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알게 돼

내가 중학생 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은 아니다. 그런데도 간혹 호랑이가 담배 피는 듯한 사건들이 있었다. 학교에서. 그것도 도덕 시간에.

황당한 일이었다. 당시 그 도덕 담당 교사는 시중에 판매되는 모 출판사 문제집을 그대로 베껴 시험지를 만들었다. 지금이라면 큰일 날 사건이겠지만, 그때는 비슷한 일들이 종종 있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갔다. 정보에 밝은 학생들, 성적에 매달리는 학생들만 몰래 챙겼고, 나머지는 관심도 없었다.

1984년 중학교 도덕

나는 성적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시험 대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그럼에도 도덕 교과서를 한 번은 훑었다. 그리고선 문제집의 문제를 풀었고, 부록에 있는 정답과 맞춰 보았다.

그런데 정답 하나가 이상했다. 교과서 내용과 다르게 정답이 표기된 것이다. 당시 그 도덕 교사는 워낙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그 문제집을 맹신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혹시 잘못된 그 정답을 진짜 정답으로 처리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인생 행복을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 뭐 대충 이런 것을 묻는 문제였다. 상당히 주관적일 수도 있는 내용임에도 도덕 교과서는 단정적으로 기술했다. ‘건강’이라고.

크게 잘못된 대답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획일적으로 말할 건 아닌 것 같다. 당시 한국 교육의 수준이 그 정도였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어쨌든, 그 문제의 문제집에는 정답을 무엇으로 표기해 놨을까? 맞다. ‘돈’이었다. ‘경제력’도, ‘물질적 풍요’도 아닌, 그냥 ‘돈’이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교과서에 명백히 기술되어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나 하면서 시험지를 받았다.

불행히도 그 문제가 출제되어 있었다. 살짝 갈등했다. 그래도 나는 교과서를 따랐다. 그런데 채점 결과, 그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 도덕 교사가 ‘돈’을 정답으로 처리한 것이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분 성향을 알기에, 그저 한 문제 정도는 버린다 생각했다.

하지만 반장은 달랐다. 교과서를 들고 교탁 앞에 가서 맹렬히 따졌다. 결과는?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반장의 뺨으로 날아왔다. 그리고는 아주 단호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살아 봐, 이놈들아. 커 보면 알아.”

'제주 제2공항을 반대하는 청소년들'은 8일 오전 11시 제주시청 조형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제청기행)
'제주 제2공항을 반대하는 청소년들'은 8일 오전 11시 제주시청 조형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제청기행)

청소년에게 더 중대한 제2공항 문제

그 도덕 선생님을 비난하자고 쓰는 글이 아니다. 사실 그때는 나름 조숙했다고 그분을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간혹 그 선생님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럴 때면 짠한 마음도 들었다. 궁핍한 시대를 살아오신 세대다. 물론 교사라면 절대빈곤층은 아니었겠지만, 시대적 가난은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적 빈곤은 아니다. 그런데도 돈 숭배가 그때보다 몇 배는 더하다. 그걸 최근 어떤 자리에서 한 고등학생이 지적했다. 지난 6일 서귀포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린 제2공항 2차 도민 경청회 현장이었다.

“제2공항 찬성하시는 분들이 원하는 건 성산에 땅을 사셔서...돈, 돈, 돈 때문이 아닌가요?”라며 흐느꼈다. 그러고선 “당신들이 미래를 망치고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온 겁니다”라고 참석 이유를 밝혔다.

잠깐이었지만 장내에 모든 것이 멈췄다. 고성과 욕설과 비아냥과 조롱이 난무하던 경청회장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다.

무엇이었을까? 이 침묵은. 참석자 모두 심장 한 가운데로 총알이 관통한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지역경제 성장’, ‘일자리 창출’ 등의 단어로 이야기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멈춤’이었다. 고상하지 않은 표현, 날 것 그대로의 표현, “돈 때문”이라는 워딩에 순간 움찔했던 것 같다. 치부가 드러날 때의 당혹스러움, 속마음을 들켰을 때의 얼버무림 같은 게 아니었을까.

제주 제2공항 기본계획안 발표 이후 열린 2차 경청회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진=박소희 기자)
제주 제2공항 기본계획안 발표 이후 열린 2차 경청회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진=박소희 기자)

물론 잠시 후 반격은 시작되었다. 치졸하기 그지없는 어른의 모습으로. 청소년 인권에 대한 무지만을 드러내는 우악스러움으로. 그 학생을 두고 “감성팔이”라는 표현을 쓰고, “청소년들이 여기에 배석하는 게 맞습니까?”라며 따져 물은 것이다. 하지만 그 학생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은 하지 못했다. 본질은 회피한 채, 엉뚱한 시비만 걸었을 뿐이다.

그건 비겁한 짓이다. 차라리 내 중학교 도덕 선생님의 솔직함이 더 나아 보였다. 제자들이 이후에 경제적 궁핍으로 고생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시던.

사실 제2공항의 폐해는 우리 기성세대가 아니라 그 고등학생 세대에게 더 직접적으로 미칠 것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그들의 주장을 더 경청하는 게 옳다.

사회안전망 강화와 문화의 힘으로

“돈 때문.” 맞다. 내 중학교 그 선생님 말씀대로, 살아 보니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다. 그런 만큼 찬성 측 사람들의 마음도 일견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 왜들 그럴까? 내 중학교 시절보다 살림이 넉넉해진 건 사실 아닌가? 그런데도 더 많은 소득을 원한다. 나도 그렇다. 나는 그 이유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 교육비, 노후 대비 의료비, 내 집 마련과 주거비 등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인력 감축의 위협은 코앞에 있다. 임대료는 오르고 장사는 안되니 가게를 접어야 할 형편이다. 자식들은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빈둥거리고 있다. 그러니 지금 더 벌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 특유의 ‘살인적 경쟁’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 미래가 불안하니까.

'제주 난개발 저항 지역연대'는 8일 제주도청 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영훈 도정은 공권력의 구조적 부정의를 타파하고, 갈등지역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사진=박지희 기자)
'제주 난개발 저항 지역연대'는 8일 제주도청 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영훈 도정은 공권력의 구조적 부정의를 타파하고, 갈등지역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사진=박지희 기자)

그런데도 이웃집 아무개는 땅 투기로 넉넉하게 살고 있다. 나라고 그렇게 살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나도 뛰어든다. 너도 뛰어든다. 투기라고 비난하지 말아. 내가 살아야 할 게 아닌가.

하지만 그게 꼭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실제 한국 사회의 개발 역사에서는, 극소수 자본만이 큰 떡을 챙긴다. 나머지는 빵부스러기밖에 없다. 그 부스러기를 얻은 대가로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더 많기도 하다. 제2공항 건설로 망가지는 제주 자연은 회복 불가능이다. 군사기지의 섬 오키나와가 남의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제주에 대재앙이 닥쳐올 가능성이 크다.

돈,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방식의 각자도생으로는 극소수만 혜택을 볼 뿐이다. 같이 살아야 한다. 기본수당 등 사회안전망 강화가 절실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버스를 단계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저가의 영구임대주택도 마련해줘야 한다.

돈이 없는 게 아니다. 이명박 시절, 자원외교와 방산 비리로 날린 돈을 국민 수대로 나누면 1인당 200만 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엉뚱한 곳에 써버려서 문제다. 행정 철학과 의지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사회안전망이 탄탄해지면 미래에 대한 불안도 줄어든다.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굳이 아득바득 돈을 좇지 않아도 된다. 기본적 삶을 국가가 챙겨주기에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그때가 되면 급급하던 생존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이 된다. ‘경제적 존재’를 넘어 ‘문화적 존재’가 된다.

물론 물질적 부가 충분치 않아도 돈 너머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삶의 본질적 의미를 고민할 수 있는 능력이 짐승과는 다른 점이다. 그 힘이 바로 문화다.

백범 김구.
백범 김구.

백범 김구도 ‘돈’보다 ‘아름다움’을 말했다. ‘부강한 나라’보다 ‘문화의 힘’을 강조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 백범 김구의 <내가 원하는 나라> 중에서.

 

 

이영권

역사사회학을 전공하고 《새로 쓰는 제주사》, 《제주역사기행》 등을 저술한 이영권 박사는 제주4.3연구소, 제주참여환경연대 등에서 활동한 바 있고, 일선 학교현장에서 역사 교사로 오랜 시간 교편을 잡았다. 2022년부터 제주투데이 논설위원으로 위촉된 이영권 위원의 칼럼은 매달 두번째 금요일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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