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또 비다. 해마다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지만 올겨울은 더 유난하다. 어릴 때 기억으론 겨울이 건조하단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도무지 건조하단 느낌이 들지 않는다. 칙칙한 나날들의 연속이다. 

어렸을 적 중산간에 위치한 우리 마을은 무말랭이 만드는 작업을 겨우내 했다. 무를 썰어 찬바람에 자연건조했다. 앙상하게 마른 무말랭이를 거둬들이고 커다란 마대 자루에 담는 작업을 하노라면 손끝이 다 헐었다. 겨울 찬바람에 손등이 트고 그것도 모자라 손끝과 손톱도 모두 헤졌다. 

요즘의 날씨라면 과연 무말랭이를 앙상한 가지처럼 말릴 수 있을까? 여름이나 가을에 고추를 자연건조할 수 없다는 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나, 한겨울에도 이리 비가 많을 줄이야. 흡사 한여름 장마 기간 같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다가 해가 쨍! 잠시 땅이 말라 날이 갤 듯 하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쏟아진다. 수확하다 잠시 손 놓고 있는 당근과 월동무는 봄의 기운을 느끼는 듯 꽃대 올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12월 초순에 폭설이 한번 내렸다. 폭설이나 한파라고 해도 12월 중순을 넘겨 12월 말 경이나 되어야 찾아오던 제주 날씨에 이상이 생겼다. 

12월 초순 폭설이 갑작스레 찾아오기 하루 전날도 여름이냐며 반팔을 입고 작업하며, 움직이는 자동차에선 에어컨 버튼을 찾아 눌렀다. 3~4일 이후 한파가 물러가고 나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찾아온 여름. 12월이라는 걸 상기하지 않는다면 도무지 지금이 겨울이라는 걸 감도 잡지 못할 기온과 태양빛이었다. 

▲제주도가 겨울철 폭설에 대비해 대중교통 특별수송 대책기간에 들어간다.@자료사진 제주투데이
폭설이 내린 제주도 모습. (사진=제주투데이 DB)

당근과 월동무는 1월이 되어도 단맛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고, 조금 일찍 파종한 당근은 작은 월동무만큼 크기만 자랐다. 월동무도 동글동글 귀엽고 앙증맞은 모양이라야 하건만 길쭉하고 퉁퉁한 단무지무 형상으로 자랐다. 

성급하고 매섭게 한파가 찾아왔다간 아직은 늦여름이라고 말하는 듯 다시 기온은 높아졌다. 작물이 제대로 자라거나 고유의 향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파에 상해버린 잎은 따뜻한 날씨에도 땅속 작물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게 했다. 아직 수확을 기다리는 월동무와 당근은 제대로 수확되어 소비자에게 갈 수 있을까. 

이상한 날씨의 행진은 올겨울만이 아니었다. 내가 아직 전업농이 아니었을 때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여름 내내 키워온 콩을 수확하는 가을이었다. 10월 말부터 계속된 가을장마는 수확을 기다리는 콩을 그대로 곰팡이 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지금이야 잠시 바람이 불어주면 기계로 수확하여 건조기에 넣을 수 있지만 당시는 손으로 콩을 꺾고, 모아두고, 경운기에 연결된 탈곡기에 탈탈거리며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쓰며 탈곡을 해야 했던 때이다. 몇일 간 날이 좋아야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계속되는 장마로 곰팡이 핀 콩밭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2년 전에는 수박 모종을 밭에다 심어놓고 50여 일간 내리는 비로 모종이 녹아내려 그대로 갈아엎은 적이 있었다. 또 늦여름 여물다 만 콩이 우박을 맞고 옷을 홀랑 벗겨놓은 형상으로 가을을 맞이하더니 쭉정이(껍질만 있고 속이 빈 곡식)만 수확한 적이 있다. 양파 모종을 부어놓고 열심히 물을 주며 관리했건만 정식시기가 다가올수록 양파 모종이 땅으로 꺼져간 적도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초보 농민이 모종 키우는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베테랑 농민들의 모종도 그랬다는 것이 아닌가. 여름 태양빛이 너무 강하고, 기온이 높아 모종이 죄다 녹아내렸다. 

양파 모종은 그렇게 생을 다할 때까지 모종판에 있었다. 태풍이 쓸어버린 어린 메밀밭, 수확을 앞두고 작살 나버린 콩밭 따위는 이제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항상 제2의 대안을 가지고 있거나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수확된 수박들. (사진=김연주)
수확된 수박들. (사진=김연주)

짧은 농민 경력이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위기감은 폭풍전야처럼 불안을 증폭시킨다. 내년에도 노지에 콩 농사를 할 수 있을까? 내후년에는 수박농사를 그만둬야 할까? 이러한 문제들을 매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아직 농민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이 내게는 많이 남았는데, 노지 농사를 할 시간은 충분히 확보되어 있지 않다는 불안감이 든다. 

작년에야 급기야 조그만 비닐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생태농업으로의 전환, 탈석유 농업에 대한 필요가 높아져가는 마당에 아이러니하게도 소농인 나조차도 비닐하우스 농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비닐하우스 농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해서 소농의 생활이 그리 대단하게 변한 것은 없다. 오히려 일은 많아지고 농민의 허리는 더 꼬부라져만 간다. 이런 방식의 농사, 이런 방식의 삶이 언제까지 지속가능할 것인가. 

계속되는 비로 해를 봤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멀쩡한 사람이 우울증을 앓을 정도다. 식물이나 동물인들 정상일까. 우리의 농장, 내 마음, 농민의 마음에 빨리 해가 쨍하기를 바란다. 

김연주.
김연주.

전업농이 된 지 6년 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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