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읽는 다양한 관점과 틀이 있다. 그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심이 필요하다. 제주투데이는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와 수차례 동행한 4·3시민사회단체 답사 기록을 토대로 4·3의 핵심적인 인물 10명을 함께 읽고자 한다. 다만, 제주4·3이라는 비극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결 과정을 살필 때 제주도민을 역사 인식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한다.<편집자 주>

4.3당시 제주 읍내에서 가장 큰 요정 '옥성정 터'. (사진=고봉수)
4.3당시 제주 읍내에서 가장 큰 요정 '옥성정 터'. (사진=고봉수)

제주목 관아 서쪽 돌담길에서 무근성으로 들어가는 곳 '옥성정' 터가 있다. 70여년 전 제주시 원도심에서 가장 큰 요정이었다. 4·3 당시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며 무차별 학살을 지시한 박진경의 승진 축하파티가 열린 곳이다.

1947년 6월 17일 박진경은 그곳에서 파티를 열고 숙소로 돌아와 잠들었다. 박진경은 다음날 죽은 채 발견되었다. 축하 파티에 참여한 이들이 어찌나 술에 취했는지, 나무 칸막이 뒤에서 잠에 들었으면서도 총성을 듣지 못했다.

박진경을 저격한 것은 손선호 하사였다.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아 박진경을 총으로 쐈다. 하지만 단순히 지시를 따른 것은 아니었다. 손 하사는 박진경의 보여온 행위에 대해 명확하게 판단했다. 박진경 암살은 정당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는 손 하사의 재판 증언에서 나타난다. 그는 끝까지 박진경 암살의 정당성을 외쳤다. 군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손선호는 7월 12일 서울로 압송됐다. 군법회의가 빠르게 열렸다.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다. 8월 9일 열린 군법회의에서 검찰관은 박진경 살해 동기와 배후에 대해 김달삼 사주로 몰아갔다. 하지만 피고인들은 박진경의 무모한 토벌 작전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암살 동기를 밝혔다.

"3천만을 위해서 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켜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실제 행 동에 있어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한 박 대령은 확실히 반민족적이며 동포를 구하고 성스러운 우리 국방경비대를 건설하기 위하여는 박 대령을 희생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손선호 진술)

변호인은 “해방된 이 땅에서 본의 아닌 민족상잔에 쓰러진 동포의 죽음을 본 젊은이들이 어떻게 하면 30만 도민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이런 범행을 감행한 것이다. 이러한 범죄는 오늘날 이 혼란에 빠지고 있는 사회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살려두면 이들은 반드시 민족을 위하여 싸울 것을 믿는다”고 선처를 호소했다.

하지만 손선호는 결국 총살형을 언도받는다. 박진경 암살 가담 군인들에 재판 결과에 많은 탄원이 이어졌지만 지시를 내린 문상길 중위와 직접 저격한 손선호 하사는 감형되지 않는다.

2022년 11월 26일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인근 공터에서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가 봉행됐다. (사진=조수진 기자)
2022년 11월 26일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인근 공터에서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가 봉행됐다. (사진=조수진 기자)

1948년 9월 23일. 손선호 하사는 서울시 수색의 한 산기슭(망월산으로 추정) 형장에 선다. 동족 학살자를 처단한 그는 끝까지 당당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군가를 부른 뒤, “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국방군이 되게 하여 주십소서”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손선호, 그 청년 군인은 숨을 거둔다. 향년 20세.

제주도민에게는 의로운 죽음이다. 제주도민 모두를 희생시켜도 좋다고 했던 박진경을 기리는 비석이 제주도에 남아 있지만, 손선호 하사는 묘도 비석도 없다. 도민 학살을 막을 목적으로 박진경을 처단했지만, 그를 기억해주는 이는 많지 않다.

70년이 훌쩍 지난 2022년 11월 26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인근 공터에서 그의 이름이 불려졌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이하 도민연대)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이하 기념사업위)는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를 봉행했다. 제주도민은 이렇게 청년 군인을 기억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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