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가 마지막 악장 마지막 음표를 조금 늦게, 조금 세게 연주하는 것처럼!
그것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미 없이 의미 있는 것이다. 반복 없이 한번으로 족한 것이다.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씨.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얼마 전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인터넷으로 접했다. 향년 91세(1928~2020). 그 다음날쯤 뉴스가 하나 추가됐는데, 엔니오 자신이 쓴 부고, 곧 ‘셀프 부고’가 이탈리아 주요 신문들에 발표됐다는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그의 부고문은 신문 부고란의 특성을 감안해서인지 11개의 문장으로 된 길지 않은 글이었다. 부고는 “나, 엔니오 모리꼬네는 죽었다”로 시작됐고 “나는 나의 죽음을 모든 친구들에게 알린다”는 식으로 이어졌다. 엔니오는 부고에서 우선,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알린다. 다음, 친구들과 가족들, 특히 아내에게 각별한 사랑을 보낸다. 그리고 조용한 장례를 원한다고 밝힌다. 이게 내용의 전부다. 

그런데 좀 묘하지 않나? 엔니오 정도의 인물이라면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를 다양한 형식으로 남길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낡은’ 매체인 종이신문을 통해 남겨야만 했을까? 법률 대리인을 통해서 발표하거나 그 흔한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아니면 영화인들의 힘을 빌어 영상으로 알리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을 텐데. 굳이 신문을 택한 이유는 뭘까? 세상에 뚜렷하게 자신의 족적을 새긴 소리의 영역이 아니라 왜 글 곧 문자를 빌어야만 했을까? 그렇다면 그에게 글/문자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런 질문들은 나로서는 일종의 ‘엔니오의 화두’라고 과장해서 이름할 만한 생각거리였다.

호사가의 하릴없는 놀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문학성’은 늘 이런 식이다. 아쉽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나의 문학은 나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그의 문장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르겠다. 그의 문장에서 아무런 비밀도 상징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류의 ‘문학’은 엔니오의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문학’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학 밖에서 찾은 대답은 엔니오의 셀프 부고는 삶에게 건네는 마지막 위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가 마지막 악장 마지막 음표를 조금 늦게, 조금 세게 연주하는 것처럼! 그것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미 없이 의미 있는 것이다. 반복 없이 한번으로 족한 것이다. 스스로의 화두가 이렇게 텅 빈 질문과 대답으로 채워질 때쯤 서평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있었고, 나는 덥석 받아들였다.

앞으로 쓸 서평들은 많이 어설플 것이고 또 모날 것이다. 후안무치에 염치불구여도, 불가항력이다. 다만 외람되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미래의 글들이 아마추어리즘 속에서 속절없이 바둥대던 나의 책읽기와 글쓰기로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위트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문학 장르로서의 서평/비평이 아니라, 꾹 눌러쓰는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 같은 부호였으면 싶다. 엔니오의 문장들보다 길겠지만, 덜 내밀할 것이다. 엔리오의 문장들보다 더 문학적이겠지만, 덜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게라도 세상에 인사를 건네고자 한다. 쓰는 이와 읽는 이,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행운을!

 

'한뼘읽기'는 제주시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조은영)와 삐리용(김용필)이 한권 혹은 한뼘의 책 속 세상을 거닐며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다. 사전적 의미의 서평 즉, 책에 대한 비평보다는 필자들이 책 속 세상으로 산책을 다녀온 후 들려주는 일종의 '산책담'에 가깝다. 두 필자가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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