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읽는 다양한 관점과 틀이 있다. 그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심이 필요하다. 제주투데이는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와 수차례 동행한 4·3시민사회단체 답사 기록을 토대로 4·3의 핵심적인 인물 10명을 함께 읽고자 한다. 다만, 제주4·3이라는 비극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결 과정을 살필 때 제주도민을 역사 인식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한다.<편집자 주>

가장 왼쪽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인물이 1948년 6월 제주에 파견된 제9연대 정보참모 탁성록이다.(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가장 왼쪽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인물이 1948년 6월 제주에 파견된 제9연대 정보참모 탁성록이다.(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에 김상사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여성을 겁탈하고 사람들을 죽이는 마약중독자다. 김상사는 제주 4·3 당시 실제했던 한 인물을 모티브로 그린 인물이다.

그는 4·3 당시 무차별 진압에 나선 국방경비대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탁성록이다. 탁성록은 군사 교육을 받거나 별다른 경력도 없이 ‘나팔을 부는 재주’만으로 군 장교가 되었다. 작곡하는 재주로 해방 후 해군군악대 창설에 참여했다. 군악대장을 거쳐 국군장교로 특채됐다. 1948년 6월 제주에 주둔하는 9연대 정보참모로 파견됐다. 직급은 대위였다.

그에게 특별한 정보 수집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민간인을 ‘공산당원’으로 내모는 능력, 고문과 살해가 그의 유일한 능력이었던 셈이다. 거기에 더해 그는 아편 중독자였다. 의사에게 아편 주사를 요구하고 거절당하자 체포하기도 했다. 이 정도 수준의 인간이 4·3 진압군의 정보참모 장교였으니, 당시 진압군의 정보력이나 인사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온건파 장교들의 설 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학살자들이 활개를 쳤다. 온건파 김익렬 이후 박진경이나, 송요찬 등이 연대장을 맡은 9연대는 강경 진압을 통한 성과를 올리려 필사적이었다. 탁성록은 무차별 진압을 내세운 9연대장의 입맛에 맞는 인물이었다. 학살과 공포로 사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 아래, 탁성록은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냥개였던 셈이다. 제주도민을 닥치는대로 물어 뜯었다.

9연대 출신 윤태준은 이렇게 증언했다. “연대 정보참모가 탁성록인데 그 사람 말 한 마디에 다 죽었습니다. 그 때 헌병에게 잡혀가면 살고, 탁 대위에게 잡혀가면 민간인이고 군인이고 가릴 것 없이 다 죽었습니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민간인을 빨갱이몰이 하고, 여성을 성폭행하면서 제주도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제주를 떠나면서 동거하던 여성을 사라봉에서 죽이고 갔다는 증언도 있다. 탁성록은 마약을 너무 많이 해 두 팔의 핏줄에 주사 바늘을 꽂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탁성록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와 소위 아편주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마약은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라 약재과장을 불러와 결재를 받고 주사를 놔 주었습니다. 그는 팔에 주사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아편쟁이였어요. 안정숙 간호원이 팔뚝에 주사하려 해도 주사 바늘이 들어가지 않자 겨드랑이 밑에 꽂으라고 하더군요. 그는 재임기간 내내 주사를 맞으러 병원을 찾았습니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하두용 증언)

탁성록은 제주도민에게 4·3 당시 진압군의 얼굴로 표징된다. 탁성록이 제주에서 보여준 잔혹한 행위는 오히려 성과로 평가되었던 거으로 보인다. 그는 4·3 이후 국방부 조사본부 진주특무대장에 임명됐다.  육군 소령까지 진급했다. 탁성록의 악행은 이어진다. 그는 진주보도연맹학살을 주도했다. 이후에 육군 헌병대 조사를 받은 뒤 불명예 전역 처분 당한다. 육군에서 파면된 이후 행적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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