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자마자 가장 먼저 계획한 건 차박(캠핑)이었다. 겨울과 여름엔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지만 선선한 바람이 부는 이 맘때는 얇은 이불 하나에 미니 테이블, 랜턴만 있으면 가능하기 때문. 거기에 음식과 술 그리고 영화 한 편과 한 권의 책을 더하면 금상첨화다.

집 근처 한적한 바닷가 포구 주변에 차를 세우고 실내에서만 지내는 일명 '스텔스 차박’을 할 예정이다. 밖에서 보면 좁디 좁은 공간에서 뭔 궁상을 떠나 싶기도 하겠지만 다락방처럼 자그마한 공간이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이 좋다. 그래서 나는 이 캠핑을 “다락방 캠(핑)"이라 부른다.

어느덧 어둠이 찾아오고 주변은 적막하다. 이제 비로소 낭만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포장해온 음식과 술을 마시고 그 이후엔 음악 들으며 책을 보거나 라이브 영상을 시청한다. 영화는 주로 고전명작들을 보는데 장면전환이 거의 없는 롱테이크에 되도록 대사가 많은 작품들을 고른다. 오늘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장 뤽 고다르를 기리며 문학과 음악, 회화가 곳곳에 회자되는 <미치광이 피에로>를 골랐다.

"나는 불이었고 빛이었고 기적이었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공기를 가르며 지나갔다"(<미치광이 피에로> 중에서)

여전히 대단했다. 이미 두번이나 봤던 영화지만 전개를 예측할 수 없었고 아름다운 미장센, 파격적 스토리와 더불어 배우들의 나레이션과 대사는 철학적이고 현란했다. 영화 속 두 연인이 바닷가 모래사장에 누워 달을 보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자 잠시 창문을 열었다. 아쉽게도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사라진 포구에는 파도소리가 가득하다.

순간 영화속 대사가 재빠르게 날아와 박혔다.

"나의 사랑

내가 나이고 당신이 당신이며

우주가 우리 둘을 품고 있는 한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은 나를 거부하네

우리가 달아나려 하는 한

그것은 우리의 운명"

돼지 막창안에 찹쌀밥과 선지,채소를 뜸뿍 넣은 서문 시장의 피순대와 내장모둠이 메인안주다. 힙플라스크에 담아 온 화이트 와인과 궁합이 좋다. 술은 조금씩만 마신다. 취하는 순간 소중한 낭만의 시간은 끝이 나버릴테니까.

영화가 끝나자 잠시 숨을 돌리려 누웠다. 누운 채로 황정은의 단편 '대니 드비토'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선곡해 온 곡들은 주로 8-90년대 국내언더그라운드 음악들이었다. 김현식, 들국화, 시인과 촌장, 조동진 등 지금은 전설이 된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지난 청춘의 시간들을 낚아 올린다.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야기에 집중할 때는 음악이 사라지고 음악에 꽂히는 순간엔 활자가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때에 따라 무게 중심이 바뀌는 이 불안한 독서를 즐겼다.

그런가 하면 소설의 문장이 노래의 가사와 극적으로 만나는 순간도 있다. 인상적인 장면이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노래가 바뀔때마다 책속의 문장에서 어떤 새로운 감정들이 되살아 나는 것이다. <눈부신 세상>이 흐를 때 읽고 읽던 구절은 젊은 시절에 원령이 된 주인공 유라가 세월이 흘러 죽음을 목전에 둔 옛 연인 유도씨를 보며 말하는 장면이었다.

"한 쌍의 원령으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렸지만, 이처럼 묽고 무심한 상태가 되어가는 입장에서 언제까지 유도씨를 기다릴 수 있을지..."

이때 경건하고 낮은 목소리의 조동진이 노래한다.

"그 곳이 나의 천국

눈 먼 행복과 벗겨진 꿈

눈물 없는 슬픔과

사랑없는 열기만 가슴에 있네"

<대니 드비토>를 덮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1시 15분. 습도는 67% 온도는 25도.

블루투스 스피커의 볼륨을 조금 올렸고 남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의 작은 다락방은 음악과 함께 흥청거리기 시작했다.

엄인호의 기타와 색소폰이 유니즌으로 펼쳐내는 <첫사랑>의 중독적인 인트로가 터져 나오자 이윽고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스무 다섯 살 무렵 그러니까 1998년, 시민회관에서 관람했던 신촌 블루스 공연이 떠올랐다. 현란한 조명 아래 블루스 선율들이 넘실대던 무대, 어두운 객석을 가득 채웠던 관객들의 열기. 끊임없이 이어지던 노래들.

이렇게 음악이 불러낸 옛 기억들과 함께 하다보면 어느새 나른해진 나는 잠속으로 깊이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양진우
양진우

음악행위를 통해 삶의 이면을 탐구해나가는 모험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양진우 씨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The Moon Lab 음악원 대표이며 인디레이블 Label Noom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음악칼럼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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