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회사에서 판매하는 씨앗들. 조그마한 씨앗 한알에 500원 정도는 이제 흔하다. 700원짜리 씨앗도 있다. (사진=김연주)
종자회사에서 판매하는 씨앗들. 조그마한 씨앗 한알에 500원 정도는 이제 흔하다. 700원짜리 씨앗도 있다. (사진=김연주)

난 피망과 파프리카의 차이를 잘 몰랐다. 아니 아직도 잘 모른다. ‘피망은 초록색이고, 피망은 파프리카에 비해 조금 저렴한 가격이다’ 정도로 알 뿐이다. 난 그저 모종을 사올 때 피망이라고 하면 피망인가 보다 하고, 파프리카라고 하면 파프리카인가 보다 했다. 

올해는 피망 몇 주를 심어놓고 키웠다. 그런데 피망도 때가 되니 고추처럼 붉게 변했다. 피망은 고추를 개량해 만든 것인데, 피망의 매운맛을 없애고 단맛이 나게 만든 것이 파프리카라고 한다. 아삭한 맛이 좋고 매운맛이 거의 없는 고추가 피망인 것이다. 이처럼 피망과 파프리카는 고추를 개량하여 만들어진 품종이다. 

매해 씨를 받아 심어 고르게 피망이 열린다는 어느 농민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그러나 보통의 피망과 파프리카, 청양고추는 씨를 받아 심어도 처음엔 우리가 종묘상(농작물의 씨앗이나 묘목을 파는 가게)에서 사다 심은 형질의 피망과 파프리카, 청양고추가 열리지 않는다. 

또한 해를 거듭할수록 수확량이 떨어지거나, 발아율이 떨어져 발아가 거의 안되기도 한다. 열매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모양이 변하거나 크기가 커지거나 작아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내년에 또 피망을 심어 키우려면 씨앗을 사던 모종을 사던가 해야 한다. 농민이 피망 농사를 지어 피망을 수확하고, 씨앗을 갈무리하여 씨앗을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그래서 그 씨앗으로 내년에도 피망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의 순리이고 이치에도 맞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 씨앗을 생산해 내는 농민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해마다 씨앗을 사야 한다. 씨앗을 농민이 아닌 누군가가 가지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피망과 파프리카, 청양고추가 어디에서 왔는가? 청양고추 이전에 우리가 심었던 고추가 있었을 것이다. 

토종고추라 불리는 고추들을 개량하고 육종, 교잡시켜서 피망과 파프리카, 청양고추가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와 같은 신품종을 육종한 이들이 종자 등록을 하거나 특허를 받음으로써 농민이 채종하거나 육종할 기회는 사라지게 됐다. 

애초에 씨앗은 농민의 손에서 농민의 손으로 할머니에게서 며느리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 전해졌다. 그렇게 현재까지 이어져 왔건만 이제는 할머니의 손에, 어머니의 손에, 농민의 손에 씨앗이 없다.

이제는 글로벌 농기업의 저장창고에 씨앗이 잘 보관되어 있다. 한 자루에 몇 억씩 하는 씨앗이 말이다. 해마다 농민은 그 씨앗을 사고 반쪽짜리 농사를 짓는다. 

다양한 토종씨앗없이는 개량씨앗도 육종도 없다. (사진=김연주)
다양한 토종씨앗없이는 개량씨앗도 육종도 없다. (사진=김연주)

우리나라 종묘회사가 개발한 청양고추가 IMF 때 외국 종묘회사로 넘어갔다가 잠시 국내 기업에게 돌아왔던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을 두고 "종자 주권을 잃었다가 찾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기업이 청양고추의 상표권을 가지고 있는지, 로열티가 지급되는지에 상관없이 농민에게 씨앗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외국 종자회사에 로열티를 주지 않는 대신 우리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어떠한 이득이나 혜택도 없다. 

해마다 새로운 씨앗을 사야 하고 그만큼 영농비가 들어가는 건 여전히 변함없다.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 가격도 농민 맘대로 정하지 못하는 세상에 해마다 씨앗을 사고, 많은 농자재를 사면서 초국적 농기업들만 살찌고 있는 셈이다. 

1월이면 육묘장(모나 묘목을 기르는 장소)에는 벌써 고추 씨앗을 붓는다. 조그만 육묘장이건 규모가 큰 육묘장이건 빈자리 없이 고추를 키운다. 그 많은 고추 모종들 중 우리 농민의 손으로 씨앗을 받아 키우는 토종고추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보기 힘들다. 

육묘장에서 보기 어려운 토종고추가 마트에서 소비자를 기다릴 리 만무하고, 토종고추에 대해 아는 이가 없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농민의 것이었던 씨앗이 어느새 농민은 돈을 주고 사야만 하는 기업의 것이 되었다. 

인도의 전통적인 면화 재배 농민들은 하나둘 GM(유전자 변형) 면화재배를 하게 됐다 면화 밭에서 풀을 뜯던 양과 염소는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농민들은 GM 면화를 재배하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품고 품종을 바꿔 농사를 지었지만 빚은 점점 늘어만 가니 인도의 면화 재배 농민들의 자살률도 높아져만 갔다. 

뒤늦게 예전에 재배하던 면화를 다시 재배하고자 씨앗을 찾았으나 이미 재배한 지 오래된 토종 면화는 그 어디에서도 씨를 구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종자회사의 실험실에서 새로운 품종 개량을 위해 연구되고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비슷한 일들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종자 주권을 지키는 일이 한 사람의 농민이 외친다고 될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를 자각한 농민들이 조금씩 목소리를 모으고 행동으로 옮긴다면 잃어버린 씨앗의 권리를 되찾지 못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청양고추를 만들고 피망을 육종하고, 파프리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주 먼 옛날 우리네 할머니들의 고추 토종 고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토종고추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 종자 주권을 지키는 일에 한걸음 나아가는 일인 것을 알려야만 빼앗긴 종자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 

 

김연주.
김연주.

전업농이 된 지 5년 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