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오름에서 바라본 성산풍광. 저멀리 여명속 성산포와 우도가 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김수오)
다랑쉬오름에서 바라본 성산풍광. 저멀리 여명속 성산포와 우도가 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김수오)

성산포에 처음 왔을 때, 놀림을 받기도 했다. 나와 남동생은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다. 남동생도 나도 머리가 둥근 편이라 빡빡머리가 그리 흉해 보이지는 않았다. 동생은 “새야, 새야” 하면서 나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는데, “형아, 형아” 하는 부산 사투리였다. 둥글둥글 빡빡머리 꼬맹이가 “새야, 새야” 하며 알 수 없는 사투리를 하고 다녔으니 동네 아이들에게는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나를 따라다니는 동생을 볼 때마다 “새야, 새야” 하며 흉내 내기도 하고 괜히 빡빡머리를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이렇게 친구들과 어울리던 오정개 바닷가 앞에 우뚝 선 소섬(우도)이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아니, 외할아버지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소섬이 고향인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 말로는 배도 부렸다고 하니 살림살이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던 듯하다. 해방이 되자 어머니를 비롯한 자식들을 데리고 외할머니가 먼저 성산포로 돌아왔다. 외할아버지는 재산을 정리하고 들어오신다 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으셨다. 일본에 눌러 살면서 새로 결혼을 하고 자식들도 여러 명 낳으셨다.

2남 4녀의 맏이인 어머니는 홀어머니 밑에서 동생들 뒷바라지하며 고생스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때의 심정을 나중에 어머니는 “일만 일만 했져.” 하는 말로 토로하셨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부엌데기처럼 일만 했지만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외할머니는 맏딸에게 고생한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일 못한다고 구박하기 일쑤였다고 했다. 말끝마다 “영애 이년, 영애 이년” 하는 말을 달고 살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성산포 토박이였다. 삼형제 가운데 둘째였는데, 일곱 살엔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도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성산포 수협에 사환으로 들어가 일을 하며 집안 살림을 거들어야 했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이 성산포에서 결혼을 한 뒤,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서귀포에서 성산포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배편이 있어서, 제주에서 부산으로 이주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작은 배에다 순탄치 않은 항로여서 배 타는 일이 고생스러웠겠지만 어쨌든 배만 타면 하루 안에 부산에 갈 수 있었다. 척박한 제주를 떠나 부산으로 이주한 제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영도였다. 내가 태어난 곳도 영도구 청학동이었다.

어머니는 부산에서도 물질을 하셨다. 영도에 살면서 다대포니 광안리니 하는 곳으로 물질 다니던 일을 나중에 가끔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사환으로 들어간 성산포 수협에서 경리를 배우셨다. 이때 배운 경리 일이 아버지의 평생 자산이 되었는데, 부산에 가서는 약국의 경리 자리를 얻게 되었다. 수완이 좋으셨는지 부지런히 모은 돈으로 근무하던 약국을 아예 인수하기도 했다. 이때가 아마 우리 집 살림이 가장 폈던 시절이리라. 할머니는 나중에 “젊어서 번 돈 아무 쓸모 없져.” 하며 이때 일을 되새기며 자주 한탄하기도 하셨다. 

그때를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내리막의 이유를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시곤 했다. “핵맹 때문이주!” 약사 면허 없이 약국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을 테다. 게다가 4·19와 5·16을 거치며 허술했던 법률들이 정비되었다. 엄격한 법률 속에서 더 이상 약사 면허 없이 약국을 운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아버지는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고, 더 이상 부산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가족들이 모두 성산포에 모여 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부산과 제주시를 오가며 처리해야 할 일도 아직 남아 있었고 새로운 직장도 구해야 했다. 형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나중에 성산포로 오기로 했다. 어머니는 돈을 계속 벌어야 했으므로 충청도 대천 쪽에 물질하러 가셨다. 

나중에 어머니가 얼핏 내비친 말로 미루어볼 때, 차라리 어머니에게는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마음 편한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서해안이라 제주나 부산처럼 바다가 전혀 험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해녀들이 원래 없던 곳이라 “물건”이 지천에 있었다고도 했다. 아마 배를 타고 나가 작업을 한 것 같은데, 배를 몰고 작업을 도와주는 분이 무척 배려심 많고 맘 편히 작업할 수 있게 해주었던 듯하다. 그분 칭찬을 여러 번 하기도 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 어머니는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나름대로 평온하게 지낸 듯하다. 평생을 가족들을 위해서만 살아온 삶에서 누려보지 못한 자유를 누린 것이다.

형을 졸졸 따라다니는 동생처럼 종일 붙어다니다 별이 총총한 깊은 밤에 나란히 서서 잠든 두 망아지. (사진=김수오)

부산을 떠나 성산포로 오면서 두 손주를 떠안게 된 할머니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젊어서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삼형제를 키웠다. 부산에서 우리 집에 살 때도 온갖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멀리서 걸음새만 보아도 당장 알아볼 수 있었다. 천천히 걷는 법이 없고 팔을 힘차게 좌우로 놀리며 뛰다시피 걸어오셨다. 걸음걸이만큼이나 성질도 급하고 다혈질이셨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세 아들이나 며느리와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시어머니에게 거슬리는 일 한번 한 적 없는 우리 어머니하고만 무던하게 지내셨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곱슬거리는 머리를 참빗으로 가지런히 빗고 비녀를 단정히 꽂으셨다. 겉으로는 성미가 급해 보이지만, 말을 할 때는 조근조근하게 목소리 톤부터 차분해졌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러니 이렇게 하는 것이 경우가 바른 일이 아니냐고 설득력 있게 말씀하셨다. 긴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꼭 이렇게 “경우 바른 일”로 끝맺음하셨다.

물질에서는 진즉에 은퇴했지만, 톳을 캐든 우뭇가사리를 따든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바다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빌린 밭에서 유채 농사도 지어야 했다. 연료로 쓸 솔가지도 모아오고 소똥도 주어 와야 했다. 마른 소똥은 가늘고 고운 톱밥을 뭉쳐놓은 것처럼 생겼다. 밤중에 불목에 집어넣고 태우면 새벽까지 천천히 오래오래 탔다. 겨울밤 추위를 견디는 데는 소똥이 꼭 필요했다. 

고구마를 썰어 뒷동산에서 말리는 일도 해야 했다. 딱딱하게 말린 고구마를 '빼떼기'라고 했다. 하얀 알약처럼 생긴 당원을 넣고 삶아 먹기도 했다. 아마 사카린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쪄 먹기도 했지만, 파는 게 우선이었다. 잘 말린 '빼떼기'는 소주 만드는 주정공장에서 사갔다.

할머니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봐야 수입은 빤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무조건 아껴 써야 했다. 새로운 물건이나 가구 같은 것을 사는 일은 없었다. 책상이든 뭐든 필요한 것은 어디서 구했는지 얻어오셨다. 이발비도 아까웠다. 그래서 나와 남동생은 성산포에 온 뒤로 늘 빡빡머리로 다녀야 했다. 

먹는 것도 아껴야 했다. 그래도 동생이나 내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라면을 자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면 하나 끓여서 동생과 함께 밥을 말아먹는 때가 많았다. 그나마 가끔씩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지만 음식이 상해서 버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밥이 조금 상했다 싶으면 할머니는 '쉰다리'를 만들어 주셨다. 조금 상한 밥을 펄펄 끓이면 죽처럼 걸쭉해지는데, 여기에다 '빼떼기'에 넣어 먹던 당원을 몇 개 넣었다.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났다. 요즘 먹는 음식으로 치며 조금 더 시큼한 요구르트 맛이라고나 할까.

하루는 할머니가 검정고무신 한 켤레를 가지고 오셨다. 희끗희끗 회색빛이 도는 것이 새 고무신은 아니었다. 성산포에 오기 전에 국제시장에선가 어느 큰 시장에서 어머니가 사준 고무신이 벌써 낡아버린 때였다. 

할머니가 나더러 신으라며 들고 온 고무신을 살며시 들이미셨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 고무신을 신을 수가 없었다. 낡아서가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그건 여자 고무신이었다. 고무신 앞이 갸름했을 뿐 아니라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무늬도 많이 닳아 언뜻 보면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꽃무늬였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건 꽃무늬가 분명했다. 

할머니는 억지로 신기려고 하고 나는 한사코 신지 않으려 하고.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러다가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안 헌 건디” 힘없이 말하며 고무신을 내려놓았다. 아무렇지도 않은건데 왜 까탈스럽게 구느냐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조용히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발가락을 꽉 쪼이는 폭 좁은 고무신을 신고 보니, 머리에 머리핀을 꽂고 고무줄로 동여매기나 한 것처럼 어색하고 답답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불편은 충분히 참고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친구 녀석들이었다.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친구들이 고무신의 정체를 알아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녀석들이 분명히 여자 고무신 신은 놈이라고 놀려댈 것이다. 고무신을 더 이상 신지 않게 될 때에도 여자 고무신을 신었던 놈이라고 두고두고 놀려댈 것이다. 

고무신에 새겨진 꽃무늬를 알아본 녀석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도 마음이 계속 불편하셨는지 며칠 뒤 다른 고무신을 들고 오셨다. 이번에는 번듯한 남자 고무신이었다.

꽃무늬 여자 고무신 덕분이었을까? 희미한 꽃무늬를 확인하느라 고무신을 너무 열심히 쳐다본 때문일까? 이 무렵부터 왼쪽 오른쪽 신발을 엇갈려 신었다가 바꿔 신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신발을 신으려고 보니 왼쪽 오른쪽이 엇갈려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쉬운 일을 이제까지 못 했단 말인가?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이렇게 뚜렷이 보이는 차이를 지금까지 분간하지 못했다는 것은 더 신기한 일이었다.

글_임영근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쯤에 부모님 고향인 성산포로 옮겨가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시로 이사가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육지’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학생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고, 졸업한 뒤에는 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고양시 인문학 모임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시사 월간지, <시대> ‘서양철학산책’, ‘이 책 저 책 읽으며’ 코너에 에세이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 산문집 '일출봉에서 부는 바람'을 출간했다.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의사이자 사진작가인 김수오 선생 작품과 함께 격주 목요일 제주투데이에서 게재한다. 어렸을 때 성산포와 제주시에서 자란 일이 글쓰기에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제주다움을 담기 위해 산야를 누비는 김수오 한의사

사진_김수오

제주 노형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수오 씨는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한의학에 매료된 늦깍이 한의사다. 연어처럼 고향으로 회귀해 점차 사라져가는 제주의 풍광을 사진에 담고 있다. 낮에는 환자들을 진맥(診脈)하고 출퇴근 전후 이슬을 적시며 산야를 누빈다. 그대로가 아름다운 제주다움을 진맥(眞脈)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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