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오 작가(사진=김재훈 기자)
김수오 작가(사진=김재훈 기자)

“침 맞으러 갔다가 한 시간 동안 제주 얘기 듣고 왔어요.”

김수오 작가의 한의원을 찾아갔던 한 지인의 말이다. 김 작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웃을 얘기다. 야구계에 박찬호가 있다면, 제주도에는 김수오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제주에 대해서 말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김수오 작가를 만났다. 역시 토커티브talkative했다.

제주시 노형동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김수오 원장. 제주 시민사회에서 김수오는 친숙한 이름이다. 그는 에너지가 넘친다. 한 번 꽂힌 사안에 대해서는 시간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그가 가장 열정을 갖고 살펴 보는 대상은 역시 제주다. 그는 몇 년 간 제주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는 데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최근 『신들의 땅』(최창남 글/김수오 사진)을 출간하고, 동명의 사진 전시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사람의 몸이 소우주다

김 작가는 제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제주에서 마쳤다. 공부를 잘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굴지의 대기업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탄탄대로를 걸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6년이 지나 그는 다시 대입시험을 치렀다. 한의대에 가기 위해서. 한의대 합격 후 그는 바로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전자공학과 한의학. 그 갭이 커 보인다. 그는 어린 시절 제주 자연과 자연의 이치를 살펴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 이치를 공부하는 물리학과에 가려고 했다. 원서를 내기 직전 제삿집에 갔다가 서울에서 교수를 하는 친척을 만났다. 그분이 당부하길 물리학과는 여유 있는 서울의 부잣집 아이들이 가는 곳이지 제주의 가난한 집에서는 가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가장 전망이 있다고 하는 전자공학을 전공하게 됐다.

대기업을 그만둔 계기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김 작가는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이런 것들이 행복한데 연구원으로서의 개발과 성과, 경쟁, 이런 것들이 크게 행복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전자공학에서 한의학으로 옮겨가는 것. 사고 체계가 흔들릴 만한 일이다. 어려움은 없었을까.

“연구원이던 시절에 건강도 좀 많이 나빠져 치료하는 과정에서 요가와 한의학을 알게 됐어요. 동양의학, 동양과학을 경험하면서 우연히 한의학 책을 봤는데 내가 어릴 때 꿈꾸던 자연과학적인 관점에서의 사람이 보이더라고요.” 사람의 몸이 작은 우주라는 관점과 인체를 이해하는 과정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사진=김재훈 기자)
(사진=김재훈 기자)

제주의 문제를 보다...나의 역할은 조력자

김수오 작가도 대학에 가서야 제주4·3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4·3에 대한 제주사람들의 한을 풀어야 한다는 의지가 모인 시기였다. 현기영 작가를 중심으로 제주사회문제협의회가 만들어졌다.

“망각을 강요당한 4·3에 대한 역사적인 복원을 위해 애쓰는 모임이 이뤄지고 있었죠. 내가 그때 학교를 갓 졸업하고 직장생활하는 20대 중반 나이였어요. 선배들을 도와서 간사 활동을 하면서 제주 출신 선배들과 각 대학교 향우회를 연결시켜서 4·3 추모제 행사 등을 해마다 기획하고 준비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이른바 마당발 소리를 들으면서 다녔어요. 그 맥락으로 지금까지 여러분들과 이렇게 인간적인 인연을 쌓아 왔죠.” 조력자. 김 작가가 여기는 자신의 역할이다. 현재까지도 시민사회에 대한 그의 ‘조력’은 이어지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현기영 작가, 강요배 화백 등과 교분을 이어왔다. 제주 땅에 대한 애정을 가진 예술가들과 오랜 시간 쌓아온 인간적인 교분. 김 작가는 자신이 사진을 찍는데 그들과의 교분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강정마을 가는 길에 뜬 달

그는 10여년 전, 제주로 이주했다. 노형동에 한의원을 차렸다. 이후 가장 많이 찾은 곳은 해군기지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강정마을이다.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되면 한라산을 넘어 강정마을로 내달렸다. 해군기지를 막기 위해 몸부림쳐온 주민과 활동가 들의 건강을 살폈다. 한라산을 넘어 제주시와 강정마을을 오가면서 그의 사진 작업도 시작됐다. 한라산 중턱의 오름들을 보게 된 것.

김수오 작가(사진=김재훈 기자)
김수오 작가(사진=김재훈 기자)

“10년 전에 고향으로 이전해서 강정마을 분들이 마을을 지키려고 공사장을 막으면서 다친 분들이 한의원에 처음에 왔었어요. 그분들이 24시간 공사를 감시하면서 몸이 아픈 데도 병원에 못 오니까, 그럼 내가 가서 치료해 드리겠다 해서 강정마을에 가기 시작했어요. 진료를 마치고 저녁에 갔다가 자정 넘어서 다시 제주시로 넘어 오는데 새별오름도 보이고 고요한 제주의 밤 풍경이 보이더라고요.”

어느날부터인가 그의 손은 카메라를 쥐고 있었다. 김수오 작가와 저녁 약속이 있을 때, 그가 늦는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면 전화를 걸기보다 하늘을 먼저 올려다 봤다. 달이 밝았다. 어느 오름에 올라 달밤의 풍경 사진을 찍느라 못 내려오고 있겠구나, 생각하면 늘 틀림 없었다.

그는 제주 풍경에 매혹됐다. 간절하게 붙들렸다. “제주의 이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지는 게 마음 아팠는데 제주의 모습을 사람들과 같이 공유하고 그 아름다움을 느낌으로써 제주의 가치가 조금 더 지켜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적극적으로 찍게 되었죠.”

김수오 작가(사진=김재훈 기자)
김수오 작가(사진=김재훈 기자)

시민 김수오

김수오 작가가 참여하는 다양한 제주 지역 시민운동가들의 모임이나 행사의 끝은 그의 사진촬영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행사 뒤 모여서 사진을 찍는다. 처음엔 더러 ‘에에’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젠 그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의식이 됐다. 김 작가의 기록가적인 의지 덕분이다. 남겨야 한다는.

‘주침야사’

그의 작품들을 보면 밤의 풍경이 부각된다. 이유는? 낮에는 한의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해야 하니까. 밤 촬영은 낮에 비해 사물을 조금 더 오래,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대상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는 낮보다 장시간의 노출이 필요하다. 그리고 까다로운 조정이 필요하다. 그는 사물을 오래, 적극적으로, 까다롭게 관찰하는 작가다. 서너 차례 그와 함께 오름으로 출사를 나간 적이 있다. 저녁 해가 질 무렵의 하늘빛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매순간 바뀐다. 해가 져도 그는 집요하다. 미명의 변화와 차이를 모두 확인하려 든다.

그는 퇴근하면 사진을 찍으러 한라산 중산간으로 올라간다. 기본적인 루틴이다. 한번 올라가면 밤 열 시를 넘기기 일쑤다. 자정 또는 새벽 한두 시에 내려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는 근래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중산간 공동목장의 말들을 사진에 담아왔다. 제주마는 김 작가의 주요 테마가 됐다. 오랜 시간 말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경계심이 많고 쉽게 놀라는 말들과 제법 친해졌다. 그에게 등을 긁어달라고 내미는 말도 있다. 그는 그 말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모습과 한겨울에도 눈 속에 버티는 모습, 한여름 태풍을 견디는 모습, 그리고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김 작가는 제주의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말들을 통해서 제주인의 모습, 제주인이 견뎌온 삶을 본다.

P.S.

인터뷰를 마친 뒤, 김 작가에게 넌지시 물었다. 토커티브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지 않느냐고. 김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말이 많아진 이유가, 일단 그 한의학에서는 아까 얘기했지만 예방의학적인 측면이 중요하고, 환자들이 오면 치료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활 방식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세하고 세세하게 설명을 해줘야 다시 재발하지 않…(중략)...한의사가 되기 전엔 내가 엔지니어였잖아요? 엔지니어에게는 정확한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말하거나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을 때는 정확하게 해야만...(또 중략)...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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