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그 해엔 기억할 만한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

군대 영장이 날아들었고  다니던 대학은 휴학했다. 활동하던 밴드는 잠정 해체를 했다. 새 일렉 기타를 갖게 됐고 멋드러진 태광 오디오가 생겼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자 하루종일 기타를 쳤다. 그러다 지루해 지면 오디오로  음악을 틀었다. 

평범하고 수수한 날들이 계속 됐다.

주방을 개조한 나의 방은 낮에는 죽은 듯 늘어졌다 밤이 오면 갑자기 활기를 띄었다. 옅은 조명과 빨간색 촛불, 진득한 블루스 음악이 흐르는 뮤직바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러면 기타를 놓고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책을 읽었다. 이 세 가지 행위가 어우러지면 마법처럼 책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일명 "골방에서 떠나는 환상 여행"인 것이다.  여행은 주로 헤르만 헤세와 J.D 샐린저, 두 명의 무라카미(류와 하루키)와 기형도,장정일 등과 함께 했다. 멋있는 문장이 나오면ᅠ몇 번을 반복해 읽었고 노트에ᅠ꼼꼼히 적어 두었다.

"환상이란 삶의 도피이며 정면대결에의 회피라는 생각은 좁은 편견의 오류일 뿐이다.

삶과의 정면대결에서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우리들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들은 모두 어둡고 습습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사람들에게 각자 다른 모습으로 추정되는, 환상 또는 허상에서 비롯되어 존재할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 양식이 비롯되는 곳은 환상이다."

- 기형도 [ 짧은 여행의 기록 ]

돌이켜 보면 스무살 시절은 무라카미 류의 책 제목처럼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였다.  알 수 없는 불안이 방안 구석에 거미줄처럼 쳐져 있었다. 그런 녹슨 날들이 계속 되던 어느 날,  잭 케루악의 [ 노상 On the Road ]을 만났다.

그 책을 처음 보던 날 흐르던 노래를 기억한다. BB King의 베스트 모음집  <I’ve Got A Right to Love My Baby>

관악기 섹션에 맞춰 비비 킹 특유의 기름진 기타소리로 시작된 그날의 '환상여행'은 앨범이 세 번 반복되고서야 끝났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책을 덮고 음악을 끄곤 침대에 누웠다. 멍하니 천정만 바라봤다.

천장 위엔 여과되지 않은 욕망과 자유에 대한 동경이 뒤섞여 흥청거리고 있었다.

소설 속 이야기는  단순하다.  실패한 작가 샬은 광기에 찬 자유로운 영혼의 딘을 만나면서 그에게 깊이 빠져든다. 교조적 삶과 권태로움에 지쳐 있던 그들은  일상을 벗어나 미국을 횡단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여행은 자유분방하고 술, 마약, 섹스 등이 난무한다. 퇴폐적이지만 자극적이지는 않다. 이 소설에서 재즈는 이야기를 관통하는 화두가 된다.

소설 배경인 1940년대 당시의 힙스터들은 재즈 음악에 깊이 빠져 있었다.

주인공들 역시  조지 시어링, 찰리 파커 등을 추종하며 재즈를 들었고 즉흥적이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 

피아니스트 조지 시어링의 클럽 공연 장면은 정말이지 지금 읽어도 너무나 생생하다.

“곡의 템포가 빨라지자 시어링의 몸짓도 점점 빨라졌다. 왼발은 박자에 맞추어 격해졌고 목은 피아노 건반에 닿을듯 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졌고 얼굴엔 땀이 흥건했다. 베이스 주자는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두터운 현을 튕겨댔다. 끝도 없이 빨라지자 피아노는 소나기가 내리 듯 엄청난 음들을 토해냈다.”

이렇듯 재즈는 소설 곳곳에 녹아들어 이야기를 끌어낸다. 나는 1940년대의 시대상과 대륙을 횡단하는 청춘들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재즈라는 단어는 모험의 상징이 되었다.

작은 골방에서 경험하는 그들의 여행은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때 결심했다. 평생 음악을 하겠다고 말이다. 나에겐 음악이야말로 가장 흥미진진한 모험의 세계였으니까!

소설의 말미에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무지개 끝에 보물이 없다는 걸 알아. 고난과 역경이 있을 뿐. 그걸 알고 나니 비로소 자유로워졌어.”

- 잭 캐루악 <길위에서 On the Road>

양진우
양진우

음악행위를 통해 삶의 이면을 탐구해나가는 모험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양진우 씨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The Moon Lab 음악원 대표이며 인디레이블 Label Noom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음악칼럼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편집자주>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