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 이후 2022』, 초승 동인 엮음, 한그루, 2022
『초승 이후 2022』, 초승 동인 엮음, 한그루, 2022

“너 스모루 살지? 스모루라는 지명은 숲과 노루에서 왔다더라.” 고등학생 시절 문학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쩌라고, 중얼거렸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범섬에 물이 있다면, 최고의 문인이 태어난다는 풍수가 있으니 문예부 활동 열심히 해라.”라며 다시 말을 걸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또 어쩌라고, 중얼거렸다. 어두운 척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문학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어린 시절 본 노루 눈빛에 대해서 말했다. 마을 사람들한테 쫓기던 노루가 바다로 들어가서 사람들이 놀랐다고 했다. 그런데 그 노루는 한참 멀리 헤엄을 치다가 물이 너무 깊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사람들이 서 있는 쪽으로 기어 올라왔다. 다시 사람들 앞에 선 노루의 그 눈빛을 선생님은 잊을 수 없다고 술회했다.

그 이후로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나뭇잎이 반짝 거리면 노루 눈빛이 떠올랐다. 겉멋으로 어두운 척했으나 절망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빛들이 남실거리던 스모루집에서 읽은 책들은 다 소중하지만 그 중 시집들은 더 각별하다. 정류장에서 내려도 집에 도착하려면 삼나무가 양옆으로 선 외진 길을 걸었다. 200미터 정도 되었을까. 자동차도 다니지 않고 사람도 부딪칠 일 없는 그런 길이었다.

시집을 사서 읽기 시작한 열일곱 살부터 골목에 들어서면 시집을 꺼내 읽으며 걸었다. 시집은 작아서 읽으며 걸어도 길바닥이 어느 정도 보였다. 사람과 부딪칠 일이 없으니 시집을 읽으며 집까지 걸어갔다. 스모루집으로 가는 길은 나에게는 시집 읽으며 걷는 길이다.

대학생이 되어 또 다른 방법을 알았다. 다른 사람의 팔짱을 끼고 한 명은 시집을 낭독하고 한 명은 앞길을 주시하며 귀로 시를 들으며 걷는 방법이다. 그때가 1999년이다. 그 무렵 초승 동인지를 만났다. 동인지마다 젊은 패기가 보였다. 특히 마지막 동인지라고 하면서 “우리는 여기서 '살아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 선언문이 멋있어 보였다. 나도 그렇게 사라지고 싶을 정도였다.

동인지에 실린 작품 중에서 특히 이창이라는 사람의 시가 눈에 더 들어왔다. 내 기억으로 그는 국어국문학과에 다니던 사람인데 내 전공인 철학과 수업도 듣는 모습을 가끔 봤다. 그는 철학에 집중하지 않는 나와 무리들을 조금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신 시를 정말 여러 번 많이, 정말 많이 읽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초승은 내가 속한 문학 동아리 신세대와는 다르게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동인이었다. 1999년 발전적 해체를 선언하며 마지막 동인지를 냈다. 더는 시를 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후 초승 사람들 중에서는 문학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문학 아닌 다른 일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시를 쓰지 않아도 다른 빛나는 무엇인가를 향하여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사라질 줄 알았던 초승이 돌아왔다. 2022년에 다시 동인지를 냈다. 약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무척 반가웠다. 한그루 출판사에 갔다가 우연히 초승 동인을 부활시킨 K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초승 동인지 2022년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나가려는 참이었다. 언니는 대학시절 스모루 우리 집에도 놀러왔고, 니도 언니네 집에 놀러갔다.

우리는 새섬 부근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언니가 내게 자신은 외로운 사주를 타고 났다고 말했다. 이제는 다리가 놓인 그 새섬 근처에 가면 언너의 말과 함께 그날의 안개가 내게 다가온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의 눈은 사슴처럼 맑았다. 불교를 공부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묘한 눈빛이 감돌았다.

 2022년 동인지에서 언니의 시를 읽는다. 언니는 소설도 썼네. 읽다가 식탁 위에 올려놓고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니 시집이 한 마리 노루 같다. 바다로 갔던 노루가 다시 돌아왔다.

현택훈, 김신숙 '시인부부'
현택훈, 김신숙 '시인부부'

'시인부부의 제주탐독'은 김신숙 시인과 현택훈 시인이 매주 번갈아가며 제주 작가의 작품을 읽고 소개하는 코너다. 김신숙·현택훈 시인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부부는 현재 시집 전문 서점 '시옷서점'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제주 작가들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다양한 기획도 부지런히 추진한다. 김신숙 시인은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동시집 『열두 살 해녀』를 썼다. 현택훈 시인은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음악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를 썼다. 시인부부가 만나고, 읽고, 지지고, 볶는 제주 작가와 제주 문학. '시인부부의 제주탐독'은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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