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한다. 날씨가 쌀쌀한 요즘은 주로 자전거를 탄다. 올 봄에 중고로 구입한 주황색 자전거는 사슴처럼 날렵해 느리게 페달을 밟아도 우아한 걸음으로 빠르게 달렸다. 바다를 향해 십 여분 달리면 한적한 주택가가 나온다. 여러 갈래로 뻗은 좁은 골목길엔 시간을 간직하고 세월을 이겨낸 건물들과 나무,돌담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다.

이제는 희미하게 형체만 남은 목욕탕 굴뚝의 벗겨진 글씨와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이발소의 간판에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찌그러진 양은주전자가 걸려 있는 국밥집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잠시 숨을 고른다.

어김없이 12월이 왔고 또 한 해가 지나간다. 삶의 균형이 흔들리고 난 후에야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그래도 음악과 함께 힘든 시간들을 잘 다독인 듯하다. 올 한 해 즐겨 들었던 음반들을 소개하며 2021년을 마무리해본다.

Laura Marling [Song For Our Daughter] 2020

영국의 빼어난 포크뮤지션 로라말링의 7집 음반이다.

18살에 발표한 데뷔작 [Alas, I Cannot Swim]이후로 그녀는 쉼없이 라이브 활동을 펼쳤고 곡을 쓰고 꾸준히 음반을 냈다. 이번 앨범엔 사회 속에서 '여성이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그녀의 고민과 사유를 담았다고 한다. 전작보다 좀 더 사려 깊고 다정하면서도 특유의 날카로움은 여전하다.

목소리와 어쿠스틱 기타를 중심으로 곡마다 다채로운 형식과  개성 있는 편곡이 돋보인다. 로라 특유의 지적인 멜로디와 여러 겹으로 풍성하게 쌓아 올린 보컬 하모니, 미니멀한 구성이지만 따스한 악기의 톤이 잘 녹아들어 있다.

도마 [휘파람] 2020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다 엔딩장면에서 흐르던 이 노래에 한 순간에  빠져버렸다.

일렉기타의 몽롱한 아르페지오와 라이드 심벌의 규칙적인 리듬으로 곡은 시작된다. “조용히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하얘진다”는 구절이 나오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어떤 풍경이 그려진다. 모노톤의 명료한 사운드와 건조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읊조리는 보컬의 대비가 슬픔을 머금은 듯 애처롭다.

Julian Lage [Squint] 2021

최근 들어 가장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줄리안 라지. 2019년 [Love Hurts] 이후 또 다시 음반을 발매했다.

87년 생인 그는 다섯 살때부터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 전형적인 천재형 뮤지션이다. 12살에 비브라폰 주자인 게리 버튼에게 픽업돼 그의 New Quartet에서 활동하며 재즈계에 입문했다. 올 6월에 발매된 이 음반은 전형적인 기타트리오 형식인데 싱글 노트와 코드를 적절히 배분하고 여러 가지  톤으로 지루할 틈이 없이 컬러풀한 연주를 들려준다 . 그의 오른손은 드라이브가 살짝 걸린 두터운 사운드를 세밀하게 제어하며 감정을 고양시킨다.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왼손 아티큘레이션의 다이나믹은 정말이지 숨이 막힐 정도다.

Men I Trust [Untourable Album] 2021

드림팝 밴드 맨 아이 트러스트의 2021년 신보. 2014년에 멤버들의 고향인 캐나다 퀘벡에서 결성된 이 팀은 홈레코딩을 통해 로파이(Lo-Fi)한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가미한 미니멀한 악기구성에 매혹적인 여성보컬,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베이스 라인이 특징이다. 안개에 싸인 듯 몽환적인 목소리와 차가운 일렉트릭 사운드, 리버브 잔뜩 걸린 축축한 기타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Charles Lloyd & The Marvels [Tone Poem] 2021

여든 살이 넘은 거장 색소폰 연주자 Charles Lloyd의 프로젝트 밴드 The Marvels의 새로운 음반이 올해 초에 발매되었다. Norah Johns와 Willie Nelson이 참여한 첫 번째 앨범 [I Long To See You] 싱어송라이터 Lucinda Williams가 피처링한 [Vanished Garden]과는 다르게 보컬의 참여가 없이 온전히 악기 연주로만 이루어졌다.

기존 라인업으로 오리지널 곡과 Monk와 Ornette Colman의 스탠다드 곡들, Leonard Cohen, Gabor Szabo의 팝넘버를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독특함으로 새롭게 재탄생 시켰다.

탄탄한 리듬섹션과 페달 스틸기타의 신비로운 프레이징 뒤로 각자 뚜렷이 각인되는 이미지의 선율들을 쏟아 낸다. 나른한 타임필과 여유로운 공간감에 짙은 색채의 멜로디를 중심으로 재즈와 블루스,컨츄리,가스펠등 다양한 파편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계속 해서 창의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노장 재즈뮤지션에게 경의를 표한다.

양진우
양진우

음악행위를 통해 삶의 이면을 탐구해나가는 모험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양진우 씨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The Moon Lab 음악원 대표이며 인디레이블 Label Noom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매달 네 번째 월요일 음악칼럼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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