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읽는 다양한 관점과 틀이 있다. 그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심이 필요하다. 제주투데이는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와 수차례 동행한 4·3시민사회단체 답사 기록을 토대로 4·3의 핵심적인 인물 10명을 함께 읽고자 한다. 다만, 제주4·3이라는 비극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결 과정을 살필 때 제주도민을 역사 인식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한다.<편집자 주>

4·3이 발발하게 된 계기가 됐던 3·1절 발포사건 당시 기마경찰이 시위 현장에 있었던 이유가 단순한 시위 통제 목적이 아닌 당시 미 군정 장관이 이동하기 위한 길을 트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림=강요배作)
4·3이 발발하게 된 계기가 됐던 3·1절 발포사건 당시 기마경찰이 시위 현장에 있었던 이유가 단순한 시위 통제 목적이 아닌 당시 미 군정 장관이 이동하기 위한 길을 트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림=강요배作)

도민은 왜 분개했는가

1947년 3·1절, 친일파 처단과 통일독립 의지를 다지는 집회가 제주에서 열렸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다치고 사망하는 도민이 발생했다. 도민들은 분개했다. 미군정을 규탄하며 9일 뒤 3·10총파업을 단행했다. 공무원도 함께 했다. 열기가 뜨거웠다. 유례없는 민관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었다. 도민의 분노는 단지 3·1절 경찰의 발포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됐지만 친일 인사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한 경찰은 해방 후에도 경찰이 되었다. 통일 조국의 꿈은 구 소련과 미국이 구축해가는 냉전 대결 속에서 어두워져 갔다. 사회적 부조리는 쌓여만 갔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미군정의 비호를 받는 우익보다 부조리 타파와 통일조국, 평등을 얘기하는 좌익 진영이 도민들의 호감을 얻던 시기였다.

총파업 한 달 뒤인 4월 10일 유해진이 제주도지사로 발령됐다. 미군조차 극우파로 평가했던 인물이다. “그는 재임 기간동안 오로지 정치적 반대파를 척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유해진 도지사는 제주도에 내려오면서 경호원 격으로 서청 단원 7명을 데리고 왔다. 이 서청 단원들은 밤에는 지사관사 주변을 경비했다. 그는 도지사로 부임한 뒤 관공리의 숙정작업부터 손을 대었다. 총파업에 가담하거나 주도했던 관리들을 가려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파직시켰다. 이런 관공리 숙정작업은 도청뿐만 아니라 군청, 경찰, 운수, 체신 등 전 행정기관으로 파급됐다.”(4·3진상조사보고서)

그는 우익단체 집회는 요청만 들어오면 하면 허가해줬지만 좌익단체에게는 허용하지 않았다. 추구하는 이념이 도지사와 다르면 집회조차 열 수 없었다. 일제로부터 해방은 됐지만 집회조차 열 수 없었던 좌익단체 구성원들의 낙심을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면 남한에서 어떤 탄압을 받게 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유해진에 대한 미군정의 감사 결과에 따르면 그는 주민에게 배급하는 식량 관리에 실패했다. 감사보고서는 유해진에 대해 무능한 도지사라며, 좌익활동에 대한 독단적 결정으로 좌익활동을 지하화했다고 평가한다.

신촌회의.. 그 자리에 김달삼이 있었다

한반도는 남북 공동 정부가 아닌,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방향이 잡혀갔다. 통일조국이라는 꿈은 물거품이 되고 남로당원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는 수순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소 간 냉전 체제 구축을 공고히 하는 희생양으로 제단에 올려진 한반도. 한반도의 중앙에 쭉 그어 놓은 선이 칼로 그어지기 직전이었다.

1948년 2월 22일 ‘신촌회의’가 열렸다. 남로당 제주도당 간부급 19명이 한 민가에 모였다. 이른바 강경파와 신중파 간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12대 7로 의견이 갈렸다. 강경파의 목소리가 더 셌다. 결론은 무력투쟁이었다. 무력투쟁의 대상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이었다. 군인은 대상이 아니었다. 미군정 역시. 무기에 있어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이 이후 전면적인 강경진압에 나설 것이라는 생각도 못했다. 일찍이 총파업의 열기를 확인 한 바 있다. 그렇게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면서 경찰과 공무원 대동청년단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날렸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배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도민을 향한 호소문도 뿌렸다.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 이후 경찰의 대응과 대동청년단의 우익 활동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미군정의 통치 행위에 대한 적개감과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 대한 반대 의지를 피력했다. 그렇게 4·3항쟁이 시작되고, 이후 제주도는 참극으로 점철된 시간을 맞게 된다. 40여일 전, 신촌회의에서 강경 무력투쟁을 주장했던 인물이 바로 김달삼(본명 이승진)이다. 김달삼은 무장대 총책임자를 맡는다.

김달삼
김달삼

김달삼은 1923년 제주도 대정면 영락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가족과 함께 대구로 거주지를 옮겨 학창생활을 하다가 일본 오사카로 넘어가게 된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익혔다. 도쿄 주오대학 재학 중에 학병으로 징집돼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수료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후 제주로 돌아왔다. 대정중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무장 수준이 열악했는데 어떻게 무력투쟁에 승산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까. 우선, 1년여 전 3·10총파업에서 도민들의 사회 변혁에 대한 열의를 확인했다. 다시 한 번 그때와 같은 지지와 참여를 기대했음직 하다. 본토 군인들의 지원도 기다렸다. 무력투쟁을 벌이긴 했지만 장기전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는 신촌회의 참가자의 증언이 있다. 4월 28일, 제주 주둔 경비대 김익렬 9연대장의 평화협상 제안을 김달삼이 받아들인 것 역시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우익이 일으킨 오라리방화사건으로 인해 평화협상은 물거품이 됐다. 무차별 진압 작전이 예고됐다. 5월 6일 미군정은 평화협상에 나섰던 김익렬 후임으로 박진경을 9연대장 자리에 앉혔다.

1948년 5월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안재홍 민정장관,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딘 소장과 악수하고 있는 인물은 안재홍 민정장관이다.(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
1948년 5월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안재홍 민정장관,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딘 소장과 악수하고 있는 인물은 안재홍 민정장관이다.(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

일주일 뒤 실시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이콧했다. 미군정 사령관들이 분개했다. 군 조직을 무장대 진압 전면에 앞세우는 계기가 된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은 제주 해안선 5km 이외의 지점을 통행하면 ‘폭도’로 간주하고 총살하겠다고 포고했다. 부하에게 살해당한 박진경의 강경진압 기조를 이어갔다. 무자비한 체포와 학살의 공포가 도민들을 으깨듯 짓눌렀다. 본토 군인들의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이 동족을 죽이라는 명령에 따를 수 없다며 4·3 진압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만, 며칠 되지 않아 진압되었다. 무장대는 고립됐다. 전멸의 길을 걷는다.

북으로 간 김달삼

남한에서 단독선거를 치르자 북한에서도 선거 여부를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통일정부 수립이 강조됐다. 남한에서도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공개선거는 불가능했다. ‘선거인단’에 해당하는 대표자들을 뽑고 그들이 북한 모여서 선거를 하는 방식을 택했다. 남측 대표자를 뽑는 ‘지하선거’가 남한에서 치러졌다. 지하선거를 치른 뒤 8월, 김달삼은 제주도를 떠났다. 제주 대표 자격으로 북한 해주로 갔다. 그는 8월 25일 남한의 국회의원 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혔다. 이후 1949년 창설된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을 이끌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무장대 수장의 이와 같은 행보는 사실과 무관하게 ‘김달삼이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용된다. 하지만 진상조사보고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무장봉기는 제주에서 결정되었다. 김일성의 지령을 받았다는 증언이나 물증은 없다.

이듬해인 1950년, 김달삼은 죽는다. 많이 알려졌던 설은 김달삼이 1950년 3월20일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남쪽으로 3㎞ 지점인 반론산에서 국군과 전투 중에 죽었다는 것이다. 승지골에서 김달삼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하고, 그의 소지품을 입수했다. 국군은 그 시신이 김달삼이라고 발표하려고 했다. 미군은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국군은 김달삼의 시신이 확실하다고 발표했다.

“국방부에서는 김달삼이라고 단정하고 있으나 미군측에서는 이를 부인하는 태도이므로 과학으로 다시 조사하여 지문검사를 할 것이라 한다” 1950년 3월26일자 부인신문에 '정말 김달삼인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사진=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국방부에서는 김달삼이라고 단정하고 있으나 미군측에서는 이를 부인하는 태도이므로 과학으로 다시 조사하여 지문검사를 할 것이라 한다” 1950년 3월26일자 부인신문에 '정말 김달삼인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사진=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사)는 국군이 김달삼의 죽음을 잘못 발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박명림 교수는 <한국 1950 전쟁과 평화>에서 러시아 외교문서를 인용, “남한에서 전사한 것으로 발표되었던 빨치산 지도자 김달삼이 남한에서의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하였다”고 썼다. 다시 월북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김달삼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남침하기에 앞서 게릴라부대를 재편성해 강원도 산악지방을 통해 남한에 재침투했다. 인민군이 남침을 개시하면 남한 내 치안 조직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북한은 김달삼이 한국전쟁 발발 3개월 뒤 전사한 것으로 본다.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김달삼의 가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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