 입간판과 포크레인 공사 중인 장면<br>

며칠 뒤 주민들의 신고 전화가 속속 들어왔다. 사업지 인근 번영로 주변에 제주동물테마파크 사업을 알리는 대형 입간판이 나붙었다고…. 자동차를 몰아 사업장 앞에 가보니 입구에 공사안내 게시판을 새 것으로 교체하고,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이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동부경찰서에서도 연락이 왔다. 동물테마파크 찬성위원장이 2년 전 일로 반대대책위원 1명을 고소했으니 경찰서로 조사를 받으러 오란다. 다시 시작인가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 말은 미국 프로야구에서 나온 명언이다. 1973년 뉴욕 메츠 야구팀이 최하위를 달리고 있을 때 한 기자는 메츠 사령탑이었던 요기 베라에게 "시즌이 끝난 것인가?"라고 묻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포기하지 않았던 메츠는 결국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소설가 이외수씨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라는 책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존버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긋지긋한 여름 장마도, 3년 가까이 마을을 힘들게 만드는 동물테마파크 사업도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과 싸울 때 시간은 언제나 그들의 편이다. 힘없는 우리들은 희망과는 별개로 포기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저 진득하니 버티는 수밖에 없다. '존버'하다 보면 길이 나오겠지?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선흘2리 마을회장 이상영 씨는 '20년간 학교에서 지리와 사회를 가르치다 제주로 이주한 지 3년째인 초보 제주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2년 전에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이 된 후, 최근 이장으로 선출·임명되었다. 1973년생인 이상영 이장의 고군분투 마을공동체회복기를 매달 1회 게재한다.<편집자 주>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