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 버스 타는 구름』 이승일, 한그루, 2018
『직진 버스 타는 구름』 이승일, 한그루, 2018

직진으로만 운전 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열아홉 살, 운전면허를 따고 아빠 키를 몰래 훔쳐 트럭을 몰았다. 직진만 할 수 있어서 계속 앞으로만 달렸다. 뒤로 갈 수도 옆으로 갈 수도 없었다. 가다가 멈출 수는 있었지만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다. 계속 직진만 했다. 그래도 길이란 곧게 뻗어있지만 어딘가에서는 사람 팔꿈치처럼 방향을 틀어주는 지점이 있어서 로터리를 빙 돌아 다시 집으로 차를 몰고 올 수 있었다. 아빠에게 엄청 혼났으나 기뻤다. 운전을 실컷 했다. 운전면허를 딴 초창기, 잠을 자면서도 운전만 하고 싶었다.  

버스는 대부분 직진한다. 제주도 일주도로 버스도 직진하지만 반원을 그리며 목적지에 닿는다. 이승일 시인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도에서 버스를 타면 직진으로 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제주도의 직진 버스는 제주 풍경을 잘 둘러볼 수 있는 버스다. 바다가 두 팔로 안고 있는 섬 둘레를 버스 타고 나아가는 기분은 어떨까. 구름 기분이겠지. 운전면허를 땄으나 차가없던 초창기 시절은 잠이 들어도 운전만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운전하고 싶지 않다.

버스를 타 둥둥 떠다니는 기분은 구름의 기분이다. 구름의 기분은 어딘가로 여행을 가는 기분이다. 여행을 다니는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다. 스치는 사람이라도 방긋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구름은 여행자와 같다. ‘직진 버스 탄 구름’처럼.

이승일 시인을 몇 번 본 적 있는데 늘 반갑게 인사를 한다. 장애가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는 짧고 굵게 직언한다. 대부분 상대방의 기분 좋게 만든다. 이렇게 선한 말솜씨를 가진 어른이 되기까지 가족의 노력이 얼마나 있었을까, 생각이 들지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어도 더는 하지 않는다. 직진 버스 탄 구름처럼. 그냥 밝게 인사를 나눈다. 방긋 인사한다.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우리는 서로 기분 좋은 말을 한다.

여행은 그동안 냈던 화를 식히는 시간인 것 같다. 그래서 여행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은 밝다. 나처럼 비판 먼저 툭툭 튀어나오는 예술가는 어둡다. 수감자다. 그래서 텁텁하다. 여행하는 눈빛을 가진 시인은 험한 말을 하지 않는다. 험하고 엉킨 풍경을 많이 본 시인일수록 험한 말을 하지 않는다. 험한 말이란, 그 말을 하는 순간 그 사람을 자신이 만든 자리에 묶어 놓는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누구나 금방이라도 갇힌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시집은 장애가 있지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승일 시인이 중산간 마을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시를 쓴 사진 시집이다. 2019년에 문학나눔도서로 선정될 정도로 작품성을 높게 평가 받았다. 시인의 어머니인 고혜영 시인이 아들의 카메라에 든 사진들을 찾아 시집으로 엮었다. 책을 엮으며 아들이 찍은 사진을 훑어보게 되었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명확한 사진들이고 누군가에세 선명한 추억들을 불러 오겠지만 이승일 시인의 카메라에는 무엇을 찍은지 모르는 풍경들도 가득했다. 헝클어지고 어지러진 땅이며 숲의 구석들을 찍은 사진들이 누군가와 더 많은 소통을 하지 못하는 복잡한 아들의 심정을 닮은 듯 해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재작년엔가 나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이 책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동시 창작 수업을 한 적이 있다. 어린이들은 제주도에 이렇게 많은 마을들이 있다는 것을 알까. 제주도 지도를 펼치고 시를 읽으며 이 시집에 나오는 마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사실 시를 읽어도 시 속에 등장하는 단어가 마을 이름인지 과일 이름인지도 잘 모르는 아이들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마을 이름을 글자로만 읽으며 아이들은 초롱초롱해진다. 그 마을로 직진하듯, 그 마을에 대한 풍경을 상상한다.

산양리는 산과 양이 있는 마을이고, 청수리는 총소리가 나는 마을이고, 대흘리는 크게 눈물 흘리는 마을이고, 서광동리는 서광서리 옆 마을이고, 선흘리도 착한 사람들이 눈물 흘리는 마을이고, 금악리는 금이 많이 나오는 마을이고, 어음리는 엉금엉금 마을이고, 저지리는 저지르는 마을이고, 아홉굿마을, 서회천마을, 사려니숲, 하가리, 신풍리, 삼달리, 가시리, 호근리, 보성리, 책을 다 읽고 나면 ‘리’자로 끝나는 이름이 마을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 권씩 이승일 시인의 시집을 받은 어린이들은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찾는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그 풍경에 어울리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어린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된 기분이다. 고등학교 시절 그 소설을 읽고 시를 쓴 적이 있는데 어른이 되면 누군가 호밀밭을 달리다 넘어질 때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책을 내는 사람들은 누군가 넘어질 때 손을 잡아 주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들은 책을 준비할 때는 직진하는 마음으로 달린다. 그리고 책이 묶이면 직진하던 마음이 로터리를 빙 돌아 다시 그의 초심으로 돌아간다. 나는 어린이들에게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책을 건네주는 일이 좋다. 요즘은 그런 일에 직진하고 있다. 제주의 작가 책들을 소개하는 일도 즐겁지만 직진하는 마음으로 제주 작가들의 책으로 수업을 기획해 사람들과 함께 글 쓰는 일이 좋아서 직진 버스타는 구름처럼 그 일을 진행하고 있다.

현택훈, 김신숙 '시인부부'
현택훈, 김신숙 '시인부부'

'시인부부의 제주탐독'은 김신숙 시인과 현택훈 시인이 매주 번갈아가며 제주 작가의 작품을 읽고 소개하는 코너다. 김신숙·현택훈 시인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부부는 현재 시집 전문 서점 '시옷서점'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제주 작가들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다양한 기획도 부지런히 추진한다. 김신숙 시인은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동시집 『열두 살 해녀』를 썼다. 현택훈 시인은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음악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를 썼다. 시인부부가 만나고, 읽고, 지지고, 볶는 제주 작가와 제주 문학. '시인부부의 제주탐독'은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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