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개빌레(사진=한진오 제공)
제주시 구좌읍 해안의 '덩개빌레'(사진=한진오 제공)

산이 바다에 있다 하여

연초록 물감을 개어놓은 비췻빛 해변에 홀려 듬성듬성 서 있는 여행자들과는 다른 팔자였다. 물음표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거대한 바람개비들을 좌표 삼아 전설을 쫓았다. 그의 눈은 잠깐이라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발의 생각은 달랐는지 여러 차례 디뎠던 바닷길을 능숙하게 디뎌갔다. 물음표의 발은 김녕과 월정 사이 ‘덩개빌레’를 향하고 있었다.

덩개빌레는 널따랗게 펼쳐진 용암대지였다. 수만 년 전 뜨겁게 타올랐던 마그마가 바다를 그리워하여 마침내 다다른 곳이 덩개빌레다. 마당처럼 펼쳐진 너럭바위 틈바구니에 드문드문 조수웅덩이들이 포진했다. 작은 것은 대야만 하고 큰 것은 원형풀장처럼 너르닥해 물놀이에도 제격이었다.

물음표는 김녕마을 사람들로부터 이곳에 거대한 산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항상 물속에 잠겨 있어서 시시때때로 물때를 잘 맞춰야 잠깐 드러낸 봉우리를 볼 수 있다는 전설의 산이었다. 무시로 드나들면 언제고 볼 수 있으리라 작정하고 틈틈이 덩개빌레를 찾아가 바다만 가늠하며 무장승처럼 굳어 서곤 했다. 인적 드문 바닷가에는 이따금 자전거를 타고 울퉁불퉁한 빌레를 능숙하게 달리는 마을노인이 찾아들 뿐 흔한 여행자들도 뜸했다. 호루라기를 목에 맨 노인은 자기만큼이나 이 바다를 자주 찾는 물음표의 정체가 궁금했던지 어느 날은 말을 건네 왔다. 물음표가 두럭산의 전설을 찾아왔다고 대답하자 노인은 어깨에 힘을 주며 이런 너스레를 떨었다.

“제주에 오름이 삼백예순 갠디, 산은 다섯 개라. 한라산, 산방산, 송악산, 영주산까지 네 개. 경 허고 다섯 번째가 바로 두럭산이라. 그니까 두럭산은 제주도 5대 산이주.”

지질학적으로야 산과 오름은 이름만 다를 뿐 기실 같은 것이라서 구별 짓는 것은 그저 말장난인데 두럭산이 오죽이나 영험했으면 저런 말이 생겨났을까. 물음표는 저 노인이야말로 진실을 보고 있다고 여겼다.

두럭산(사진=한진오 제공)
구좌읍 김녕리 앞바다의 '두럭산'(사진=한진오 제공)

두럭산에 깃든 전설

두럭산, 김녕마을에 전해오는 해묵은 전설 속 두럭산은 몇 가지 사연을 품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 섬의 창조주 설문대가 남긴 행적이다. 제주섬을 창조한 설문대는 엄청난 역사(役事)를 홀로 치른 탓에 몸을 감쌌던 옷이 헤지고 더러워져서 종종 바느질을 하거나 빨래를 했다. 설문대의 빨래터는 제주섬 여러 곳에 있었는데 이곳 덩개빌레 바닷가의 두럭산은 빨랫감을 넣었던 빨래바구니라고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설문대가 쌓아올린 높다란 한라산에서 세상을 다스릴 영웅이 태어나면 그가 탈 용마가 두럭산에서 솟아난다는 사연이다. 실제 두럭산은 그리 크지 않은 수중암초지만 설문대는 이곳에 자신의 권능을 진득하게 달여 놓은 모양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영등신과 잇닿는 이야기다. 영등신은 영등이월이면 따스한 봄바람을 일으켜 제주섬으로 찾아와 한림 복덕개를 시작으로 우도 진질깍에 이르기까지 두루 날아들며 봄의 씨앗을 뿌리고 한라산 단골머리에서 꽃놀이를 즐긴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사연이다. 그런데 영등신이 수평선 너머 영등땅에서 제주섬을 향할 때 이정표로 삼는 것이 다름 아닌 두럭산이라는 사연은 좀체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제주섬에 첫발을 딛는 곳이 복덕개가 아니라 두럭산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세 가지나 되는 전설을 품은 바위라면 뭔가 달라도 다른 비범한 모습이어야 한다.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이름마저 두럭산인 마당인데 평범해서야 쓰겠는가. 그런데 두럭산은 너무나 평범한 갯바위다. 여신 설문대는 어쩌자고 이 보잘 것 없는 갯바위를 위대한 신성의 좌정처로 삼았을까?

보이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은

신화는 언제나 그렇듯이 정답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 성스러운 이야기를 섬기는 사람마다 제각각 자기만의 해답을 지니라고 가르쳐줄 뿐이다. 일찌감치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는 어떻게 해석해도 모두 정답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설문대가 보잘 것 없는 갯바위를 신성한 산으로 만든 이유 또한 보는 이들 저마다의 해석 속에 있겠다.

물때를 잘 맞춰서 썰물이 이는 시간에 덩개빌레를 찾는다면 수면 위로 머리를 살짝 내민 두럭산과 만날 수 있다. 김녕 토박이들은 두럭산은 음력 3월 보름날이 오면 신비로운 자태를 가장 많이 드러낸다고 한다. 그래봤자 산이라고 부르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막상 눈으로 보게 되면 실망할 사람들이 많을 법도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신화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신성을 부여한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셀 수 없이 많지 않은가. 어쩌면 설문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려고 작고 볼품없는 갯바위에 신성을 불어넣었는지 모른다. 세상 모든 존재를 우러르고 함께 공생하라는 메시지야말로 설문대가 두럭산에 새겨놓은 신화의 속뜻은 아닐는지.

오름을 파헤치고 바위를 부수고 나무를 베어내는 세상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거침없이 파괴하는 마당에 하물며 보이지 않는 것들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갯바위 하나도 거대한 산으로 여기던 신화의 시대는 사라졌다. 두럭산을 수면 위로 살짝 드러난 바위로만 여긴다. 파도 아래로 거대한 산체를 숨긴 두럭산의 참모습은 헤아리지 못한다. 물때를 맞추건 못 맞추건 두럭산 끄트머리가 보이건 안 보이건 덩개빌레에 가보시라 권하고 싶다. 그 바다에 닿으면 귀 기울이라. 두럭산에 깃든 설문대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건네올지도 모른다.

“신화를 잃어버린 인간은 육신을 잃어버린 그림자나 다름없다.”

마음의 눈으로 두럭산을 우러러온 김녕 토박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금기를 지킨다. 누구도 두럭산에 오르지 않으면 심지어 그 근처에서는 물질조차도 삼간다. 누군가 금기를 깨뜨리면 마을에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하니 두럭산의 신성은 세상 어떤 산보다 높고 큰 것이 맞겠다.

굿 퍼포먼스 전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한진오.(사진=김재훈 기자)
한진오.

 

한진오는 제주도굿에 빠져 탈장르 창작활동을 벌이는 작가다. 스스로 ‘제주가 낳고 세계가 버린 딴따라 무허가 인간문화재’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는 자신의 탈장르 창작 활동에는 굿의 ‘비결정성’과 ‘주술적 사실주의’가 관통한다고 소개한다. 저서로 제주신화 담론집 ‘모든 것의 처음, 신화’(한그루, 2019), 희곡집 ‘사라진 것들의 미래’(걷는사람, 2020)가 있고 공저로 ‘이용옥 심방 본풀이’(보고사, 2009) 등 다수가 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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