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투_볼륨]은 도내 행정과 각 기관의 책임자 급 인사들을 만나 지역 현안과 정책에 대해 묻고 듣는 코너입니다. 제주의 미래는 마냥 밝은 유토피아일까요, 아니면 어두운 디스토피아일까요. 전세계적인 기후위기를 생각하면 제주의 미래 전망 역시 마냥 밝지만은 않습니다. 지난 10여 년의 시간 동안 급속히 개발된 제주는 그로 인한 다양한 사회적 부작용도 겪고 있습니다.  제주투데이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의식 아래, 주요 인사들이 제주의 현안과 이슈를 어떻게 진단하고 고민하는지 두텁게 묻고 듣고자 합니다. 세 번째 순서는 문순덕 제주여성가족연구원장입니다.<편집자 주>

'문순덕 원장'을 처음 본 건 5월 8일 취임 후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제주여성가족연구원들과 인테넷기자협회 기자들 점심 자리였다. 

공공기관 종사자와 언론사 기자 간 식사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야 뻔하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형식적인 질문과 원론적인 대답이 오가는 동안 식사자리가 끝난다. 아무 인상도 없는 만남. 대게 그랬다. 

그날 시작도 별다르지 않았다. 여가원 제4대 수장으로 취임 한 문순덕 원장에게 기자들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문 원장은 그간 관련 기관들을 돌아다니며 현안 파악을 하느라 시간을 정신없이 보냈다면서 기자들에 식사를 권했다. 메뉴는 초밥이었다.  

어색함이 무르익을 즈음, 누군가 '여성할당제' 이야기를 꺼냈다. 여성들의 공직 진출을 늘리자는 취지의 제도다. 한 기자가 '기계적 평등'에 해당하는 할당제에 회의적이라고 했다. 한 때 정치를 꿈꿨던 여성의 말이 떠올랐다.

"출마 후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가장 무서웠던 건, '의사결정'이었다. 선거판 상황은 시시각각 변한다. 변수도 많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빠르게 전략과 전술을 결정해야 한다. 낙마하고 알았다. 지금까지 조직의 명운을 건 의사결정을 해본 경험이 없다는 것을. 남성 중심의 사회・정치구조 안에서 여성이 여러 대안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과정을 경험 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성별할당제가 오히려 역차별을 일으킨다는 주장도 있다. 문순덕 원장은 여성이 주요 보직을 맡게 될 때는 대게 "대체 할 남성이 없을 때"라고 했다. 학생 회장은 물론이고 종교 단체 안에거 회장을 뽑을 때도 "우선 남성을 먼저 물색한 뒤 마땅한 인물이 없으면 여성에게 그 자리를 제안한다. 사회는 아직 남성의 대안으로서 여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특정 성이 차별받지 않는 '그날이 오면' 성별할당제 따윈 필요 없다. 다만 구조화된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기계적 중립'을 통해서라도 다음 세대를 위한 길을 터야 한다는 문 원장은 민주주의는 차별 앞에서 무너진다고 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실패가 잦을 수 있다. 다만 실패한 여성의 오답풀이를 기다려주는 사회만이 성평등을 완성할 수 있다. 

그가 "성평등한 제주에 한 발짝 더 다가가기 위해서라도 기초자치단체 도입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식사 자리가 끝나가고 있었다.

아직 성평등 차원에서 기초자치단체 필요성이 논의된 적이 없었다. 더 듣고 싶었다. 식당에서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 문 원장을 불러 인터뷰 제안을 했다. 

문순덕 여가원장 (사진=박지희 기자)
문순덕 여가원장 (사진=박지희 기자)

▶왜 성평등 차원에서 기초자치단체 도입이 중요한가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 확대 측면에서 보자. 단층제(광역자치단체)를 채택한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기초의회가 없다. 여성의 정계 진출 문이 좁다는 의미다. 한국 사회는 '정치엘리트'  인식이 팽배하다. 좀 배우고, 아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여긴다. 소수 엘리트가 사회의 각 영역에서 독점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경우, 정치는 폐쇄적이 된다.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기기 어려운 구조라는 의미인가

정치는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을 비롯해 청년, 농부, 장애인 등 각계각층의 시민(이해관계자)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형태로 행정체제 개편이 이뤄질 지 모르지만) 기초의회는 광역의회보다 시민의 삶과 더 밀접하다. 정치 신인들이 기초의회에서 실력을 쌓고 광역 의회로 진출한다면 제주의 정치력이 지금보다 올라가지 않을까. 여성의 대표성 확대를 위해 '비례대표 여성할당제' 도입 이후 제주도 여성 의원 활동이 전보다는 많아졌다. 하지만 지역구 당선 사례는 여전히 적다. 

▶김경미 보건복지위원장을 비롯해 고태순 의원, 이선화·현정화 전 의원 등 두각을 드러낸 여성 의원 대부분 비례대표 출신이긴 하다.

최근 선출직으로 시작한 여성 의원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공정한 레이스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선출직 의원이 되는 것은 남성 후보도 어렵긴 마찬가지겠지만, 여성 후보들의 어려움이 더 많다. 이들이 비례대표로 도의회 입성을 하지 않았다면 정계 진출이 가능했을까. 여성은 일단 조직력이 약하다. 다시 말해 세가 약하다. 

▶김경미 의원은 자신의 경우 절대 불가능했으것이라고 하더라. 제주사회 '이너서클(조직을 가지고 있는 핵심층)' 역시 남성 중심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지역구에 출마를 선언한다고 해도, (전략 공천 지역이 아니라면) 정당 내부 경선을 뚫어야 한다. 가정으로 가보자. (기혼을 기준으로) 여성 출마자가 양가 가족과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여성 도의원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긴 하지만, 사회의 유리천장 깨기가 그토록 어렵듯, 정치도 마찬가지다. 여성은 배로 노력해야 한다. 

문순덕 여가원장 (사진=박지희 기자)
문순덕 여가원장 (사진=박지희 기자)

▶다른 지자체도 비슷한 형편이지만 아직까지 제주는 여성 자치단체장을 세워본 적이 없다

전국적으로 이제야 여성 시장군수가 조금씩 나오는 형편이다. 그나마 기초자치단체가 있어 여성의 정치 진입 기회가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주는 여성도지사가 나올 수 있는 이 길이 막혀 있다.  여가원 원장으로서 여성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곤 있지만 여성에게만 그 문호가 막혀 있다는 건 아니다. 정치 신인들에게 기회가 적다는 의미로 넓게 들어주셨으면 한다. 

▶그럼에도 여성이 정계 진출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듣고 싶다

정치적 대표성 확대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정책을 설정하고 결정하는 자리는 직능별로 구성돼야 한다고 본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목소리가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남성 정치인들이 의도적으로 성차별적 정책을 만들진 않을 거다. 가령 밤거리의 무서움을 경험하지 못한 남성의 도시정책과 밤거리가 무서운 여성의 도시정책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남성이 느껴본 적 없는 문제를 정책화 하지 못하는 거다. 당사자 문제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안다.  

▶이동의 불편을 느껴보지 못한 정치인과 휠체어를 탄 정치인의 도시정책이 다를 수 밖에 없듯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이해당사자가 가야 한다. 여성뿐 아니라 다양한 직능별 대표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자신들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해야 풀뿌리 민주주의에 가까워지는 거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회의원 비례대표 여성할당제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어느새 쏙 들어갔다. 선출직 수는 줄이고 비례대표 수는 늘리되, 비례대표를 직능별로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정치 파트너 없인 의정활동이 어렵다. 정치 신인의 경우 그런 부분에서도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의정 활동을 하려면 지지 세력은 물론이고, 의제와 정책 발굴 조력자가 필요하다. 지역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중점 사업도 추진해야 한다. 예산 확보도 필수다. 때문에 여성 조력자가 팀으로 붙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이 부분이 잘 안 되더라. 성비로 따지면 반반인데, 여성이 여성의 힘이 돼 주지 않는다. 당사자 연대가 필요하다. 

▶마을 단위에서 성평등도 같이 이뤄져야 하지 않나.

성평등한 마을 지표는 의사결정권에 있어 성별격차가 어느 정도인가다. 2023년 현재 제주도 172개 마을 중 여성 이장은 5명(애월읍 애월리, 대정읍 동일2리, 한경면 금능리, 한립읍 대림리, 한림읍 귀덕3리)에 불과하다.

▶마을 운영위원회 성원 중에 여성은 부녀회장 정도다. 마을총회 선거권은 대부분 1가구 1표제다. 가족을 대표하는 남성이 투표권을 갖는다는 의미다. 어떤 마을 주민으로부터 총회 풍경을 전해 들은 적이 있는데 마을 사업 총의를 모으는 과정에서 여성은 남편 거수기 역할이라는 말까지 하더라. 남편이 "손 안 들어"라고 하면 내용도 모르고 손을 든다고. 

문순덕 여가원장 (사진=박지희 기자)
문순덕 여가원장 (사진=박지희 기자)

마을 운영에 있어 여성의 의사결정 참여는 아주 미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제주만의 문제는 아닐거다. 성평등한 마을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그러나 마을의 주요 사업을 논의하는 개발위원회도 남성이 대부분이고, 어촌계장도 주로 남성이다. 이를 비롯해 주민자치위원회나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마을자생단체 등을 성인지 관점에서 재구성 할 필요가 있다. 

▶여가원은 제주도정 여성 정책 연구기관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마을의 경우 여성할당제 도입을 강제 할 순 없다. 제도로 의무화 한다면 '마을 자치'와 어긋난다. 마을이 스스로 성별 격차를 해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성평등 인식 확산 캠페인과 교육을 하는 이유기도 하다. 

▶구호에 그칠 수 있다.

여성 정치인이나 여성 정책가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구상중이다. 이름은 고민중인데 여성정책 혹은 여성정치 아카데미 식의. 2030 여성 정치 그룹도 만들고, 기성 정치인 그룹도 만들어 연결하고.

▶아카데미 출신이 선거 운동원으로 가기도 하고 마을 이장으로 출마도 하고?

정치 시민의 근력을 키워서 마을 이장 출마도 권하고 지역구 출마도 권하는 상상을 해본다. 제 임기 동안 여성 대표성 확대를 위한 그런 초당적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싶다. 정당에서 개최하는 여성 아카데미가 있긴 하지만 당원에 한정한다. 당이 아니라 의제 아래 함께 모여 초당적으로 공부해보자는 거다. 

▶예산 확보가 중요할 것 같은데

늘 그게 문제다. 여가원 예산이 많지가 않다.

▶임기 중 다른 중점 과제는 또 뭐가 있나

많지만 하나만 꼽자면 작년에는 4・3 이후 제주 여성의 노동과 삶을 재조명 했는데 올해는 일제강점기 제주 여성들의 인권 운동을 재조명을 하려고 한다. 당시 일본과 제주도에서 식민지 국민으로 살아내야 했던 지난한 삶의 여정을 탐색하는 연구로, 여성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보면 될 것 같다. 

▶작년에 여가원이 발간한 '근현대 제주여성구술사Ⅰ - 4・3 이후 제주 여성의 노동과 삶' 보고서 반응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인 욕심이 있다면 해방 이후 여성사를 완성하고 싶다. 제주연구원에 있을 때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는 다뤘는데, 해방 직후 연구는 아직이다. 책이 한 권이 될 지 두 권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임기 중 제주 현대여성사를 편찬하고 싶다. 

▶다시 돌아와서, 진정한 성평등은 뭐라고 생각하는 지. 누군가는 국회의원 성비가 50:50이 되는 날이라고 하던데. 

그건 제도적 변화고, 의식이 평등해야 한다. 그래서 언어 평등이 이뤄졌을 때 진정한 성평등이 이뤄졌다고 본다. 우리의 의식이 완전히 바뀌어서 남녀 상관없이 중성언어를 사용할 때. 

▶의식이 곧 말이 될 때?

여성대학이 사라지고, 여학생이 사라지고, 여가원이 사라질 때. 정부의 일방적 폐지 말고. 

여름 초입에 문순덕 원장을 만났는데 열대아가 시작될 때 기사가 나간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다 담지 못했다. 담기지 못한 말들은 이후 그의 행보에서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문 원장은 정치가 젠더 갈등을 조장하지 않는 사회에서 여가원이 사라지는 '그 날'을 꿈꿨다. 그 날을 위해 혹시 출마 할 의사가 있냐고 묻자 "전혀 없다"고 손사레를 쳤다. 

곧 총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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