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람》홍은전, 봄날의책
《그냥, 사람》
홍은전, 봄날의책

쓰는 일과 사는 일은 다르다. 하지만 나처럼 게으르게 읽고 가끔 쓰는 사람도 분명하게 아는 게 있다. 사는 일이 결국 쓰는 일을 이긴다. 서울대 청소노동자들의 싸움이 저 가치 없는 글을 끝내 이긴다.

 

홍은전의 《그냥, 사람》은 지난 하반기 독서 목록 중에서 가장 괴롭게 읽은 책이다.

지난 해 출간된 이 책은 저자가 노들야학을 그만두고 5년 동안의 사적, 공적 체험을 기록한 에세이집이다. 책은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가족을 상실했거나 장애가 있거나 버려진 동물을 돌보거나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제도가 다 보살피지 못하는 자리에서 산다. 사실 그들은 도처에 존재하는 우리들이다. 그러나 이른바 ‘그냥, 사람’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자기 생을 걸고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자기 삶이 싸움의 현장인 사람들인 셈이다. 그래서 홍은전의 문장들은 아프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꿈도 꾸지 못할 자유를 아무 노력 없이 누리면서도 일상의 불편조차 장애인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그들을 격리하고 가두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그는 밤마다 불타는 건물 앞에 서서 살려달라는 딸의 목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처벌 받지 않았으므로 매일 밤 그는 힘없는 부모인 자신을 벌한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위로만 넘치는 사회에서 피해자들은 폐만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글을 읽을 때 나는 엄청나게 분노가 많고, 그 어느 때보다 정의롭고, 문장마다 반성적인 사람이 된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해도 살풍경을 비껴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냥, 사람》은 한 번에 읽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내서 읽었다. 작가가 이미 서문에서 써둔 글 ‘나는 왜 쓰는가’ 때문이다.

“글 속의 ‘나’는 현실의 나보다 더 섬세하고 더 진지하고 더 치열하다. 글을 쓸 때 나는 타인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고 더 자세히 보려고 애쓰고 작은 것이라도 깨닫기 위해 노력한다. 글을 쓸 때처럼 열심히 감동하고 반성할 때가 없고, 타인에게 힘이 되는 말 한마디를 고심할 때가 없다. 글쓰기는 언제나 두려운 일이지만 내가 쓴 글이 나를 조금 더 나를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거라는 기대 때문에 계속 쓸 수 있었다.”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읽는다. 그 사이에 삶이 있다. 쓰거나 읽는 일이 삶을 견인하는 데 모종의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와 다짐으로 그렇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싸움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다. 홍은전은 ‘그냥, 사람’ 정도의 삶을 회복하고 싶은 사람, 끝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는 사람을 우주와 맞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 이유로 그들이 부디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고도 한다.

“싸우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건 세상의 차별과 고통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곧 망할 거라는 징조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입장이다. 나는 그 입장 뒤에 가만히 줄을 선다. 홍은전은 쓰는 것으로, 나는 읽는 것으로 그 싸움을 응원하고 후원한다.

얼마 전 서울대 청소노동자의 황망한 죽음이 알려졌다. 어떤 죽음은 우리가 이뤄놓은 사회적 합의나 상식의 수준이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구체적인 사정들이 있을 것이다. 일단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서울대 청소노동자들이 어처구니 없는 '시험'을 치러야 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학교 식당을 폐쇄하면서 기숙사에서 배달음식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늘어났고, 이로 인해 노동 강도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혼자 감당해야 하는 쓰레기양은 1톤에 달했다는 보도도 전해졌다. 그런 가운데, 학교 건물의 이름을 영어로 혹은 한자어로 쓸 수 있는지, 건물의 개관년도는 언제인지 등등을 묻는 시험지에 답을 써야 했다.

어리둥절함의 절정은 시험을 치렀다는 대목이 아니다. 그 다음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서울대 학생처장인 구민교 교수는 페스이북에 이렇게 썼다. 시험을 보긴 했지만 상위 득점자들을 격려했므로 이 시험이 청소 노동자들에게 모욕감을 주었을 리 없었다고 말이다. ‘정장 또는 남방에 멋진 구두’와 같은 드레스코드가 거론되거나 수첩과 볼펜 등을 지참하지 않으면 벌점을 매긴 일도 있었지만, 갑질의 의도가 아니었다고도 했다. 짐작컨대 그는 이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의 글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이미 죽었고, 그게 비극의 전모는 아니다. 누군가가 죽은 자리가 곧 우리가 사는 자리라는 사실까지 비극의 풍경 안에 들어가야 한다. 누군가는 ‘그냥,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자기 생을 걸고, 누군가는 ‘그냥, 사람’으로 존재하는 게 어떤 것인지 가늠조차 못하고 산다.

구민교 교수는 페이스북의 글을 내렸고, 학생처장에서 물러나 교수로 돌아갔다고 한다. <코리아 아젠다 2017>에서 그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지금 누리는 부와 권력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공중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리 자신보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자에 대한 갑질, 배려와 염치없음, 갑을 관계로 얽힌 삶 속에서 (…) 부와 권력의 세습이 광범위하게 진행하고 개인주의와 집단 이기주의가 판쳐 정치, 사회 공동체 붕괴현상이 나타난다.”

쓰는 일과 사는 일은 이렇게 다르다. 하지만 나처럼 게으르게 읽고 가끔 쓰는 사람도 분명하게 아는 게 있다. 사는 일이 결국 쓰는 일을 이긴다. 서울대 청소노동자들의 싸움이 저 가치 없는 글을 끝내 이긴다.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한뼘읽기'는 제주시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이 한권 혹은 한뼘의 책 속 세상을 거닐며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다. 사전적 의미의 서평 즉, 책에 대한 비평보다는 필자들이 책 속 혹은 책 변두리로 산책을 다녀온 후 들려주는 일종의 '산책담'을 지향한다. 두 필자가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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