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움트는책방'. (사진=요행)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움트는책방'. (사진=요행)

 ‘그래 좀 헤매면 어때. 잘 도착했잖아?’

길을 헤맸다. 나는 이미 건입동에 도착했는데 다시금 주소를 확인하니 내가 가야 할 곳은 제주시 노형동이었다. 아뿔싸. 어디서부터 잘못된 정보를 진실로 여겼는지 나는 <움트는 책방>이 원도심에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책방은 집과 생각보다 꽤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굳이 먼 길을 돌아온 것이었다. 약속시간에 늦지는 않을까 조금 초조해졌다. 건입동에서 노형동으로 가는 길이 왜 이리 멀담. 그래도 처음 집을 나설 때 여유롭게 출발한 덕에 약속 시간은 맞출 수 있었다. 약속을 맞추니 안도감이 들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움트는책방>은 제주시 월랑초등학교에서 한라산 방면으로 두 번째 블록을 지나기 전에 있다. ‘책’이라 쓰인 반가운 입간판 뒤로 계단이 있는데, 지하로 내려가면 이 책방이 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이 건물의 연식을 얼추 추정케 한다. 평소 계단과 친하지 않은 나와 같은 이에겐 다소 아찔한 계단을 내려가면 책방의 입구다. 계단 몇 개 내려왔다고 흔들린 호흡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움트는책방'으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 (사진=요행)
'움트는책방'으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 (사진=요행)

신발을 벗어야 했다. 슬리퍼를 신고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새로운 곳에 가면 적잖은 부담감을 느끼는 나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감이 들어서 전에 와 봤나 싶을 정도였다. 이 풍경! 봤던 기억이 있다. 1990년대 외국영화를 보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거실이 이런 모습이었지! 

이런 풍경에 나는 잠시 그 시절의 나를 돌아보게 됐다. 청소년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또 자주 나는 나의 인생길 위에서 방황을 했던가. 마음이 춥고 괴로웠던 시절들은 견디기 힘들 만큼의 깊은 좌절감을 안겼고 마음의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헤맴과 방황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왠지 먼 길을 돌아가는 것 같고,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결국 원하는 목적지에 당도했다. 불안의 시간은 ‘성장과 행복’의 다른 말인 것이다. 

움트는책방 내부. 책방지기들이 손수 꾸몄다. (사진=움트는책방)
움트는책방 내부. 책방지기들이 손수 꾸몄다. (사진=움트는책방)

이 책방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훗날에는 어떤 깨달음을 배우게 될 청년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책방지기도 무려 6명으로 많은 편이다. 도내 책방지기들의 평균 연령도 이들 덕에 낮아질테다. 이들의 나이대는 20대. 가장 나이 많은 책방지기가 26살이다. 이 젊은 친구들이 어떻게 만났을까? 친구일까? 지인일까? 어떤 관계일까? 정답은 ‘가족’! 여섯명은 서로 사촌지간이다. 

이들은 책과 영화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각자 독서모임, 영화모임 등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임을 할 때마다 공간이 늘 고민이었다. 매번 카페를 이용하자니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지 못한 학생들에게 꽤 부담되는 일이었다. 

그즈음 이 공간을 쓰던 이들이 이사를 준비 중이었다. 전 이용자는 ‘인문숲이다’. 인문·예술 활동을 통해 청소년과 도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으로 강은미 시인이 대표다. 굳이 이 단체를 소개하는 이유는 움트는책방이 이 공간을 빌리고 ‘헌책방’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칠판 한켠에 '움트는책방' 책방지기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사진=움트는책방)
칠판 한켠에 '움트는책방' 책방지기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사진=움트는책방)
책방으로 바뀌기 전의 공간 (사진=움트는 책방)
책방으로 바뀌기 전의 공간 (사진=움트는 책방)

강은미 시인은 책방지기 6명의 부모 중 한 사람이다. ‘인문숲이다’는 보유한 책이 많았고, 시인 역시 가지고 있는 책이 많았다. 귀한 책들이지만 이사를 하려니 고민이 됐다. 다 가져갈 수는 없고 버릴 수도 없던 찰나에 아이들이 공간 운영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자연스레 ‘책방 운영’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책방지기는 이왕 책이 많으니 공간 이용을 중점으로 둔 헌책방을 하기로 방향을 잡게 됐다. 책방지기들을 응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20대 청년들이 헌책방을 운영할 계획을 들은 건물주님이 임대료를 할인해주기도 했다. 책과 CD, LP 등을 기증하고 하다못해 나무로 된 감귤상자를 제공한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주변 어른들의 후원으로 책장이며, 매대며 웬만한 가구와 책이 구비됐다.

인테리어는 책방지기들의 아이디어로 꾸몄다. 바닥과 벽, 그리고 색상의 통일성이 없던 책장에 색을 입혔다. 빠듯했지만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자잘한 소음은 있었을지언정 여섯이 같은 방향으로 동시에 한 걸음을 내딛는 꽤 값진 경험이었다. 

손으로 직접 적은 책방의 간이 도면안. (사진=움트는 책방)
손으로 직접 적은 책방의 간이 도면안. (사진=움트는 책방)
책방지기들이 서가 페인트 작업을 직접 하고 있다. (사진=움트는책방)
책방지기들이 서가 페인트 작업을 직접 하고 있다. (사진=움트는책방)

그렇게 2022년 3월 2일 <움트는책방>은 문을 열었다. 20대 청년들인 책방지기들의 삶과 꿈, 생활이 움트고 이곳을 찾는 분들의 행복과 생각이 움트는 곳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책방 이름과 그 의미가 참 사랑스럽다. 

내가 방문한 날은 10월 중순이었다. 이날은 양유리 책방지기가 있었다. 책방지기들은 서로 돌아가며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유학을 가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 책방지기들이 있어서 지금은 두 명의 책방지기가 돌아가며 책방을 지키고 있다. 

책방과 잘 어울리는 책방지기는 야무지게 책방 소개를 했다. 책방 자랑을 해달라고 했더니 대뜸 ‘만만한 책방’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참 똑부러졌다.

“책방도 이제는 하나의 문화가 된 것 같아요. 제주에선 관광코스로 자리매김하고 있잖아요. 책방투어를 나서고 그곳에서 인생사진을 만들기도 하고, 여행기념품을 구매하고요. 그런데 움트는 책방은 헌책방이라 신간이 들어오지도 않고, 책들이 깨끗하지도 않거든요.

제주의 다른 책방들처럼 멋진 인테리어와 분위기는 아니지만 대신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이라는 자부심은 있어요. 청소년들이든 우리 또래든 어른이든 누구나 만만하게 찾고 편하게 책을 읽고 책과 노는 곳이에요.”

'움트는책방' 책방지기들이 회의하고 있다. (사진=움트는책방)
'움트는책방' 책방지기들이 회의하고 있다. (사진=움트는책방)

책방지기들이 이곳의 문을 열 때 정해둔 것은 세 가지다. 주변 어른이나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책방지기 스스로 운영할 것, 헌책방으로 운영할 것, 공간 대여 등 장소를 활용할 것. 

이 세 가지 목표를 실현하는 것만으로도 이들에겐 매일이 도전이다. 미래가 예상이 되지 않아 불안한 점도 있지만 그 과정들이 훗날 경험치가 되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40년에 걸쳐 깨닫는 중인 것을 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불안의 시간은 ‘성장과 행복’의 다른 말이라는 점 말이다.

헌책방이다보니 이곳은 여느 책방과 다르게 하루를 시작한다. 다른 책방은 새 책들을 진열하고 정리하느라 반나절을 보낸다는데 이곳은 책을 닦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묵은때가 묻은 책, 먼지가 앉은 책을 수건이나 휴지에 라이터 기름을 묻혀 닦는다. 책을 닦는다는 게 생소했다. 양유리 책방지기는 시범을 보여달라는 내 부탁에 별일 아니라며 부끄럽다고 했다. 행위 자체는 진짜 별 것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참으로 투명하게 비춰졌다. 책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 말이다.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움트는책방'의 양유리 책방지기. (사진=요행)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움트는책방'의 양유리 책방지기. (사진=요행)
양유리 책방지기가 라이터기름으로 책을 닦고 있다. (사진=요행)
양유리 책방지기가 라이터기름으로 책을 닦고 있다. (사진=요행)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인 소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무언가를 사고 버리는 일이 밥을 먹는 일처럼 쉽다. 고가 브랜드 못지않은 성능을 자랑하는 이른바 가성비가 좋은 제품들이 주변 마트와 가게에 있다. 무엇보다 세계와 연결해 주는 인터넷에선 다양하고 값싼 물건을 언제든 구입할 수 있다. 늘 있으니 조금만 헤졌다 싶으면 버리고 새로 구입하는 게 일상이다. 많이 생산되는 만큼, 많이 버려지는 시대. 그것은 생활쓰레기, 해양쓰레기 문제가 돼 우리 일상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바로 그런 이 시기에 오래된 것에 가치를 두는 젊은이를 만나는 것이 너무나 특별했고 반가웠다. 오래된 책을 닦아 새 온기를 불어넣는 그 모습은 ‘쓰임과 활용’에 대해 고찰하게 한다. 무생물이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탄 것들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시간이 더 오래 지나면 희소성까지 얻는다. 무엇을 사고 무엇을 버릴지, 무엇을 지키고 없앨지 그 기준을 낡음과 젊음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요행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