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를 다룬 MBD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 스틸컷
정리해고를 다룬 MBD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 스틸컷

“햇살이 포근한 걸 보니 봄은 봄인가 보네”라고 자판기 커피를 뽑으며 입사동기인 동석이가 인사를 건넨다. 나는 “봄이면 뭐하냐. 피곤해 죽겠는데”라고 쏘아붙였다. 계속되는 야근으로 몸이 천근만근인지라 기분 좋게 답할 여유가 없다.

동석이도 사정을 뻔히 아는지라 조금 미안했는지 “그래도 다음 주면 저축해둔 휴가 몰아서 쓸 수 있으니 제수씨랑 어디 놀러라도 다녀와. 나도 가족들이랑 며칠 여행 가기로 했어. 애들이 엄청 좋아하더라고”라며 위로를 건넨다. 나도 ‘그래 이번 주만 지나면 제대로 쉴 수 있겠지. 동석이 말대로 오랜만에 휴가나 가볼까’하고 속으로 애써 마음을 달랜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공장으로 돌아가려는 데 ‘띵똥!’ 문자 알람이 뜬다. 회사에서 갑질로 악명높은 윤부장이 보낸 문자다. ‘직원 여러분, 신제품 출시 준비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바쁘게 일해 준 덕분입니다. 하지만 바로 거래처로 제품이 나가야 합니다. 어려우시겠지만 회사를 생각해서 다음 주까지만 조금 더 힘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도 또? 이달 초부터 야근을 계속했는데 또? 연속으로 야근하는 대신 모아둔 휴가 가라며?’ 욕이 절로 나온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주로 냉동식품을 생산하는 직원 30여명 규모의 그리 크지 않은 회사다. 이달 초 신제품으로 돈까스와 오므라이스를 개발하면서 생산라인을 신규설치하고 포장기계까지 들여오면서 연장근로가 계속되어 왔다.

그동안 피로가 너무 쌓여 연차라도 내서 하루 쉬어보려고 했는데 다들 바쁘게 신제품 출시 준비에 매달리는 상황에서 미안한 마음에 참고 출근하기도 했다. 그래도 출시 준비만 마치면 모아둔 휴가 쓸 생각에 참아왔는데 다시 또 야근이라니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5일 동안 24시간 당직을 서다 사망한 경비노동자 뉴스 때문에 집에서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야근을 더 계속하게 되면 이제 뉴스에 내가 나올까 두렵다.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사는 건 아닌데’하는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렇다고 휴가를 쓰자니 다들 고생하는 데 혼자 쉬기도 미안하고, 윤부장한테 제대로 항의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하다.

함께 공장으로 돌아가던 동석이가 내 눈치를 보며 또 한마디 건넨다. “욱하지 말고 참고 일해보자. 화난다고 여기 그만두면 다른 직장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렵냐. 실은 나도 여행 가는 거 기대했던 가족들에게 뭐라고 할지 난감하다만, 우리가 뭔 힘이 있냐.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아야지”

“그래, 너나 나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가족들 생각하면 별 수 있겠냐. 그저 죽은 듯이 참으며 살아야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고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화사한 봄꽃이 산들바람에 흔들린다. 이 아름다운 봄을 누릴 시간도 없이 일하는 기계 노릇 하러 공장으로 들어선다.

(표=부장원)
(표=부장원)

가상의 위 얘기는 윤석열 정부가 노동개혁 입법 1호로 발표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 주 69시간 제도(주 7일 80.5시간)가 실제 시행되게 되면 나타날 현실이다. 우리나라 법정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다. 여기에 연장근로를 포함한 것이 현행 주 52시간 상한제이다. 주 40시간(주5일제) 제도는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가 오랜 투쟁을 통해 2003년에 관철시킨 제도이다. 국가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밤낮 없이 죽어라 일만 해야 했던 시대에서 그래도 주말에라도 쉴 수 있는 시대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지난 3월 6일 <근로시간 선택권 확대, 근로자 건강권 보호 강화, 휴가 활성화를 통한 휴식권 보장 등>을 위해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확정하고, 주 69시간 근로가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부터 꼭 70년 전인 1953년 제정된 헌법만 보더라도 근로시간은 주 48시간을 기본으로 최대 60시간을 넘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정부가 무슨 명분을 대더라도 이번 개편 방안은 70년 전보다 더 이전으로 노동자들의 조건을 후퇴시킨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개편 방안에 대한 비판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쏟아졌다. 세계적으로도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여러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몇몇 국가에서는 주4일제 실험 결과 우려와 달리 오히려 생산성이 높아졌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소위 선진국 언론에서 노동시간을 늘리는 윤석열 정부의 이번 개편 방안이 노동시간 단축 추세에 역행한다고 비판하는 이유이다.

이미 널리 알려졌듯 2021년 기준 한국 노동자들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1,915시간으로 OECD 가입국가 평균(1,716시간)보다 연 199시간을 더 일하고 있다. 연간 주당 노동시간만 따져도 OECD 가입국가 평균이 36.8시간인데 비해 한국은 40시간으로 높은 편이다. 지난 2020년 한국에서 장시간 노동에 따른 과로사로 인정된 사례만 해도 270여명이 넘는다.

당초 윤석열 정부는 이번 개편 방안이 ‘MZ 근로자’, ‘노조 미가입 근로자’, ‘중소기업 근로자’의 노동권과 건강권, 휴식권 보장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노동조합조차 없는 사업장에서 과연 휴가를 몰아 쓸 수 있겠는가. MZ 근로자나 중소기업 근로자가 사장한테 당당하게 연차사용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인가. 노사합의도 전제조건으로 내세우지만 영세한 사업장에서 사장과의 합의는커녕 말도 못 꺼낼 것이 뻔하다.

정부 조사 결과에서조차 하루라도 연차를 사용한 노동자가 전체의 40%에 불과하다는 게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동료한테 미안해서, 사장 눈치 보여서 있는 휴가조차 맘대로 쓰지 못하는 데, 평소 장시간 노동, 연장근로에 대한 대가를 모아뒀다가 본인이 원할 때 쓰면 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에서나 벌어질 일이다.

주 69시간 개편 방안에 대해 여러 비판이 계속되자 3월 16일 윤석열 대통령은 주 60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보완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과연 주 60시간이면 괜찮을까. 주 60시간 뼈빠지게 열심히 일해도 노동자들의 건강권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주 60시간동안 온 몸을 갈아넣은 대가로 사장님이 ‘그동안 수고했으니 이젠 한 달 동안 편히 휴가 다녀오게“라고 할까.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얘기한대로 "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마음껏 쉴 수“ 있는 사회가 실제 가능하고 바람직한 사회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윤석열 정부는 출범 후 노동개혁, 연금개혁, 교육개혁이라는 3대 개혁을 제시했다. 과거 어떤 대통령도 피하기만 했던 개혁을 이루겠다고 선언했다. 이번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 역시 노동개혁 정책 1호라며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 있는 휴가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살피지 않고, 과로사의 위험으로 몰아넣는 정책이 과연 개혁인지 많은 국민들이 의아해한다. 혹시 개혁을 빙자한 다른 정치적 의도나 기업의 민원을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개혁의 내용이 불합리한 현실을 바꾸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면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라고 부르는 게 상식이다. 많은 이가 상식에 근거해 ‘개악’이라며 반대하는 데 윤석열 정부만 계속 ‘개혁’이니 따라오라고 주장한다면 ‘참 이상한 개혁’이라고 할 수밖에.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이 왔건만 이 세상은 혼돈만 가득하니, 서둘러 ‘오므라이스’나 먹으러 나가야겠다.

부장원 민주노총 제주본부 사무처장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뒤늦게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키워가는 중년. 칼럼 [일상응시]를 통해 평범한 일상부터 거대한 사회적 현실까지, 조용히 관찰하며 삶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