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읽는 다양한 관점과 틀이 있다. 그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심이 필요하다. 제주투데이는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와 수차례 동행한 4·3시민사회단체 답사 기록을 토대로 4·3의 핵심적인 인물 10명을 함께 읽고자 한다. 다만, 제주4·3이라는 비극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결 과정을 살필 때 제주도민을 역사 인식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한다.<편집자 주>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이승만 대통령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2021년 8월 12일.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이승만 대통령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이승만 기념관 건립이 추진된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지만, 권력욕을 놓지 못하고 부정선거로 정권을 이어간 독재자이기도 하다. 친일 세력을 비호하며 친일 잔재 청산을 막은 장본이기도 했다. 그는 친일 세력 비호를 위해 반공 논리를 앞세워 좌익 세력 숙청에 나섰다. 제주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서북청년단의 든든한 후원자 노릇도 했다.

'정치 깡패' 서북청년단, 제주에서 경찰과 경비대원으로 탈바꿈하다

1947년 11월, 이북출신으로 조성된 서청 제주도본부가 결성됐다. 그들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 직후 제주에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승만 사진 등을 판매하는 등 우익 활동 기반 수입원을 창출하다가 1947년 하반기부터 경찰 등 공직을 맡기 시작했다. 미군정도 서청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반민주적’이라고 의심되는 인사들에 대해 정력적으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빨갱이 사냥’에 매달렸다."(미군 정보보고서) 서청은 정치적 반대 세력과 민간인에게 위력을 쓰는 ‘정치 깡패’ 노릇을 해왔다. 주민들을 서청 사무실에 끌고 가서 구타하거나 주민을 고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청은 이승만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승만은 왜 서북청년단을 왜 비호했나

1948년 4·3 무장봉기와 5·10 남한단독선거 선거 보이콧은 미군정과 우익 정치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서청은 해방 후 건준 및 인민위원회 출신 인사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제주도를 우경화하기 전략에 맞춤했다. 그들의 반인륜적 행위들은 ‘반공’ 논리에 가려졌다.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9월 1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하지만 이승만은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친일 인사들을 내버릴 수 없었다.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들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기 때문. 오히려 이승만은 적극 친일파를 비호하며 정권 안정화를 도모했다. 1948년 10월 19일, 동족을 죽일 수 없다면서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며 군인들이 반란을 반란을 일으킨 ‘여순항쟁’은 이승만의 정적 축출을 위한 기회였다. 반공 이념이 강화됐고 11일 20일 국가보안법이 통과됐다. ‘친일파’ 처단보다 ‘반공’이 우선 시 됐다.

서청과 이승만 정부는 이해 관계를 같이 했다. 1948년 11~12월 최소한 1000명이 넘는 서청 단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으로 탈바꿈했다. 도민 진압작전에 있어 서청은 무소불위였다. 그들을 학살을 벌여도 처벌할 기관이 없는 셈이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은밀한 모병활동으로 서청 단원을 모집해 제주도에 파견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북에서 내려와 먹거리가 변변찮은 서청 단원들에게 이승만 정부는 열흘 가량의 교육을 거쳐 제주도로 가서 경찰이나 경비대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리고 그들은 충실히 따랐다.

미군 정보보고서도 관련 내용을 담고 있다. "보고에 의하면 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부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 서북청 년 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 한 전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간의 상호합 의에 따라, 서북청년회는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당 경위 1명, 2백명 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미군 정보보고서 1948년, 11월 6일)

이승만은 1948년 12월 이승만이 서청 총회에 참석해 4·3 수습을 위해 서청 단원을 투입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같은 조치는 바로 실행된다.

서청 단원 출신의 증언..."(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

서청 단원 출신으로 제주도에 와서 경찰이 되었던 박형요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허락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느냐", "앞뒤 가리지 않고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 하나를 앞세워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대원들을 대거 투입하는 등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 서청 단원들의 민간인 학살에 이승만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사진=제주4·3 추가 진상조사보고서)
(사진=제주4·3사건 추가 진상조사보고서)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을 받은 서청은 군과 경찰 내에서 무장대 색출이라는 미명 아래 무차별 민간인 체포와 살인을 저지른다. 1949년 1월 21일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이런 입장을 표했다.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군경에 서청 출신 단원이 포진된 가운데 초토화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이 같은 입장은 민간인 학살의 명분을 더욱 강화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