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는 지난달 21일부터 24일까지 재일제주인 최대 밀집 지역 오사카시 이쿠노구(生野區)를 다녀왔다. 답사를 통해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재일동포(자이니치 코리안), 특히 재일제주인의 삶을 살펴보고자 했다. 아울러 일본 내에서의 제주4·3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운동 현황과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 사회를 4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필자주>

(사진=서군택)
통국사 입구. (사진=서군택)

올해로 75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제주 4·3. 그 역사의 또 다른 ‘현장’이 일본 오사카였음을 아는 한국인들은 얼마나 될까? 

​제주와 오사카의 인연은 오래되고 깊다. 오사카는 일본에서 재일조선인(동포)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인데, 제주 출신이 그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일제 식민 지배 아래 제주도민은 먹고살기 위해 당시 일본 최대의 공업 지대였던 오사카로 돈을 벌려고 왔다가 그대로 이곳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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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희생자위령비. (사진=서군택)

오사카의 제주 출신자는 1934년 약 3만7000명에 이르렀는데, 대부분이 밑바닥 노동자로 일본 자본주의의 톱니바퀴에 편입되는 한편, 민족해방을 추구해 오사카의 사회운동을 이끌어가는 한 축을 담당했다.​

해방 후 많은 제주 출신자들이 일단 고향으로 귀환했으나, 일본과의 관계 단절에 따른 송금 두절, 생필품 부족, 콜레라 유행, 대흉작, 취업난 등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특히 제주 4·3의 기점으로 여겨지는 1947년 3·1절 발포 사건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도항하는 사람이 급증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정치 난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제주4·3의 참극은 일본으로 건너온 관계자나 평양을 경유한 외신을 통해 재일조선인(동포) 사회에도 전해졌다. 그로 인해 1949년 오사카 각지에서 제주 출신자들이 중심이 돼 추모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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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 아래 제주를 상징하는 현무암 돌들이 있다. 제주 4·3 당시 희생된 마을에서 가져온 돌이라고 한다. 이치지 노리코 오사카시립대 교수가 돌을 모아 전시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사진=서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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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희생자 위령비 아래 제주도 지도가 있다. 잃어버린 마을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수확한 조로 빚은 고소리술을 위령비에 헌작했다. (사진=서군택)

​그 뒤 한국과 마찬가지로 재일조선인(동포) 사회에서도 제주4·3은 오랫동안 ‘금기’가 됐다. 그런 경향은 오히려 지금의 한국 사회보다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4·3 희생자 유족과 ‘정치 난민’이 집중 거주하는 오사카에서 금기를 깨고 처음으로 위령제가 거행된 것은 제주 무장봉기로부터 50년이 흐른 1998년이었다.

​그로부터 20년. 오사카에 사는 유족들을 비롯해, 은폐되어온 4·3의 진실을 사회에 알리려는 재일조선인(동포)을 중심으로 해마다 위령제, 강연회, 영화상영회, 사진전, 패널전 등 행사가 지속적으로 열렸다. 

​2018년 제주4·3 70주년을 맞이하여 오사카에서 열린 위령제와 국제 심포지엄 등의 행사가 성공리에 끝남으로써 위령제 실행위원회에서는 이 기회에 4·3의 비극을 역사적 교훈으로 후세에 전하고 희생자를 추도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위령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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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영령을 기리며 묵념하고 있다. (사진=서군택)

제주 각지에서 4·3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는 것을 보면서 얻은 착상이다. 다행히 취지에 동의하고, 재일동포 사회와 인연이 깊은 오사카시 덴노지구의 도코쿠사(통국사)에서 부지를 제공해줌으로써 2018년 11월에 위령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마칠 수 있었다.

이 통국사에는 일제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일본에서 한 많은 생을 마치신 분들의 유해가 잠들어 있기도 하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무연고 묘를 통국사에서 고인의 넋을 기리며 관리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뜻있는 단체의 노력에 힘입어 최근 강제징용 무연고 유해 74구가 80년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국에서도 돌보고 관리할 곳이 없어 한동안 여러가지 잡음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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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와 생을 마친 조선인의 무연고 묘. (사진=서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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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토벌이 극악해지자 또다시 제주 젊은이들이 연고가 많은 오사카로 밀항을 했다. 그들이 밀항해서 생존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분단과 전쟁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그들의 고향은 이미 자신들을 향해서 학살의 칼날을 휘두르는, 돌아가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그러니까 도저히 갈 수 없는 고향이 됐고 또한 학살을 피해 도망자란 죄책감까지 짊어지게 했다. 

​1970년대 일부가 고국을 방문하고 유학도 했으나 툭하면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으로 얽어매어 인생을 망쳤기에, 21세기인 지금도 남한과 북한 어느 국적도 선택하지 않고 ‘조선적’이라는, 거주국 일본에서 무국적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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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낸 고소리술을 받아보고 있는 오광현 일본 4·3유족회장(오른쪽)과 김대중 센터 일본후원회 김문남 어르신(사진=서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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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국사 위령비 건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후지나가 다케시 오사카 산업대 교수와 함께 . (사진=서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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