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읽는 다양한 관점과 틀이 있다. 그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심이 필요하다. 제주투데이는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와 수차례 동행한 4·3시민사회단체 답사 기록을 토대로 4·3의 핵심적인 인물 10명을 함께 읽고자 한다. 다만, 제주4·3이라는 비극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결 과정을 살필 때 제주도민을 역사 인식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한다.<편집자 주>

없어도 잡아들인 예비검속

한국전쟁 발발 전후, 예비검속이 이뤄졌다. 예비검속은 일제 경찰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범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의심되는 이들을 잡아들여 사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영장없이 체포하고 구금하는 것을 말한다. ‘빨갱이’라는 딱지를 씌우면 누구든 체포, 처형될 수 있었다.

초토화작전이 휩쓸고 지나간 제주섬은 예비검속으로 도민 학살이 이어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6월 25일 당일 오후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하달했다. ‘불순분자’를 구속하고 명령이 있기 전에는 석방을 금지하며, 예비검속자 명부를 제출하라는 지시가 각 제주 경찰국장에게 내려졌다.

예비검속은 계엄군 주도하에 군과 경찰 합동으로 진행됐다. 1950년 6월 말부터 8월초까지 공무원, 교사, 학생, 여성 등 가릴 것 없이 예비검속이 이뤄졌다. 8월 17일 기준 1120명을 검거해 경찰 유치장 등에 가뒀다. 보성초등학교 교장 포함 4명의 교원 전원을 불순분자라면서 검거해 학교 운영이 정지되기도 했다. 술자리에서 경찰과 언쟁을 벌였다는 이유 검속되기도 했다.

경찰당국은 예비검속자들은 A, B, C, D급으로 분류했다.(A급은 애매한 자, D급으로 갈수록 중요한 자) 등급에 따라 총살도 했지만 등급 기준이 확실하지도 않았다. 예비검속자들은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이유없이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예비검속이 비밀리에 진행돼 기록 자체를 남아 있는 경우가 워낙 드물다. 하지만 여러 유족과 당시 군경 출신자들의 증언으로 인해 참상이 드러났다. “제주경찰서 주정공장 등지에 수감 되어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을 제주항으로 끌고 가서 배에 태우고 바다 한가운 데로 가서 수장시켰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장시용 증언) 이외도 제주 모든 지역에서 예비검속을 명목으로 한 집단총살이 자행된다.

제주4.3 당시 김두찬 중령이 작성 성산포경찰서에 하달한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문서. 우측 상단에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고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공)
제주4.3 당시 김두찬 중령이 작성 성산포경찰서에 하달한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문서.(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공)

의인 문형순 서장

제주 전도에서 무차별적인 집단총살이 자행됐지만 성산포의 경우 피해가 적었다. 성산포경찰서 예비검속자 가운데 등급 분류 D급은 4명, C급은 76명이었다. 이들을 넘기라는 군의 지시를 받은 성산포경찰서장 문형순은 6명만 군에 넘겼다. 군의 지시를 거부한 것이다.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 중령 김두찬은 1950년 8월 30일 성산포경찰서에 나머지 예비검속자들에 대해 총살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문형순은 군의 명령이 부당하다면서 거부했다. 이는 문서에 명확히 기록돼 있다. 계엄군의 지시를 불복종한 데 대해 무거운 책임을 질 수도 있었지만, 문형순 서장은 70여명의 주민을 석방했다.

문형순 경찰서장 흉상 제막식(사진=제주도경찰청 제공)
문형순 경찰서장 흉상 제막식(사진=제주도경찰청 제공)

훗날 문형순 서장은 경찰을 퇴임한 뒤, 극장 매표원 등으로 생활하다가 숨을 거뒀다. 가족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4·3 의인으로 기억된다. 제주경찰청에 문 서장을 기리기 위한 흉상도 세워졌다. 묘는 평안도민 공동묘역에 있다. 고향이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문 서장은 일제강점기 만주 일대에서 광복군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했다. 하지만 독립유공 서훈은 보류되고 있다. 입증자료가 미비하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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