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수오)
(사진=김수오)

이제 작살은 거두어도 좋다. 물안경 하나면 족하다. 한참을 헤엄쳐 검은여로 가는 길에 조심스럽게 물속을 바라본다. 와락 덤벼들듯 모든 것이 가깝게 보인다. 두려움 속에서 살펴본다. 동그란 공기 주머니가 달린 모자반이 물 위로 오르는 듯 흔들거리는 사이로 자리돔 떼가 헤엄쳐 다닌다. 꼬리를 흔들며 살짝 방향을 바꿀 때마다 은빛 검은빛을 오간다. 노란색 초록색 줄무늬의 코생이, 어랭이 같은 물고기도 있다. 검은 바위 위에 크고 작은 수초들 사이에 빨간색 말미잘과 불가사리도 보인다. 바닷물 속을 볼 때마다 아득히 먼 옛날 어느 곳에 와 있는 것만 같다.

태풍이 지나고 나면 떨어진 문짝을 고치고 바다로 나선다. 한바탕 바다를 뒤집어 놓았다. 밀려온 감태가 모래 위를 가득 채우고 있다. 다시마처럼 생겼지만 크고 두툼하고 억세다. 동네 아저씨들이 감태 한 짐 짊어지고 모래 언덕 위로 나른다. 볏가리 쌓듯이 쌓는다. 밭에 쓸 거름이다. 고구마를 심어도 좋고 당근을 심어도 잘 자랄 것이다.

하얀 억새꽃 필 무렵이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일출봉에 오른다. 또 하나의 성산포가 그곳에 있다. 넓게 펼쳐진 분화구에는 잘 자란 촐이 뒤덮고 있다. 꼴을 촐이라고 불렀다. 동네 사람들이 자기 밭에서 촐을 베어 볏단처럼 묶고 있다. 옆으로 빠지지 않도록 여덟 단 정도를 엇갈리게 잘 포개어 아이들 등에 지워준다. 지게 같은 것 없이 무명 띠 하나를 8자 모양으로 엮은 것이었다. 이 무명 띠를 ‘베’라고 불렀다. 보자기가 만능 가방 역할을 하듯이 베는 만능 지게 역할을 했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아이들은 등짐을 지자마자 꼭대기 쪽으로 내달린다.

기우뚱 균형을 잃어 한 단이 옆으로 빠지기 시작하면 와르르 모두 빠져버린다. “애기 났져.” 하며 다른 아이들이 놀리면서 깔깔 웃는다. 여러 번 오가느라 지치고 목이 마르면 칡 한 뿌리 캐어 함께 먹어도 좋다. 짙은 흑갈색 껍질 속의 하얀 속살을 꺼내 씹는다. 달콤 쌉싸름한 맛이 힘을 돋운다. 꼭대기에 앉아 군데군데 베어지는 들판을 바라본다. 오목하고 너른 분화구가 이발을 하는 듯하다. 시원한 바람도 좋다.

이모부가 지붕을 이을 새끼줄을 꼰다. 초가집 지붕에서 진회색으로 삭은 촐을 내린다. 누렇게 잘 마른 촐을 새로 지붕에 올리고 새끼줄로 단단히 동여맨다. 마치 지붕 위에 바둑판을 새겨놓은 듯 새끼줄이 촘촘하고 가지런하다. 잘 드는 낫으로 묶은 새끼줄 끝을 싹둑싹둑 가지런히 자른다. 초가집 지붕도 갓 이발한 것처럼 산뜻하다. 마른풀 지붕의 색깔이 노랗게 싱그럽다. 이제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다. 

남은 촐을 태워 가마솥에 밥을 짓는다. 잔불에는 고등어 한 마리를 올려놓는다. 기름 끓는 소리를 내며 노랗게 익어간다.

(사진=김수오)
(사진=김수오)

찬바람이 불어오면, 물때를 잘 맞춰 새벽에 길을 나선다. 바람이 없으면 더욱 좋다. 장화를 신고 횃불과 들통을 챙긴다. 물이 빠지면서 까만 바위가 군데군데 드러난다. 그 사이에 물에 잠겨있는 작은 돌들을 들추면서 해삼을 잡는다. 배 색깔이 빨갛다. 살이 토실하고 단단하다. 횃불 타는 소리, 물살을 가르는 장화 소리, 이따금 들리는 모래 쓸리는 소리뿐. 새벽 바다는 고요하다.

한겨울에는 단단히 차려입고 바다로 나선다. 큰 바위 위에 동네 할머니들이 쪼그려 앉아 부지런히 몸을 놀리며 톳을 캐고 있다. 바위 위에 톳이 자글자글 붙어 있다. 장딴지가 뻐근하고 허리도 아파온다. 바다 바람은 살을 파고든다. 할머니의 질펀한 농담에 함께한 동네사람들이 한바탕 웃어본다. 바람은 점점 거세진다.

바람 감싸 안는 올레 돌담길 안쪽 볕받이에 앉아 아이들 노는 모습을 바라본다. 어느새 노는 소리 아득해지며 꾸벅꾸벅 잠이 든다. 코를 간질이는 바람에 살짝 미소를 짓는다. 풋풋하고 알싸한 노란 동지꽃 맛이 바람에 묻어 있다. 성산포의 봄은 그렇게 또 다가오고 있다.

 

글_임영근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쯤에 부모님 고향인 성산포로 옮겨가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시로 이사가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육지’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학생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고, 졸업한 뒤에는 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고양시 인문학 모임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시사 월간지, <시대> ‘서양철학산책’, ‘이 책 저 책 읽으며’ 코너에 에세이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 산문집 '일출봉에서 부는 바람'을 출간했다.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의사이자 사진작가인 김수오 선생 작품과 함께 격주 목요일 제주투데이에서 게재한다. 어렸을 때 성산포와 제주시에서 자란 일이 글쓰기에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제주다움을 담기 위해 산야를 누비는 김수오 한의사

사진_김수오

제주 노형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수오 씨는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한의학에 매료된 늦깍이 한의사다. 연어처럼 고향으로 회귀해 점차 사라져가는 제주의 풍광을 사진에 담고 있다. 낮에는 환자들을 진맥(診脈)하고 출퇴근 전후 이슬을 적시며 산야를 누빈다. 그대로가 아름다운 제주다움을 진맥(眞脈)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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