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꿈》 고정순 글 그림, 권정생 편지, 길벗어린이 펴냄
《봄꿈》 고정순 글·그림, 권정생 편지, 길벗어린이 펴냄

2022년 5월 18일에 나온 그림책이다. 지금부터 42년 앞서 전라도 광주에선 학살과 민중항쟁이 있었다. 4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광주에서 있었던 항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라도 광주에선 전두환 군부 일당들이 총과 칼로 광주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사망자 163명, 행방불명자 166명, 부상 뒤 사망자 101명, 부상자 3139명, 구속 구금자 1589명, 묘비명이 없는 희생자 5명. 모두 5189명이 죽음과 아픔을 당했다. 이는 2009년에 조사된 것으로 점점 그 수는 늘어간다.

그때, 나이 다섯 살인 아이 조천호는 목수 일을 하던 아버지를 잃었다. 8년이 지난 1988년 5월 15일 신문에 죽은 아버지 영정 사진을 안은 아이가 나왔다. 바로 조천호 군과 아버지다. 그 사진을 보고 어린이 글을 썼던 권정생은 편지를 썼다.

경상도 아이 보리문둥이가 광주의 조천호 군에게

 

여기 경상도에서는/5월에 늦게 피는 철쭉꽃을/넌달래꽃이라 부른다

 

우리들 어머니와 누나들이/보리고개를 힘겹게 넘으며/산에 가서 송기와 산나물을 캐면서/새빨간 넌달래꽃을 꺾어 귀밑머리에 꽂으며/고달픈 5월을 견뎌 온 꽃

 

천호야/늦게까지 늦게까지 남아서 피어나던/넌달래는/그 때/1980년 5월에도 피었을 텐데/넌달래꽃 한 가장이 꺾어/너를 달래지 못한 바보같은 동무

 

천호야/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다/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그 곳 광주의 슬픈 눈물을/감쪽같이 그렇게 모르고 있었다

 

벌써 8년이 지난 지금에야/우리는 너의 다섯 살 때 사진을 신문에서 봤다/아버지의 영정을 보듬고 앉은 너의 착한 눈을

 

38년 전/이 땅의 산과 들을 피로 물들였던 6.25가/아직도 끝이 나지 않고/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5월에/목수였던 천호의 아버지를 또 앗아 갔구나

 

미국 서부의 인디언 아버지들처럼/남아메리카의 잉카와 마야의 아저씨들처럼/찢기고 찔리며 죽어간 아버지들/그 때 인디오의 꼬마들도 슬프게 울면서/몸부림 쳤겠지

 

저 뜨거운 아프리카의 정글에서/하루아침 습격해 온 백인들의 쇠사슬에/짐승처럼 끌려갔던 흑인 어머니 아버지들/그 날의 아프리카 정글에서도/천호 같은 아이들이 발을 굴리며 목이 쉬도록 울었겠지

 

천호야/정말 우리는 몰랐다고 말해도 될까/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우리는 텔레비전의 쇼를 구경하고/싱거운 코메디를 구경하며 못나게 웃고 있었다./그 긴 세월 8년 동안을

 

오늘 아침 5월 15일/00신문 17쪽에 너의 사진을 처음 보고/이 날 따라 주일학교에서 부른 찬송가를/건성으로 부르며 가슴 안이 따갑도록 억울했다/천호야

 

우리는 경상도 걷보리 문둥이들이다/속이 다 빈 바보 천치같은 감자바위다/학교에서는 죽어라 시험공부만 했고/그래서 특별한 사람이 되어/돈을 벌고 자가용을 타고 으스대는 꿈만 꾸고/우리들 여기 경상도 아이들/성원이와 재흠이도 너처럼 중학교 1학년이지만/정말 멍청했구나

 

하지만 이제부턴 정신 차릴께/거짓말 잘 하는 어른들/제 나라와 겨레를 팔아 권세 누리는 나쁜 어른들/남과 북을 갈라놓고 싸우게 하고/이제는 또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간 붙이려 하는 구나

 

그러나 천호야/지금 이렇게 늦었지만/넌달래꽃 한 다발 꺾어/너의 가슴에 안겨주면서 약속할게/우리 함께 따뜻하게 참을 나누며/우리들의 슬픈 어머니를 위로하며/저 백두산 꼭대기까지/남북의 아이들 모두가 하나 되어/이 땅의 거짓을 쓸어내고

 

다시는 피 흘리는 일 없이 살아갈 것을

그림책을 보면 아이가 첫 말을 한다. 아빠아~ 아빠아~ 이제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다. 이 책 끝에도 아이는 아빠아~ 하고 애타게 부른다. 아이는 살면서 가장 기뻤던 일은 아빠랑 놀 때라고 한다. 그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다섯 살 난 아이도 죽음을 알까. 아빠를 살아서는 못 본다는 것을 알까. 아빠 사진을 들고 서 있는 아이 눈을 보면 천진스럽기만 하다.

아이는 봄을 맞는다. 아이 아빠는 봄꽃을 참 좋아 했다. 아이는 아빠가 좋아하는 꽃을 따서 주고 싶어 한다. 아이는 투정을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술래가 되어도 울지 않겠다고. 무더운 더위에도 선풍기는 엄마 아빠에게 주고, 자신은 수박을 실컷 먹겠다고. 바다에 가서는 아빠보다 멀리 헤엄을 치겠다고. 아이는 몸이 어서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어른이 되서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비밀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이가 어릴 때 아빠가 잘 놀아주고 업어 주었듯이 아이도 아빠를 업어 주고 싶다고. 하지만 업어 줄 아빠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수채화로 그린 그림은 찬란하고 다정다감하고 오순도순 사는 천호네 세 식구를 보여준다. 아니 강아지까지 네 식구다. 다섯 살 천호는 봄에는 꽃처럼 환하게 웃고 여름에는 수박을 먹고 물놀이를 하며 티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1980년 5월 18일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누가 이 아이에게서 평범하고 아름다운 일상을 빼앗아 갔는가. 아이가 커서 아빠를 업어주겠다는 소박한 꿈을 누가 짓밟았는가. 그 날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죽인 사람들은 뉘우쳤는가.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을 다시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힘이 센 자가 쓴다는 말을 했던가. 1945년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뒤에도 미국을 등에 업고 총칼로 권력을 움켜쥔 자들은 반성은커녕 스스로 배를 불리고 역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몹쓸 짓을 서슴없이 했다. 1980년 5월 광주도 마찬가지다.

권정생 편지에서 보듯이 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사는 선량한 사람들도 죽음으로 내몬다. 한국 조천호처럼 그 나라 아이들도 아버지, 어머니, 누이, 형, 동생을 잃고 애간장이 타는 삶을 산다. 그림책에서는 아이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꿈이 사라지듯이 주황색에서 노랑과 파랑으로 옅어지면서 광주 학살이 있던 날이 잿빛이 도는 옅은 파란색으로 그려진다. 주황색은 광주에서 학살당한 핏빛 같기도 하고, 아이 꿈이 그려진 5월에 피는 진달래꽃 같기도 하다. 옅은 파랑과 노랑은 그래도 꿈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과 노란 나비로 날아가는 아버지를 그리는 듯하다. 하지만 1980년 5월에 있었던 현실은 파란 꿈이 사라지는 가운데 신음하며 죽어가고, 산 자들은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는 피맺힌 목소리로 떠돈다.

이 책 앞면과 뒷면은 노랑과 초록으로 채색된 배경에 호박이 줄줄이 열려 있다. 평화로운 농촌 마을이다. 조천호 군이 이런 아름다운 마을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다시는 뺏기지 않도록 하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권정생의 편지처럼 남과 북에 사는 아이들이 모여서 이 땅을 더럽히는 거짓말을 하는 이들을 싹 쓸어버릴 날이 어서 오기를. 그런 아이들 곁에 함께 있는 어른이야말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 날이 와야 역사는 제대로 쓰여진다.

 

은종복

글쓴이 은종복 씨는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인문사회과학 책방 '제주풀무질'의 일꾼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책과 사회를 또박또박 읽어내려가는 [또밖또북] 코너로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에 독자들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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