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는 지난달 21일부터 24일까지 재일제주인 최대 밀집 지역 오사카시 이쿠노구(生野區)를 다녀왔다. 답사를 통해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재일동포(자이니치 코리안), 특히 재일제주인의 삶을 살펴보고자 했다. 아울러 일본 내에서의 제주4·3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운동 현황과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 사회를 4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필자주>

오사카성. (사진=서군택)
오사카성. (사진=서군택)

#오사카성(城)

​도요토미는 미천한 신분으로 최고의 권력자에 올랐기에, ‘신분, 계급에 관계 없이 잘난 놈 밀어준다’는 오사카 정서를 만들어냈다. 탄탄하게 쌓인 성벽을 보며 오사카성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윤석열 대통령의 ‘굴욕외교’ 이후 방문하는 게 찝찝해서, 놀라움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압도적으로 크고 높은 오사카성의 성벽을 보고 있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모서리를 직각으로 쌓지 않고 올라갈수록 줄어들게 성벽을 쌓음으로써 성벽은 견고했고, 그래서 어느 나라의 성벽보다도 높게 지어졌다. 일본 전국시대 이후, 무수한 전투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워진 이 성벽은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다. 

오사카성벽. (사진=서군택)
오사카성벽. (사진=서군택)
오사카성벽. (사진=서군택)
오사카성 해자. (사진=서군택)

성을 지키기 위해 성 외곽으로 둘러 판 인공호, 해자(垓子)는 당시 성을 쌓았던 사람들이 적에게서 느꼈던 공포의 크기만큼이나 깊고 넓게 파였다. 그 안에 담긴 수량만 해도 엄청나게 많아서 마치 거대한 강줄기를 보는 것만 같다. 높고 견고한 오사카성을 보고 있으면 이 성을 세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욕이 느껴진다. 

​오사카의 랜드마크로 꼽히는 오사카성은 이처럼 도요토미의 권력욕이 만들어낸 바벨탑이다. 특히 주위에는 우뚝한 천수각의 높이만큼 근대 우리나라와 관련된 가슴 아픈 흔적이 즐비하다. 

​실제 오사카성과 천수각은 권력 다툼 과정에서 소실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했다. 지금의 천수각은 1931년에 중건한 세 번째 천수각이다. 이곳은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핵심지역으로, 일 육군 제4사령부 청사, 위수형무소 터 등이 인접해 있다. 

​사실 오사카성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이 성의 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부터 세계대전까지 일본의 전쟁기지가 이곳이다. 또 윤봉길 의사가 수감되었던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 터가 있다. 일본은 이러한 군사시설 건설에 우리 조선인을 대거 동원하였으니 우리를 치는 칼을 우리 손으로 만들게 한 것이다. 

#전쟁의 흔적, 일본 육군 제4사령부 청사 

미라이자 오사카성. (사진=서군택)
미라이자 오사카성. (사진=서군택)

천수각 바로 앞에는 근대 양식으로 지어진 ‘미라이자 오사카 성’이라는 건물이 있다. 1931년 3월 22일에 육군 제4사령부 청사로 지어진 건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군에게 접수되었으나, 종전 후 다시 일본으로 반환되어 한동안 오사카 경찰서 본부로 사용되었다. ​

그 후, 1960년부터는 오사카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오사카 시립박물관의 새 건물이 건립되면서 2002년부터는 잠시 폐관되기도 했다. 2004년부터는 내관을 새롭게 단장하여 레스토랑, 전시관,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오사카성에 남겨진 전쟁·강제징용의 흉터

기록비. (사진=서군택)
기록비. (사진=서군택)
기록비. (사진=서군택)
기록비. (사진=서군택)

오사카성에 있는 '오사카성 공원 내에 남은 전쟁의 흉터' 기록비. 2차 대전 중 오사카성에 남은 폭격 흔적, 주변에 있던 군 사령부와 무기공장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1300명 이상의 조선인이 강제징용 됐음을 밝히고 있다. 

“지난 전쟁에서 우리나라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사람들에게 큰 재앙과 고통을 안겨줬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해당 기록비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 한일관계가 진전되는 분위기 속에서 1996년 오사카부, 오사카시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오사카 사회운동 현창탑(顯彰塔)​

현창탑. (사진=서군택)
현창탑. (사진=서군택)

대판 사회운동 현창탑은 대판지방 통일메이데이에서의 결의에 따라 대판지역의 노동자·농민·민주단체·시민 등의 모금으로 1970년 10월 준공되었다. 이 탑에는 매년 새로운 현창자 명단이 적힌 방명판을 현창탑 내부에 게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국인으로는 김문준과 조몽구가 현창되어 있다.

김문준.
김문준.

​제주도에서 출생한 김문준은 1920년대부터 대판의 조선인노동조합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김문준은 1930년 8월에 고무공장 노동자 파업을 준비하던 중에 치안유지법으로 붙잡혀 징역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민중시보》를 발간해 한인 노동자의 계몽과 생활권 보장을 위해 활동하였으나 수감 중에 얻은 후유증으로 1936년 5월에 병사하였다. 

제주 출신의 조몽구도 1920년대부터 대판의 조선인노동조합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조선인노동운동가다. 1931년 7월에 붙잡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받고 1935년 12월까지 도쿠시마(德島)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조몽구. (사진=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조몽구. (사진=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이 탑을 관리·운영하고 사회운동 자료수집 및 운동사 간행을 위해 대판사회운동협의회가 설립됐다.

#재일조선인이란 누구인가? ​

우리는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같은 민족’이라는 막연한 의식 때문에 잘 모르면서 왠지 그냥 아는 것 같은 느낌만 갖고 있지 않은가?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아래와 같이 얘기한다. 

“한국에도 ‘재일조선인’을 가리키는 다양한 호칭이 있습니다. 재일 한국인, 재일 한인, 재일 교포, 재일 코리안, 자이니치…. 또 재일조선이란 대체로 ‘조총련계’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 살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이라는 의미에서 재일조선인이라고 총칭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해방 직후, 온갖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민족 분단이 고착화되어 조선 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가 성립했습니다. 조선 반도에 사는 사람들, 특히 분단 이후에 태어나 자란 세대는 자신이 태어난 국가의 국민인 것을 무의식중에 대전제로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때 민족이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어떨지 상상해보십시오.

​해방 후에도 일본에 남은 60만 조선인에게는 ‘국적’이 없었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강제된 ‘일본 국적’은 1952년(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일방적으로 박탈당했는데, 당시 조국은 분단되었을 뿐 아니라, 남북 모두 일본과 국교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처참한 무권리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1945년부터 1948년에 걸쳐 조국의 사람들을 분단시킨 정치 폭력이, 당시는 아직 재일조선인에게까지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국이 ‘둘’로 분단된 후에도 재일조선인은 ‘하나’였습니다.(분단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1965년의 한일조약을 계기로 한일 간에 국교가 체결되고, 재일조선인의 한국 ‘국민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70년대와 80년대에 적지 않은 재일조선인이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았는데, 그것도 크게 보면 ‘분단되지 않은 사람들’을 억지로 분단시켜 국민화하려는 정치 폭력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 서경식 교수의 책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에서 발췌-

재일조선인 1세대는 재일(在日)을 두 번 겪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한 번의 재일(在日)을 거쳤고, 8.15 해방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1차적 재일(在日)이 끝난다. 

​그들은 삶에 굶주려서, 또는 제주4·3에 얽혀 제주를 떠나 일본에 정착하여 2차적 재일(在日)을 하게 된다. 해방으로 인하여 “이게 너의 나라다”라며 조선으로 돌려보내졌다가 “여긴 네가 있을 나라가 아니다”라며 대한민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다. 

​재일조선인 2세대,

일본에서의 차별 속에 본인의 정체성을 찾으러 온 재일조선인(동포) 유학생들이 재일조선인 2세대에 속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조국에 유학 온 수많은 이들을, 간첩으로 옭아매서 그들 정부의 희생양으로 삼아 정권을 유지했다. ​

재일조선인 3·4세대,

정대세, 안창림, 추성훈이 받았던 일본에서의 차별과 한국에서의 역차별의 눈물을 기억하는가.  

서경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 그것이 재일조선인이다. 머조리티(majority)에게는 그런 고민이 없다. 마이너리티(minority)고민에는 귀중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것을 뛰어넘어 다음 시대를 통찰하는 인간이 갖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이란 국가나 머조리티의 횡포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을 가리킨다.”

* 인용한 위 대목에는 북한, 한국, 일본 어느 나라의 이름도 들어가 있지 않다. 재일조선인은 한국, 일본, 북한 세 나라의 역사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 소수자 일반의 문제로 넓어진다. ​

서경식 ​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경경제대학교 명예교수, 동경경제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 동경경제대학교 교수를 거쳤고 2012년에는 제6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했다.

리쓰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學) 교수인 서승과 인권운동가인 서준식의 동생으로 방북으로 인해 구속되었던 형들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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