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읽는 다양한 관점과 틀이 있다. 그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심이 필요하다. 제주투데이는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와 수차례 동행한 4·3시민사회단체 답사 기록을 토대로 4·3의 핵심적인 인물 10명을 함께 읽고자 한다. 다만, 제주4·3이라는 비극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결 과정을 살필 때 제주도민을 역사 인식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한다.<편집자 주>

26일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인근 망월산이 보이는 공터에서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가 봉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2022년 11월 26일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인근 망월산이 보이는 공터에서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가 봉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1948년 9월 23일, 당시 경기도 수색의 한 산기슭(고양시 망월산으로 추정)에서 기독교인 청년 군인 두 명이 총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사형 집행이었다. 미군정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둘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재판’ 결과는 다를 것이라고 봤다. 총살을 당하기 직전에도 그들은 의연했다. 민족을 위한 군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상관 박진경 11연대장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다. 왜 상관 박진경을 쐈을까.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서. 그게 전부였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가 일어난 뒤, 미군정은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우선 모색하던 김익렬 9연대장 자리에 박진경을 대신 앉혔다. 박진경은 5월 6일 취임했다. 박진경은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다. 취임사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약 한달 동안 수천 명의 민간인을 체포했다.

다음달인 6월 18일 새벽, 박진경은 그의 숙소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됐다. 전날 진급 축하연에 참석해 술을 마신 뒤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던 중 새벽에 총탄에 맞아 죽은 것이다. 같은 숙소를 이용한 군 간부들은 총성을 듣지 못했다. 그들이 술에 얼마나 취해 있었는지 가늠할 만하다. 문상길 중위가 박진경 암살 작전을 지시했고, 손선호 하사가 직접 방아쇠를 당겼다. 투서에 의해 발각됐다. 박진경 암살 가담자는 이들을 포함해 총 9명이었다. 그중 8명이 붙잡혔다. 7월 12일 서울로 압송돼 심문과 재판을 받는다. 재판은 빠르게 진행된다.

박진경을 죽이고 무모한 토벌전으로 인한 제주도민 희생을 막는 길을 택했다.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를 포함해 박진경 암살에 가담한 이들은 말했다. 손 하사는 "(박진경이) ‘3천만을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켜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실제 행동에 있어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한 박 대령은 확실히 반민족적이며 동포를 구하고 성스러운 우리 국방경비대를 건설하기 위하여는 박 대령을 희생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고 진술했다.

문상길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것으로 봤다. 그는  자신을 재판하는 법정이 ‘미군정의 법정’이라고 강조하면서,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한다.”고 최후진술했다. 변호인은 이들이 박진경 암살을 결단할 수밖에 없게 내몬 데 대한 사회의 책임이 컸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변호인은 다음과 같이 변론했다. “금번 제주도 소요사건의 직접원인이 일부 악질 경관과 탐관오리의 비행에 인하였다는 것은 이미 각 책임자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해방된 이 땅에서 제주도민들이 가진 그 모든 불평과 본의 아닌 민족상잔에서 쓰러진 동포의 죽음을 본 이 젊은이들이 어떻게 하면 이것을 방지하고 30만 도민을 구할 수가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어리석고 좁은 판단이나마 자기 생명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뼈아픈 각오로 이러한 범행을 감행한 것이다. 물론 박 대령을 암살한 것은 유죄요 잘못이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는 또 오늘날 이 혼란에 빠지고 있는 사회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 뒤 이들에 대한 구명운동이 일었다. 하지만 암살 작전을 지시한 문상길과 직접 저격한 손선호는 형량 감면을 받지 못했다.

우리 군대에 의한 제주도민 학살을 막겠다는 결단으로 상관 암살을 지시한 문상길. 그는 스물 셋 청년이었다. 그가 유언으로 남긴 말이 회자된다. 문상길은 끝까지 민족을 위한 군대를 바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스물세살을 최후로 문상길은 갑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군대입니다. 마지막 바라건대 ×××의 ××아래 ×××의 ××아래 ××를 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말기를 바라며 갑니다.” 몇몇 단어들이 확인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가 동족을 지키는 군대를 바랐다는 점만큼은 이 유언을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무고한 도민을 지킬 목적으로 죽음을 결사했던 청년 군인 문상길과 손선호 두 이름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기 위한 움직임이 있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2022년 11월, 26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인근 공터에서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를 봉행하며 두 청년의 넋을 달랬다.

문상길 중위의 생가로 추정되는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 있는 기와 까치구멍집. 원래 이 건물은 임동면 마령리 이식골에 있었으나 임하댐을 건설하면서 옮겨졌다. (사진=조수진 기자)
문상길 중위의 생가로 추정되는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 있는 기와 까치구멍집. 원래 이 건물은 임동면 마령리 이식골에 있었으나 임하댐을 건설하면서 옮겨졌다. (사진=조수진 기자)

 

문상길 略史

1926년 10월 14일 출생. 출생지는 명확하지 않다. 안상학 시인은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마령리로 추정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졸업. 9연대 모병 담당관 겸 중대장. 1948년 9월 23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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