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T》
무라카미 하루키, 권남희 옮김, 비채

택배가 왔다. 아내가 주문한 책들이다. 그중에서 눈에 들어온 책 한 권. 《무라카미 T》.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 내용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모아두었던 티셔츠들에 대한 에세이. 헐! 아니, 이제는 하루키의 티셔츠까지 알아야 돼? 하드커버에 박(箔)까지 입힌 양장본이다. 유광 커버에 띠지까지. 본문은 올 컬러. 종이는 고급지 종류. 이렇게까지 만들어야 돼? 책을 주문한 아내에게 물었다. 읽고 욕이나 실컷 할까? 아내가 흘긴다. 욕할 거면 읽지도 마! 쓰지도 마!

왜 그랬는지, 공교롭게도 일본 소설들은 거의 읽지 못했다. 인문 관련 서적들도 몇 권 읽다보니 안에서 부대꼈다. 그 또한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러다 몇 년 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하루키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하루키의 초창기 소설이 좋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마치 철 지난 해수욕장에 온 기분이었다.

순서 없이 《1Q84》와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었다. 하루키가 그렇게 핫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좀 더 읽어볼 요량으로 하루키 책을 주섬주섬 모아두고 있다. 언젠가 읽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소설가 김영하가 말했던가. 책은 사서 읽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것이라고.

《무라카미 T》의 카피 문장은 이렇다. “어쩌다 보니 티셔츠 수백 장. 그러다 보니 에세이 열여덟 편”. 일본 모 잡지에 하루키가 레코드 수집에 대한 인터뷰 도중 “티셔츠 수집 같은 것도 하고 있어요”라는 말이 계기가 되어 티셔츠에 대한 짧은 글을 연재했고 이것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하루키 자신은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런 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 후세를 위한 풍속 자료로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뭐,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이 사소한 컬렉션을 그런대로 즐겨주었으면 합니다.”

겸양이 담긴 문장이지만, 사실을 말하고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책은 티셔츠 사진을 보여주고, 아주 짧은 에세이가 곁들여지는 식으로 구성돼 있다. 에세이의 내용은 단순하다. 특별한 미적 취향이나 사색이 깃들 여지가 별로 없는 글이다. 극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기는 하다. 우연히 중고매장에서 티셔츠를 한 장 샀다. 거기에 새겨진 낯선 이름이 궁금해서 쓴 소설 한 편이 영화화까지 됐다는 게 바로 그 에피소드다. 그 과정에 이름의 주인공이 연락을 해왔는데, 미국 하원에 출마할 당시 만든 선거 홍보용 티셔츠라는 것.

이 에피소드가 유일무이한 드라마틱한 사연이다. 나머지 글들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딱 좋은, 충분히 핫할 그런 류의 컨텐츠다. 엄청난 수의 ‘좋아요’를 기록할 거다. 내가 보장한다!

“티셔츠가 이 정도 있으면 여름이 와도 뭘 입을지 걱정할 일 없고 말이죠. 매일 갈아입어도 여름 한 철 내내 다른 걸 입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작가란 참 편해서 좋군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자 하루키의 마지막 발언이다. 그 마지막 문장은 눈에 밟힌다. “작가란 참 편해서 좋군요.” 작가는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직업이라는 것, 따라서 티셔츠를 마음껏 편하게 입을 수 있어서 좋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긴 표현이다. 작가? 참 꿈꿔 볼 만한 직업이다!

하루키 정도는 아닐지언정 누군들 수집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둘 뿐이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여태껏 이어져오는 유일한 수집은 작가를 수집하는 것. 때로는 책을 사고, 때로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작가를 수집한다. 많은 작가가 그렇게 나의 도서관에서 살고 있다. 그들 중 몇몇은 이미 만났고, 아직 미처 만나지 못한 그러나 언젠가 어떤 인연으로든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작가들과 나는 아주 느슨하게 동거하고 있다.

작가들을 도서관으로 이주시켰다고 해서, 내가 작가들의 주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게 티셔츠랑 다른 점이다. 그리고 주인은커녕 오히려 그 반대다. 작가들은 자신만만하게, 결코 굶주린 표정 없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설 때면 “저기 먼지털이범이 왔다! 오늘은 누군가 맑은 공기를 쐬겠군!”이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이 내가 기억하는 그곳에 여전히 있어서 고맙고, 또 미안하다. 그래서 하는 소리인데, 하루키를 흉내내서 ‘삐리용 B’를 만들어볼까 싶기도 하다. 삐리용의 책! 내 도서관의 작가들을 하나씩 소환해서, 사진을 찍고, 그 책이 내게로 오게 된 연유나 에피소드를 아주 짧은 에세이로 쓰는 것. 가능할까? 아, 작가들이여 미안하다! 티셔츠를 읽었더니 정신이 다 혼미하다. 하루키와 출판사를 벌하라!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한뼘읽기'는 제주시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이 한권 혹은 한뼘의 책 속 세상을 거닐며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다. 사전적 의미의 서평 즉, 책에 대한 비평보다는 필자들이 책 속 혹은 책 변두리로 산책을 다녀온 후 들려주는 일종의 '산책담'을 지향한다. 두 필자가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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