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들, 그 중 먼지에 쌓여 존재감이 희미해진 이야기들을 다시금 햇살 아래로 끌어내고자 하는 마음에서 [꼬닥꼬닥_마을신화]연재를 시작한다. 구술 채록된 제주 마을의 신화 가운데 서사를 갖춘 이야기를 중심으로 동료 연구자들과 토론도 하고 답사도 진행했다. 마을에 전해오는 신화를 공유하고 보전하는 것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자연의 신성성을 되찾는 작업이 될 것이라 믿는다.   

거문데기 당오름밧 하르방당. (사진=여연)
거문데기 당오름밧 하르방당. (사진=여연)

유수암 마을을 세운 홍좌수는 어릴 때부터 우김이 세고 기백이 넘쳤다. 홍장수가 장성한 후에는 제주목사와 대거리를 할 정도로 호탕하였다. 

홍좌수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백발노인이 나타나 말을 했다.

“나는 이 마을을 지키는 송 씨 영감이다. 나에게 좌정할 곳을 마련해 주고 정성으로 섬기면 그만한 대가가 있을 것이다.”

홍좌수가 꿈에서 깬 후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의논을 하고 백발노인을 신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을이 날로 번성하였고 홍좌수도 천하 거부로 잘 살았다. 

그러자 해안 쪽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 홍좌수를 시기하였다. 그래서 홍좌수를 없애버리기로 모의를 하고 은밀하게 계획을 짰다. 그날 밤 백발노인이 다시 홍좌수의 꿈에 나타나 아무 날 아무 시에 위험한 일이 닥칠 것이니 이리저리 대비를 하라고 일러주었다. 

날이 밝자 홍좌수가 제주목사에게 달려가 사령 예닐곱 명을 빌려왔다. 그러고는 사령들에게 밤낮을 번갈아가며 집 주변을 지키게 하니 아무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이후 마을은 대대손손 자손이 불어나 더욱 번성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본향당에 가서 제를 올릴 때 홍좌수의 업적도 같이 거론해서 자손들이 그 공로를 잊지 않도록 했다.   

 (진성기, 『제주도 무가본풀이 사전』을 바탕으로 재정리)

유수암 거문데기 하르방당 안내석. (사진=여연)
유수암 거문데기 하르방당 안내석. (사진=여연)

유수암 마을은 조선 시대 초기 지방 토호의 한 사람이었던 좌수 홍덕수에 의해 세워졌다. 홍좌수는 주변 사람들을 모아 유수암으로 이주시키고, 자신도 식솔들과 노비들을 이끌고 들어와 살면서 이곳을 번성시켰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화 속 서사는 실제 있었던 설촌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거문데기 하르방당 신화 속에는 마을을 설립한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흐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고유한 마을 이름들을 한자로 죄다 고쳐놓으면서 유수암리도 금덕리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995년 옛 지명 찾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유수암’이란 마을 이름을 되살렸다.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자신들의 옛 마을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러한 노력과 자부심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유수암리 거문데기 당오름밧 하르방당과 할망당은 거문덕이라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하르방당은 돌담으로 널찍하게 울타리를 두르고 있고 안내판까지 세워놓고 있었지만 평소 관리가 안 되어 있어 풀이 많이 우거진 상태였다. 할망당 역시 2015년에 찾아왔을 때는 깔끔하고 아담해서 감탄했던 곳인데 풀에 뒤덮이다시피 했다. 주변엔 전원주택들이 하나 둘 들어서고 있어 어쩌면 택지개발로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풍경이었다. 

풀에 뒤덮인 거문데기 당오름밧 할망당. (사진=여연)
풀에 뒤덮인 거문데기 당오름밧 할망당. (사진=여연)

거문데기 하르방당에 가기 전에 유수암 아랫마을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스스로 백 살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하시면서 마을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 주셨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거문데기 쪽엔 상놈들이 산다고 하면서 그쪽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게 했다는 말도 했다. 거문데기에 살고 있는 친구네 집에 가면 친구 어머니가 ‘상놈 사는 동네와 무사 와서?’하면서 빈정거렸다고 했다. 

유수암은 유서 깊은 마을인 만큼 곳곳에서 늙은 팽나무가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높은 중산간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물이 풍부하여 유수암(流水岩)이라 부르는 이곳엔 아직도 용천수가 맑게 흐르고, 집 정원과 올레가 아름다워 걷는 맛이 난다. 용천수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옛날에는 무척 한적하였을 윗마을 거문데기 언덕 주변에는 전원주택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어 마을의 풍경을 바꿔놓고 있었다.

여연

국어교사로 아이들과 함께했으며, 현재 제주 신화 관련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제주의 역사와 문화, 자연 등을 추억과 함께 담아낸 <제주의 파랑새>(도서출판 각), 제주의 마을길을 걸으며 신화와 만나는 <신화와 함께하는 당올레 기행>(알렙, 공저)<제주 당신을 만나다>(알렙, 공저),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르며 재미있고 쉽게 풀어낸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와 아이들이 제주신화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획한 <체험학습으로 만나는 제주신화>(지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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