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용어 바로 잡기

기시다 일본 총리가 한국에 왔던 모양이다. 한·일 관계의 새로운 미래가 열릴 전망이라 한다. 그렇게 되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그런데 기시다 총리는 일본제국의 한국 강제 병합을 인정할까?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강제성을 부정한다. 양국이 상호 합의 후 조약에 의해 나라를 합쳤다는 주장이다.

왜 합쳤다는 것일까? 일본은 나름의 논리가 있다. 19세기, 서양 제국주의가 강성해지면서 아시아로 침략해 들어왔다. 아편전쟁으로 아시아 최대 강국인 중국이 절반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건 동아시아 한, 중, 일 모두의 위기였다.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나라를 합쳤다는 것이다. 서양에 맞서기 위해. 구체적으로는 러시아가 첫째 대상 국가였다. 실제 이 논리에 동조한 한국인들도 많았다. 초기 친일파는 그렇게 형성되었다.

그 논리에서 나온 용어가 ‘한일합방(韓日合邦)’이다. 뭐가 문제일까? “한국과 일본이 나라(邦)를 합(合)쳤다”라는 뜻이다. 맞다. 합친 것은 맞다. 그러니 형식만 보면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아니다. ‘강제성’이 보이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대동아 전쟁’도 같은 맥락이다. 동남아시아까지 장악해 가던 일본에 대해 미국 등 서구가 반발하자,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다. 물론 일본은 그 도발을 정당화한다. 서구 침략에 대한 선제적 방어 전쟁이라는 논리다. 당시 동남아시아는 서구의 식민지였다. 일본이 그들을 해방하고 ‘대(大) 동아시아 공동번영’을 이룬다는 논리에서 나온 용어다. 실제 그에 동조한 동남아시아 정치인들도 많았다.

‘한일합방’, ‘대동아전쟁’ 등은 얼핏 보기에 문제가 없어 보이는, 그러나 심각한 결함을 가진 역사용어다. 성찰이 없으면 그런 꼼수 용어에 넘어간다. 친일파나 일부 동남아 정치가들이 그런 경우이다. 본질을 놓치고 정권의 홍보만을 추종한 결과다.

본질을 놓고 보면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 강점’ 혹은 ‘국권 피탈’ 등으로 불러야 맞다. ‘대동아 전쟁’이 아니라 ‘아시아 태평양 전쟁’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식민지 이권을 두고 서양 제국과 일본 제국이 아시아 태평양에서 벌인 전쟁이기 때문이다.

용어 선점을 통한 프레임(frame) 짜기

대한제국의 주권을 상실했을 때, 일제는 서둘러 ‘한일합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 용어의 사용이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그랬다. 지금도 그 용어를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용어 선점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일단 하나의 용어가 선택되면, 사람들은 그 용어를 따라 사고한다. 사람들의 의식이 그 용어가 만든 프레임(frame)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그 용어의 틀 속에서 사고해왔기 때문이다. ‘불행했던 시대에 한국과 일본이 우여곡절 끝에 나라를 합쳤다가 다시 나눈 것이 현대의 역사인데, 왜 한국은 지금까지도 징징대고 있나?’라는 의식 구조다. 그 사고의 틀 안에서는 ‘강제성’을 생각할 수가 없다.

현재에도 그런 용어 선점을 통한 프레임 짜기는 계속된다. 세월호 사건 직후 ‘교통사고’라는 용어를 들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다. 용어 선점을 통해 프레임을 짜고 그 프레임 안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밀어 넣어, 사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였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제주지역본부(본부장 임기범)와 제주주민자치연대(대표 박외순)은 2022년 10월 20일 오후 2시 제주도의회 대회의장에서 '제주기초자치단체 부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사진=박소희 기자)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제주지역본부(본부장 임기범)와 제주주민자치연대(대표 박외순)은 2022년 10월 20일 오후 2시 제주도의회 대회의장에서 '제주기초자치단체 부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사진=박소희 기자)

‘행정체제 개편’ 아니고 ‘기초자치 부활’

요즘 언론을 통해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이라는 용어를 자주 접한다. 이 용어 역시 도민들의 사고를 일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려는 프레임 짜기의 일환이다.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본질을 왜곡하고 도민의 주권을 농락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이 문제일까? 먼저 이런 논의가 나오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자. 가장 공통적인 지적은 ‘제왕적 도지사의 폐단’이다. 도지사 혼자 독단적으로 주권을 행할 수 있는 게 현재의 제도라는 지적이다. 주권이 도지사에게 있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주권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당연하다. 도민에게 있다. 그렇기에 이제 그 주권을 도민에게 돌려주면 된다. 도민에게 주권을 돌려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단순하다. 사회 현안에 대한 ‘결정권’을 도민에게 주면 된다. 시민이 의사 결정에 상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면 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가장 좋다. 그러나 인구 증가로 이제는 실현 불가능이다. 그래서 나온 게 ‘대의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대의제는 답이 아니다. 오직 선거 때만 주권이 시민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 대의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방안이 주민소환, 주민발의 등이다.

또한 어쩔 수 없이 대의제를 채택하면서도 가장 직접 민주주의에 가까운 방식을 모색한 것이 ‘기초자치’다. 원론적 의미의 ‘기초자치’는 ‘기초’라는 말 그대로 ‘작은 단위’에서부터 ‘스스로 통치 한다’ 즉 ‘자기 결정권을 행사 한다’라는 의미다. 동 단위, 면 단위, 읍 단위, 시 단위에서 그 단위를 대표할 사람을 뽑고, 또 그를 견제할 의회 의원을 뽑아 운영하는 제도다.

단위가 작을수록 시민 개개인의 의사가 정책에 반영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이것은 시민 각자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작은 단위일수록 부정부패가 어렵다.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작은 단위의 대표자는 권력자가 아니라 마을의 머슴이다. 이렇게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 제왕적 도지사제도 아래에서 시민 개개인의 권리가 작아졌던 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물론 그 기초의 단위가 읍면동이 될 것인지, 시(市)가 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다. 어쨌든 권력은 나눌수록 시민의 접근성이 커진다. 그리고 그 접근성이 커지는 만큼 시민이 사회의 실제 주인 역할을 할 가능성도 증가한다.

그런데 지금 진행되는 논의는 ‘시민이 주인됨’과는 거리가 멀다. 용어 그대로 ‘행정체제’에 대한 의견 교환만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기초자치단체를 ‘몇 개로 나눌 것인가’, 그리고 ‘동서로 나눌까 남북으로 나눌까’ 하는 형식에만 매몰되어 있다. 세 개든 네 개든, 동서든 남북이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게 ‘주민 자기 결정권’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없다. 민주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어떻게 나누든 시민은 여전히 행정의 대상으로 머물 뿐이다. 주인이 아닌 것이다.

왜 논의가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행정 위주의, 행정 편의를 위해 논의의 틀을 그렇게 잡아놨기 때문이다. ‘행정체제 개편’이라는 용어 선점을 통해서 말이다. ‘어떻게 하면 시민의 결정권이 강화될까’ 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하면 행정 권력을 효율적으로 집행할까’이다. 권력은 스스로 그 권력을 내려놓지 않는다. 도민을 통제하고, 예산을 주무르는 권력을 더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싶을 뿐이다.

행정 위주로 흘러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만든 존 로크와 쟝 자크 루소 모두 ‘입법권을 국가의 최고 권력’으로 규정했다. 행정 이전에 입법권이 우선이다. 그 입법권은 시민이 스스로 법을 만든다(시민 결정권)는 전제 하에 성립된다. 그럴 때 행정은 권력자가 아니라 그 시민 입법에 따른 심부름꾼으로 제자리를 잡는다. 이것이 진정한 주민 자치요, 생활 속 민주주의다.

그런데도 현재 제주사회의 논의는 주객이 전도되어 있다. ‘주민 자치’가 아니라 ‘행정 편의’가 앞에 나선다. 그리하여 ‘기초자치 부활’이 아니라 ‘행정체제 개편’만이 말잔치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별 의미도 없이. 행정체제는 기초자치 부활에 따른 종속 변수에 그쳐야 한다. ‘시민 결정권 강화’가 논의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민이 상시적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기관통합형 영국식 모델(왼쪽)과 미국식 모델. (양덕순 제주대 교수 토론문 발췌)
기관통합형 영국식 모델(왼쪽)과 미국식 모델. (양덕순 제주대 교수 토론문 발췌)

‘기관통합형 VS 기관대립형’ 아니고 ‘권력집중형 VS 권력분립형’

또 있다. 이건 용어 사용의 잘못 정도가 아니다. 그냥 말장난이다. 그런데도 버젓이 회자되고 있다. 새롭게 도입할 기초자치단체의 형태라며 제시한 모델 이름이다. 가장 대표적인 모델이 ‘기관통합형’과 ‘기관대립형’이다. 사실상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며 내놓았다.

그런데 선택을 유도하는 방식이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통합’과 ‘대립’,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보편 정서를 가진 사람치고 ‘대립’이라는 용어를 선택할 자가 있을까? ‘대립’이라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갈등, 분열, 혼란 등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그걸 누가 좋아할까? 그렇기에 내용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기관대립형’은 탈락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역시 그 내용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통합’은 긍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화합’, ‘안정’ ‘번영’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따라온다. 그렇기에 ‘기관통합형’은 선택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 개편을 추진하는 세력의 본심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여론 유도는 너무나 천박하고 질 낮은 꼼수다.

쉽게 말해 기관통합형은 내각제형이다. 의회 의원을 뽑고, 다수 의원을 확보한 당의 의원 중 하나가 행정권력의 수장이 된다. 다시 말해 입법과 행정을 통합하는 것이다. ‘3권 분립’의 사상가 몽테스키외가 들으면 한탄할 방안이다. 아무튼 통합의 결과 집중된 권력으로 효율성을 높일 수는 있다. 하지만 권력 횡포를 방지하긴 어렵다. 그렇기에 ‘기관통합형’보다는 ‘권력집중형’이라는 용어가 본질을 더 잘 드러낸다.

반면 이름만 들어도 반감을 가지게 될 ‘기관대립형’은 지금처럼 의회와 행정권력을 따로 두는 방식이다. 이 경우 입법이 행정을 견제할 수 있다. 그래서 명칭을 ‘권력분립형’ 혹은 ‘권력견제형’으로 바꿔야 한다. 이 모델의 장점은 권력 견제다. 물론 효율성은 떨어질 수 있다. 하기야 효율성만을 따진다면 독재체제가 최고이긴 하다.

진정한 주민자치를 위하여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용어에 따라 본질이 왜곡될 가능성도 크다. 그렇기에 용어 선정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잘못된 용어로 프레임을 짜버리면 논의는 처음부터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용어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권력의 대상이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려면.

몽테스키외가 근대 정치사상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시민권력의 철학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주장의 핵심은 견제와 분권이다. 권력이 쪼개질수록 시민 개개인의 결정권은 커진다. 이럴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요즘 제주사회에서 진행되는 논의도 이런 방향에서 이뤄지길 바란다.

권력은 나눌수록 커지기 때문이다.

이영권

역사사회학을 전공하고 《새로 쓰는 제주사》, 《제주역사기행》 등을 저술한 이영권 박사는 제주4.3연구소, 제주참여환경연대 등에서 활동한 바 있고, 일선 학교현장에서 역사 교사로 오랜 시간 교편을 잡았다. 2022년부터 제주투데이 논설위원으로 위촉된 이영권 위원의 칼럼은 매달 두번째 금요일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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