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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탕]살아남은 자의 ‘떨림’ 때문에 그리고 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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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탕]살아남은 자의 ‘떨림’ 때문에 그리고 또 그렸다
  • 조수진 기자
  • 승인 2021.05.07 05: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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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기 목요일에 만나는 뜨겁고 내밀한 제주인 인터뷰
《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그린 김홍모 만화가
지난달 19일 오후 김홍모 작가가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19일 오후 김홍모 작가가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우리는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고통의 바다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수면은 해가 갈수록 거의 우리를 잠기게 할 정도로 차올랐다. 눈을 감거나 등을 돌리는 일은 소용 없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의 바다는 온통 주위에, 수평선 끝까지 온 사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섬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었고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 일이었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

세월호 7주기가 얼마 지나지 않은 봄날. 노란 유채꽃밭을 가진 집 앞마당에서 김홍모 작가를 만났다. 그는 1년간 ‘파란 바지 의인’이라 불리는 세월호 참사 생존자 김동수씨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담은 웹툰을 무료로 연재했다. 이 만화는 최근 <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의 이야기>로 묶여 나왔다. 지금도 7년 전 그날의 ‘홀’에 갇혀 고통 받는 이들을 세상으로 꺼내 올리려는 심정으로 그려나간 이 책은 북펀딩으로 제작됐다. 그리고 펀딩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목표 금액의 다섯 배인 1000만원을 넘겼다. 

#‘떨림’으로 시작된 작업

“김동수씨의 떨림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세월호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분의 표정과 목소리, 손이 모두 떨렸어요.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그 떨림에 다 들어가 있었어요. 그게 제게 고스란히 느껴졌고 이 사람의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김 작가가 세월호 참사를 다룬 만화를 그리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떨리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지난 2018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지났는데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은 시작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앞서 2년 전 다른 작가들과 세월호를 주제로 옴니버스 작품을 기획했다가 정권이 바뀌자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되겠다’하는 생각에 기획도 접은 그였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문 정부에 대한 실망이 커질 무렵 제주에서 김동수씨를 우연히 만났다. 

작품 준비에만 꼬박 2년이 걸렸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차마 보지 못했던 기사와 영상 자료들을 보고 또 봤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대사를 쓰기 위해선 그 인물이 돼야 했다. 김 작가는 2014년 4월16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칼로 자신의 몸을 긋고 수면제 수십 알을 털어 넣는 김동수씨가 돼야 했다. 또 살기 위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려는 남편을 매일 지켜보며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동수씨의 아내 형숙씨가 돼야 했다. 또 자상했던 예전의 아빠를 그리워하며 ‘우리 가족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요’를 묻는 딸이 돼야 했다. 

《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책 표지.
《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책 표지.

#“한국에선 세월호 만화를 연재해줄 데가 없다더라”

동수씨의 트라우마와 그 가족이 겪는 고통에 온전히 감정을 이입해야 하는 작업은 힘겨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세월호 안에서 소방호스로 학생들을 끌어올리는 동수씨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에 다시 가로막혔다. 그의 만화를 연재해주겠다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요 포털 사이트를 알아봤는데 다들 ‘세월호 만화는 어렵겠다’라고 하더군요. 어떤 플랫폼은 편집회의에서까지 연재하기로 결정했는데 막판에 대표가 잘랐고요. 주위에서 ‘한국에선 세월호 만화 연재할 만한 데가 없을 거다’라는 말을 들었었죠. 플랫폼 찾는 데에만 6개월 가까이 걸렸어요.”

철저히 상업성 위주로 움직이는 웹툰 시장에서 그의 작품을 연재할 플랫폼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결국 독립웹툰 플랫폼에 무료로 연재를 하기로 했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이 플랫폼은 작가에게 편집권을 주는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가능했다. 1년간 수익 없이 연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작품 활동과 생계를 위한 일을 병행해야 했다. 더 많이 읽히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이 작품의 목적은 수익이 아닌 동수씨의 이야기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시나리오를 쓰고 웹툰을 연재하며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다. 이는 이명과 난청으로 나타났다. 의사는 이 증상을 ‘메니에르병’으로 진단했다. 지금까지 뚜렷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완치도 쉽지 않다고 했다. (이 때문에 김 작가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귀마개를 꽂고 있었다.) 그는 이 작품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데 대해 “많은 분들의 응원 덕분”이라며 “힘들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달 19일 오후 김홍모 작가가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19일 오후 김홍모 작가가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반공소년이 학생운동을 하기까지

김 작가는 <홀> 이전에도 용산 참사를 다룬 <내가 살던 용산>, 제주 해녀들의 목소리로 4·3을 그린 <빗창> 등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냈다. 하지만 어릴 땐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던 ‘반공소년’이었다. 간첩 잡는 ‘똘이장군’ 못지 않았던 어린이가 어떻게 국가 공권력에 맞서는 만화가가 됐을까. 

“제가 자란 곳이 휴전선과 인접한 경기 연천군이었어요. 매일 포소리, 총소리, 군대 훈련소리, 사이렌 소리가 들렸죠. 또 ‘북이 쳐들어온다’ 이런 이야기만 들으며 자라니 똘이장군이 된 거예요.”

그를 눈뜨게 한 사건은 대학교 1학년 실기수업 시간이었다. 김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했는데 하루는 교수가 실기실에 돌멩이를 가져와서 그리라고 했다. 그러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죽어있는 돌을 그려야 하는가’. 김 작가는 교수에게 ‘바람소리와 새소리와 물소리가 있는 계곡에 가서 살아있는 돌을 그리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가 ‘건방진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다른 교수들도 마찬가지로 위압적이었다. 국내 미대 중 최고로 꼽는 학교였지만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후로 김 작가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자퇴를 고민하기도 했다. 

“하루는 미대회장인 선배와 낮술을 했어요. 그때 그 선배가 ‘홍모야, 넌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니?’라고 묻는데 그 질문이 그렇게 반가운 거예요. 저는 그런 질문을 받고 싶었던 거였는데... 교수 누구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어요. 제 대답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좋아하고 감동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 생각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만화를 계속 그리고 있구요.”

‘선배와의 낮술’은 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폭동’이라고만 알았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게 되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전두환 처단하자’를 외치며 거리로 뛰어다녔다. 데모를 계속 하기 위해 자퇴 생각도 접었다. 전국 수배를 당하고 4학년 1학기가 끝날 때쯤 구속이 됐다. 1심에서 실형 4년형을 선고 받고 8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복도에서 잠을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수배 생활과 비교하면 감방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함께 지내던 건달과 재소자 처우 개선을 위해 시위도 했다. 이 경험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좁은 방>에 담겼다.

지난달 19일 오후 김홍모 작가가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김홍모 작가의 뿌리는 리얼리즘이다. 그는 우리 사회의 누추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사회의 민낯을 햇볕에 말린다. 빨랫줄 사이에서 포즈를 취한 김홍모 작가.(사진, 글=김재훈 기자)

#“투쟁은 결국 사랑”

김 작가가 만화가를 꿈꾼 계기는 큰형 김홍익 만화가 덕분이다. 김홍익 만화가는 <독고탁> 시리즈를 그린 이상무 선생의 문하생이었다. 어릴 때 독고탁을 그리는 형의 모습이 멋있어서 지우개질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다. 중학교 땐 먹칠 채우기로 승진(?)하며 만화가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김 작가가 리얼리즘 계열의 만화를 그리는 것도 형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제 만화의 뿌리는 리얼리즘인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동네 이웃에 대한 이야기예요. 용산 참사를 생각해보면 누구나 철거민이 될 수 있어요. 옆집에 살던 사람이 망루에 올라갔다가 죽어서 내려온 거예요. 너무 마음이 아프잖아요. 주변의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외면할 수가 없어요.”

그는 예술의 사회적인 역할 중 하나가 ‘서민들의 스피커’라고 강조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스피커’가 크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잘 알려진다. 반면 서민들은 어려운 일을 겪거나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해도 ‘스피커’가 작아서 잘 퍼지지 않는다. 김 작가는 어떻게 하면 약자들을 ‘잘’ 대변하는 스피커를 할지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입도 10년 차인 김 작가가 제주에 둥지를 튼 이유는 예전의 고향과 매우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살던 곳이 너무 많이 개발돼서 지리산을 갈까, 제주를 갈까 고민했다”며 “제주도 동쪽 시골마을이 고향이랑 비슷해서 이곳으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19일 오후 김홍모 작가가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19일 오후 김홍모 작가(왼쪽)가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제주를 고향처럼 여기는 그에게 가장 큰 걱정은 섬이 군사기지화하는 것. 김 작가는 “강정 해군기지도 그렇고 제2공항도 그렇고 또 국가위성통합운영센터도 모두 군사기지화의 과정으로 보인다”며 “정치인들이 나서서 막지 않는 건 직무유기”라고 지적했다. 

이어 “예전에 나고 자란 곳이 군사기지가 많았던 곳이라서 주변 마을이 어떻게 황폐화하고 주민의 삶이 어떻게 피폐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며 “군사기지가 생기면 시설 자체만 들어서는 게 아니라 위락시설도 생기고 환경도 파괴된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알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제주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언젠가 작품에 담아낼 예정이다. 그는 “비자림로를 지키거나 제2공항 반대하기 위해 단식하고 싸우는 여성 활동가들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라며 “이 친구들의 인터뷰집을 만화로 그리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투쟁이란 말이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결국은 사랑”이라며 “예전에 대학교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하면 이해가 안 갔는데 점점 알게 됐다. 민중을 사랑하고 아픈 현실을 사랑하고, 이런 마음이 있으니 싸우게 되는 것이다. 제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역시 사랑하는 제주가 파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 아닌가”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최근 발간한 <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제주도의 모든 학교와 도서관에 꽂혀야 하는 책”이라며 “앞으로 모든 서점과 도서관은 ‘홀’이 있느냐, 없느냐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명랑만화 주인공처럼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지난달 19일 오후 김홍모 작가가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19일 오후 김홍모 작가가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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