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화산책 연재 작가 두 친구. 여연(왼쪽)과 홍죽희(오른쪽). (사진=김일영 작가)
제주신화산책 연재 작가 두 친구. 여연(왼쪽)과 홍죽희(오른쪽). (사진=김일영 작가)

50대 동갑내기 두 친구가 제주의 신당을 찾아 함께 걷는다. 제주의 신을 찾는 순례길에 오른 셈. 그 길에서 마을을 지켜준 신들과 만나기도 하고 30년 전 20대 청년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1만8천의 신과 함께 해온 제주인의 삶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매주 금요일 ‘제주신화산책’ 코너에서 작가 여연의 ‘한라산의 신들’과 작가 홍죽희의 ‘제주의 돌에서 신성을 만나다’를 돌아가며 싣는다. <편집자주>

한라산신 가운데 대표적인 사냥신은 송당의 소천국이다. 강남 천자국에서 들어온 백주또와 혼인하여 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을 낳았는데, 이들이 낳은 아들딸들이 줄이 뻗고 발이 뻗어 손지방상(손자손녀와 일가붙이) 삼백 일흔 여덟이 되었고, 여러 마을의 신(神)이 되었다. 이들을 송당계 신이라 한다.

백주또를 모시고 있는 송당본향당을 제주 당 신앙의 성지라 하고, 백주또를 제주 당신(堂神)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런데 백주또의 남편신이자 제주 토착신인 소천국에 대해서는 제주 당신의 아버지라고 굳이 거론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소천국이 좌정하고 있던 당은 오랫동안 사람이 다니지 않아 폐당이 되기도 했다. 소천국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잊힌 존재였던 셈이다. 

이렇게 신화 속에서나 등장했던 사냥신 소천국을 우리들 곁으로 소환하는 이유는 초기 수렵시대를 대표하는 한라산신 하로산또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냥신 소천국의 행적에서 제주 사람들, 정확히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을 짚어내는 것도 그를 주인공으로 소환한 이유 중 하나이다. 

소천국과 백주또의 신화는 채록본이 여럿 있지만 이 글은 궤네깃당본풀이를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그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현용준, <제주도무속자료사전>, 도서출판각)

백주또를 모신 송당본향당 풍경 .(사진=김일영 작가)
백주또를 모신 송당본향당 풍경 .(사진=김일영 작가)

소천국은 알송당 고무니모를에서 솟아나고, 부인인 백주또는 강남천자국 백모래밭에서 솟아났다. 백주또가 열다섯 살이 되자 신랑감을 찾아 천기를 짚어 보니, 제주땅에 배필이 있었다. 백주또는 제주섬으로 내려와 소천국과 부부가 되었다.

소천국과 백주또 사이에 딸 아들이 계속 태어나니 생활이 힘들어졌다. 백주또가 또 다시 임신을 하자 남편에게 사냥만 해서 살 수 없으니 농사를 짓자고 했다. 송당리에는 볍씨 아홉 섬지기, 피씨 아홉 섬지기나 되는 오붕이굴왓 밭이 있었다.

소천국은 소 한 마리에 쟁기까지 갖추고 아침 일찍 오붕이굴왓으로 향했다. 백주또는 밭을 갈고 있는 남편을 위해 밥도 아홉 동이 국도 아홉 동이를 장만해서 가져다주었다.

소천국이 부지런히 밭을 갈고 있노라니 때마침 지나가던 태산절 중이 다가와 먹을 게 있으면 조금만 달라고 했다. 소천국은 부인이 점심을 넉넉하게 싸 왔으니 조금 줘도 괜찮겠거니 생각하고는 조금만 먹고 가라고 했다.

그러자 태산절 중은 좋다구나 하면서 먹는다는 것이 어느새 밥도 국도 다 바닥이 드러나 버렸다. 겁이 바락 난 태산절 중은 살그머니 빠져나가 줄행랑을 쳤다.

한참 밭을 갈던 소천국이 시장하여 나무 밑으로 가 보니 빈 그릇만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이리 저리 둘러보던 소천국에게 밭 갈던 소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라도 잡아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소천국은 소를 주먹으로 때려잡았다. 

그러고는 쇠갈퀴 같은 손톱으로 쇠가죽을 벗겨내 망개나무로 구워가며 이게 익었는가 한 점, 저게 익었는가 한 점 먹다보니 어느새 뼈다귀만 남았다. 소 한 마리를 다 먹었는데도 여전히 배고픈 소천국은 억새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남의 소까지 잡아먹었다. 

밭 갈 소가 없어지자 소천국은 불룩 나온 배때기를 쟁기 삼아 갈기로 했다. 소천국이 한 번 기어갈 때마다 흙이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넓은 고랑이 생겼다. 

빈 그릇을 가지러 온 백주또는 남편이 자기 소를 잡아 먹는 것도 모자라 남의 소까지 잡아먹었다는 걸 알고는 펄쩍 뛰었다. 백주또는 소도둑놈이랑 같이 살 수 없으니 땅 가르고 물 갈라 살림을 분산하자고 선언했다. (이하 생략)

 

송당본향당의 신년과세제 당굿. (사진=김일영 작가)
송당본향당의 신년과세제 당굿. (사진=김일영 작가)

         
신화 속의 소천국은 한라산신이자 사냥신이다. 그런데 산신으로서의 존재감이 형편없다. 배고프다고 자기 소든 남의 소든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모습하며, 불룩 나온 배때기로 쟁기질하는 꼴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이는 분명 소천국의 한심한 모습을 비아냥거리며 웃음거리로 삼고자 하는 구술자의 의도가 다분히 담겼으리라. 

소천국은 소 한 마리를 통으로 먹어도 양이 차지 않는 대식가이다. 이렇게 엄청난 식성은 그가 평범하지 않은 존재라는 걸 웅변하지만 또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농경 집단생활을 어렵게 하는 식성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기네 소를 잡아먹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남의 소까지 잡아먹는 것은 사유재산이 인정되기 시작한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행위이다. 급기야 부인에게 쫓겨난 소천국은 사냥해서 자기 혼자 먹고사는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갔다. 

소천국에 관한 신화는 농경시대로 접어들고, 정착 생활을 하는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수렵 이동생활을 하는 세력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소천국은 농업 정착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물러난 산신이라 할 수 있겠다.

제주 여성의 주체성과 강인함을 얘기하면서 많이 거론되는 신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세경본풀이의 매력적인 주인공 자청비와 송당본풀이의 백주또이다. 이와 같은 제주 여성의 강인하고 주체적인 모습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제주는 예로부터 고기잡이나 부역 등으로 목숨을 잃는 남자들이 많은 탓에 여자들이 밭일, 물질 등 노동을 감당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남자들이 제구실을 못 하거나 일찍 세상을 뜨면 여자들은 아이들 키우는 일에서 경제활동까지 도맡아야 했고, 그렇게 하려면 강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신화 속의 소천국을 보면서 주변에서 흔히 보았던 무책임한 가장들을 떠올렸고, 그 많은 자식을 혼자 키워야 했던 백주또의 고단함을 생각했다. 남편과 살림을 가른 백주또가 고사리와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살았다는 구술자료도 있는 걸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생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소천국은 비록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속 편하게 혼자 나가 살면서 사냥으로 자기의 끼니만 해결하면 되었으니 한량이 따로 없다. 

실제로 가장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혼자 억척스럽게 자식을 키워야 했던 제주 여인들이 많았다. 도움을 주지 않는 걸 넘어서 노름이니 폭행이니 하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여인들의 등골을 빼먹었던 남자들도 있었다. 오죽하면 제주 민요 속에, ‘한 푼 두 푼 모아진 돈도 낭군님 술값에 다 넘어간다’는 대목까지 있을까.

당 울타리만 남은 소천국당의 소박한 모습. (사진=김일영 작가)
당 울타리만 남은 소천국당의 소박한 모습. (사진=김일영 작가)

신화는 공동체의 역사를 반영하면서 또한 신앙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담고 있다. 신화를 읽으며 백주또의 고단함을 생각하고, 평생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고달프게 살았던 우리 어머니를 떠올린 이유이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면서 육남매를 키웠고, 고생한 만큼 돌아가실 때도 험하게 병치레를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상관과 다툰 일로 시청 공무원 자리를 내던지고 토목 공사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 큰 공사가 끝나면 집이 넘어가고 작은 공사가 끝나면 빚이 불어났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니 어머니가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젊어서 큰 도로나 다리 공사 같은 일을 하청받았지만 점차 동네 골목길 포장공사나 따낼 수 있는 수준으로 사업이 기울어졌다. 마침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의 골목길 포장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왜 아버지가 공사를 해도 남는 게 없었는지 내 나름으로 이해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툭하면 일꾼들에게 공사를 맡겨두고 술 한 잔 기울이러 사라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장사를 일찍 끝내고 돌아와 자식들을 이끌고 가서는 잡역부 일을 해가며 인건비를 줄여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셨다.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결혼을 일찍 해 봐야 고생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동생도 아버지처럼 흐지부지 일 처리 하는 남자와는 절대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늦게 결혼을 했고, 여동생도 일처리만큼은 똑 부러진 남편을 만났다.

사냥으로 먹고 살던 시대가 저물면서 사냥신인 소천국을 모시던 신앙민도 점차 사라졌다. 이와 같은 시대의 변화가 소천국당이 폐당됐던 이유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처럼 신들의 운명도 알 수 없다. 잊혔던 소천국당이 다시 정비가 되고 그곳에 이르는 길까지 시원하게 넓혀 놓은 걸 보면 말이다. 

백주또를 모시는 송당본향당은 ‘제주특별자치도 민속 문화재 제9-1호’로, 매년 음력 정월 열사흘에 열리는 마을당굿 ‘신년과세제’는 무형문화제로 지정되었다. 또한 맥이 끊어졌던 7월 13일 마블림제와 10월 13일 시만곡대제가 다시 열린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폐당 되었던 소천국당도 다시 정비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소천국당을 중심으로 한 송당 답사를 계획하고 일정을 잡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

작가 여연. 

 

여연. (사진=작가 여연 제공)

제주와 부산에서 30여 년 국어교사로 재직하였고, 퇴직 후에는 고향 제주로 돌아와 신화 연구로 인생 2막을 펼치고 있다. 생애 첫 작품으로 2016년 <제주의 파랑새>(각 펴냄, 2016)를 출판하였고, 이 책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17년 출판산업진흥을 위해 실시한 ‘도깨비 책방’ 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연구소’의 신당 답사를 주도하면서, 답사 내용을 바탕으로 민속학자 문무병과 공저로 <신화와 함께하는 제주 당올레>(알렙 펴냄, 2017)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 연구모임을 1년간 진행하고 2018년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른 책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 펴냄, 2018)를 3권으로 출간하였고 서울과 부산, 제주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다. 2019년 하반기부터 제주신화 테마길을 여는 등 제주 신화 스토리텔링 연구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작가 김일영.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시작으로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2012년 제주로 이주해 ‘여행과치유’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 회원들과 제주도 중산간마을을 답사하고 기록한 <제주시 중산간마을>(공저, 류가헌 펴냄, 2018)과 <제주의 성숲 당올레111>(공저, 황금알 펴냄, 2020)을 펴냈다. 또 제주 중산간마을 사진전과 농협아동후원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탐나는여행 대표이며 ‘여행과치유’ ‘제주신화연구소’ 회원으로 제주의 중산간마을과 신당을 찾고 기록하면서 제주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려는 입도 8년차 제주도민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