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나와 해가 막 넘어가기 시작할 즈음에 놀기 시작할 때면, 무언가 짜릿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설레는 마음이 더했다. 물론 낮에 노는 것도 좋았지만, 어둑어둑 해질 때면 “밥 먹으라.” 하는 소리에 친구들이 하나둘 빠져 나가면서 흥 또한 빠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 나오면 한동안 방해받지 않고 맘껏 놀 수 있었다. 게다가 밤에만 할 수 있는 놀이도 있었다. 깜깜해지면 자치기나 구슬치기는 할 수 없지만, 깜깜해져야 더 재미있는 놀이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놀이는 아니었다. 깜깜한 밤중에 서로 숨어서 여기저기 살피며 기회를 엿보다가 상대를 먼저 찾아내어 “카멘!” 하고 외치는 놀이였다. “카멘” 소리와 함께 빵 하고 총 쏘는 시늉을 하며 손가락을 가위 모양으로 내뻗는다. 서로 먼저 발견했다고 우기는 일도 가끔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내가 죽었다.” 하며 순순히 인정하고 다음 판을 기약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필이면 왜 카멘인지, 카멘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길은 없지만, 장독대와 담벼락을 기어 다니며 죽었다 살아나고 죽었다 살아나는 놀이는 밤이 깊어지도록 이어졌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슴 설레게 한 것은 가끔씩 들어오는 가설극장이었다. 장이 들어서는 넓은 공터에 사방으로 누런 천으로 된 천막이 쳐져 있었다. 한참을 줄 서서 기다린 끝에 안으로 들어갔다. 울퉁불퉁 돌들이 솟아 있는 맨 땅바닥이었다. 물론 천정 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다그닥다그닥 말을 타고 가는 장면만 보아도 좋았다. 영화 보러 오는 길에 “오늘도 중국영화냐?” 하면서 빈정대던 동네 아저씨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를 중국영화라며 깔보다니! 그때는 무협영화를 전부 중국영화라고 불렀다. 중국이란 나라는 이미 없어지고 중공으로 부르던 때, 중국영화라는 말이 남아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홍콩이나 대만에서 만들어진 영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떤 배우가 나오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신나는 칼싸움 영화면 좋았다. 아니, 그냥 아무 영화라도 좋았을 것이다.

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며 밤이 깊어질 즈음 영화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주인공과 악당두목이 벌이는 최후의 결전, 아슬아슬 위기를 넘기며 주인공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악당두목은 분명히 진 것 같은데 다시 일어서고, 분명히 죽은 것 같은데 다시 벌떡 일어서서, 진작 끝날 것 같은 결투는 끝없이 이어졌다. 함께 간 할머니가 “저놈 저, 질기기도 질긴 놈이여!” 하며 탄식을 뱉어낸 뒤에야 영화는 끝났다.

사진=김수오
사진=김수오

제주도에는 넋 들이는 풍습이 있다. 아주 어렸을 적 방 안에서 뛰어 놀다가 꽈당 하며 뒤로 크게 넘어진 적이 있었다. 옆에 계시던 할머니가 다급하게 “물 떠오라!” 하고 크게 소리를 치셨다. 손에 물그릇을 받아들고 물을 한 입 가득 물었다가 내 얼굴로 확 내뿜으며 “오, 넋 들라! 오, 넋 들라!” 하고 외쳤다. 머리가 흠뻑 젖을 정도로 연방 물을 끼얹고 내뿜으며 ‘오 넋 들라’ 주문을 외치는 사이, 할머니의 행동에 너무 놀라 그랬는지, 시원한 물을 맞아 그랬는지 신기하게도 아픈 것은 금세 잊어버렸다. 크게 놀라거나 겁을 먹을 만한 일을 겪은 아이에게 넋 들이는 풍습은 집에서 늘 벌어지기도 했지만, 아예 전문적으로 ‘넋 들이는 집’도 있었다. 한참을 잊고 지내던 나도 아이를 키울 때 여러 번 “오, 넋 들라!”를 써 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도 느닷없는 소리에 순간적인 충격을 잊었는지 금세 평소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날도 천막 극장에서 영화를 본 날이었을 것이다. 큰 길에서 장터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아마도 영화를 본 뒤에 아쉬운 마음이 남아서 장터 입구에서 얼쩡거리던 밤이었을 것이다. 뭔가 묵직한 것이 툭하며 치고 들어왔다. 나는 길바닥에 쓰러졌다. 배를 하늘로 향해 누워 있는 자세였다. 뒷바퀴가 서서히 배를 타고 올라오려고 했다. “여기 사람 이수다!” 하며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소리를 질러 보지도 못한 것도 같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멈춘 듯했다. 슬로비디오처럼 바퀴가 내 배를 타고 넘는 동안,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모습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죽음 직전에 누구나 겪는다는 인생의 파노라마였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혀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배를 타고 넘은 바퀴가 잠시 뒤 멈추었다. 순간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잽싸게 차 밖으로 튕기듯 일어나 나왔다. 후진으로 내 배를 타고 넘은 택시의 기사가 문을 열고 내 쪽으로 왔다. 20대 중반 정도의 택시 기사는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이 새끼, 너 때문에 큰일 날 뻔했잖아!” 하고 소리치며 내 뺨을 때렸다.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가로등도 없이 워낙 깜깜한 터라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 남동생이 울면서 다가왔다.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본 모양이었다. 아마 동생이 울고불고 소리쳐서 택시가 멈추었을지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기적적으로 몸 상한 데 없이 살아났다는 생각뿐이었다. 얻어맞은 뺨이 아픈지도 몰랐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동생에게 다짐을 받아두었다. 행여 가족들이 알면 걱정도 할 것이고, 더구나 크게 혼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동생이 그 이야기를 몇 사람에게 하는 걸 들었지만, 듣는 사람들은 별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동생이 그 사건을 입에 올리는 일에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그 일을 겪은 뒤, 이상야릇한 쾌감 같은 게 들기도 했다. 내가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은 아닐까? 내 몸이 특수한 몸이라 그 정도쯤은 너끈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고, 그 “질기기도 질긴 놈”이 떠오르기도 했다. 천천히 후진하는 차에 깔리는 것은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던 것일까?

사진=김수오
사진=김수오

넋 들이는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대학생 때 어머니 손에 끌리다시피 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대문으로 들어설 때부터 향 피우는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작은 방으로 들어서니 화려한 색깔의 탱화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천왕상에 나올 듯한 모습의 기괴한 인물들, 그 사이사이로 이런저런 꽃들이 잔뜩 그려진 탱화였다.

넋 들이는 아주머니는 특별할 것 없는 동네 아주머니처럼 보였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마치 자주 만나는 이웃집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누었다.

“야이가 이치룩 비쩍 말랑 걱정이우다.” 하며 어머니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어릴 때부터 살이 안 오르는 나를 보며 안쓰러워 자주 하던 말이다.

“놀랜 생이우다. 어릴 때 얼 먹은 일 이수꽈?” 하며 아주머니가 묻는다. 이 대목에서 내가 그 사건을 얘기했어야 했다. 그 일만큼 놀라고 얼빠지게 한 일은 내게 없었으니까. 그랬다면 “아이고, 놀랬구나. 얼 먹어 부렀구나.” 하며 한 바탕 푸닥거리든 넋 들이는 일이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감옥에서 금방 나와 끌려오다시피 했으니 이런 일에 마음을 털어놓을 내가 아니었다.

별 대수롭지 않은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더니, 어머니는 할 수 없었는지 감옥 갔다 온 얘기를 꺼내고 그걸로 간단이 넋 들이는 일을 해주었다. 그래봤자 나에게 그런 식의 넋 들이는 일이 별 효험이 없으리란 것은 그 아주머니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때 그 사건을 털어놓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더라면, 아들의 큰 짐 하나를 덜어주었다는 마음에 어머니의 속은 한결 편안해지셨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미련한 내가 후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긴 그 일이 알게 모르게 내가 지금껏 살아오는 데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내 마음의 굿판은 이미 여러 번 벌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앞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친다 해도 그 사건을 떠올리며 이렇게 스스로를 달래게 될 것이다.

“오, 넋 들라! 오, 넋 들라!”

글_임영근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쯤에 부모님 고향인 성산포로 옮겨가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시로 이사가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육지’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학생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고, 졸업한 뒤에는 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고양시 인문학 모임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시사 월간지, <시대> ‘서양철학산책’, ‘이 책 저 책 읽으며’ 코너에 에세이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 산문집 '일출봉에서 부는 바람'을 출간했다.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의사이자 사진작가인 김수오 선생 작품과 함께 격주 목요일 제주투데이에서 게재한다. 어렸을 때 성산포와 제주시에서 자란 일이 글쓰기에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제주다움을 담기 위해 산야를 누비는 김수오 한의사

사진_김수오

제주 노형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수오 씨는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한의학에 매료된 늦깍이 한의사다. 연어처럼 고향으로 회귀해 점차 사라져가는 제주의 풍광을 사진에 담고 있다. 낮에는 환자들을 진맥(診脈)하고 출퇴근 전후 이슬을 적시며 산야를 누빈다. 그대로가 아름다운 제주다움을 진맥(眞脈)하기 위해.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