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 '장마(2011)' 앨범 커버.
정인 '장마(2011)' 앨범 커버.

'장마'라는 개념이 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장마의 특징과 형성이 깨지고 여름 내내 잦은 집중호우가 발생됨에 따라 한국형 '우기'라는 개념의 도입을 검토하는 듯하다. 앞으로의 여름엔 수백 년 한국의 여름 기후를 상징해왔던 '장마'보다는 호우나 우기 같은 개념이 보편적으로 사용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세대에게 '장마'란 경험을 통해 취득한 단어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나왔던 '윤흥길'의 소설 <장마>나 가수 정인의 <장마(2011)>가 이름 지어진 배경도 낯설게 받아들일 것이다.

요즘 10대들은 왜 스마트폰의 (수화기를 이미지화 한) 통화 아이콘이 왜 이렇게 생겼는지 모른다고 한다. 문서작성 프로그램의 (플로피디스켓을 이미지화한) 저장 아이콘도 그렇다. 지금은 거의 다 사라져버렸기에 모르는게 당연한 것이다.

가수 거미의 데뷔곡 <그대 돌아오면..(2003)>속에서 '수화기'를 들고 이별한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 김형중의 <그랬나봐(2003)>에서 짝사랑하는 상대의 '이메일'을 알게되고 모니터 앞에서 기다리는 모습이란 새로운 세대에게 상상하기 어렵거나 내가 그리는 그림과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과거에는 보편적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음악에는 남겨져있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린, 또는 사라져가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보려고 한다.

최백호 '낭만의 대하여' 앨범커버.
최백호 '낭만의 대하여' 앨범커버.

1994년에 발표한 (내가 참 좋아하는 노래) 최백호의 <낭만의 대하여>의 시작은 이러하다.

 

"궂은 비 내리는 날 / 그야말로 옛날 식 다방에 앉아 /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술을 좋아하기에 '도라지 위스키'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도라지 향'이 나는 '위스키'일 거라는 막연한 상상이었다. 여러 어르신들과 술 한잔 마시는 자리에서 이 '도라지 위스키'에 대해 물어봤고, 일본 주류 업체에 만든 '토리스 위스키' 이름을 도용해 위스키 향을 입힌 가짜 양주라는 답이 돌아왔다.

'도라지 향'은 커녕 '위스키'도 아니었다니.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이 음악은 내가 생각하는 한국식 어덜트 컨템퍼러리의 절정이자, 낭만에 대해 노래하는 최고의 음악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 멜로우팝의 숨은 진주인 윤영로의 <오늘여행(1992)>이란 음악을 최근 알게 됐다. 이 곡을 자주 듣다가 "삼등 삼등 완행열차"라는 가사가 귀에 쏙 들어왔다. 나에게 '완행열차'란 낯선 기차의 모습이었다. 검색해 보니 '모든 역에 전부 정차하는 열차'라고 한다.

그럼에도 "삼등 삼등 완행열차"라는 게 뇌리에 박혔던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고 좀 더 찾아보니 "아 맞다!" 송창식의 <고래사냥(1975)>에도 이 가사가 나왔던 것. 아마도 이 가사를 차용해 <오늘여행>에 사용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1989년 발표되었지만 지금에도 '기차'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곡, 김현철의 <춘천가는 기차> 역시도 그 당시 '완행열차'였다고 한다. 음악이 배경이 되는 이러한 기차는 이제 일부 노선을 제외하고 사라졌다. 나 역시 경험을 해봤는지 모르겠지만 음악을 감상할 때 그려지는 이미지 속에는 이 '완행열차'가 무언가 생경한 듯하다.

최성원 '제주도의 푸른밤(1988)' 앨범 커버.

낭만의 제주를 얘기하는 대표적인 음악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밤(1988)>의 가사의 일부다.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리 싫어요 / 신문에 티비에 월급봉투에"

흐릿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의 추운 겨울, 종종 아버지는 '월급봉투'에 월급을 받고 오는 길에 호떡을 사 오셨던 기억이 있다. 계좌에 들어오는 숫자로 찍혀 들어오는 월급, 그리고 그것을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는 보편적인 우리네 삶에서 '월급봉투' 역시 흥미롭지만 생소한 단어가 됐다. 당시를 생각해 보면 가사 속 신문은 '종이'신문일테고, 티비는 '브라운관' 티비일테다. 지금에선 보기 드문 생활의 조각들이다.

얼마 전 친구와 경주에 놀러 가다 지금은 폐쇄된 불국사역에 몰래 들어간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지나가는 기차가 없다. 완행열차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곳 역시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그 사람들은 그곳에서의 많은 추억을 마음 속에 남겨놓았을 것이다. 단순한 역사의 보존을 넘어 누군가의 따뜻한 추억을 꺼내놓을 수 있도록 한 사려깊은 마음 역시 담은 것이다.

이렇게 폐쇄된 역사처럼, 음악도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 음악이 갖는 강인한 힘이라고 믿는다. 음악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에 새로운 감정을 내밀어주고,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모습을 다시금 떠올려 추억하고 짙게 색칠하곤 한다.

머리가 희끗해진 언젠가의 나도 분명 <낭만의 대하여>의 화자처럼 될 것이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그러다 희미해진 낭만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무엇이 사라지고 흐릿해지며 대체될까. 그리고 무슨 음악을 들으며 무엇을 추억하게 될까.

 

강영글.
강영글.

잡식성 음악 애호가이자 음반 수집가. 중학생 시절 영화 <School Of Rock(스쿨 오브 락)>과 작은누나 mp3 속 영국 밴드 ‘Oasis’ 음악을 통해 ‘로큰롤 월드’에 입성했다. 컴퓨터 앞에 있으면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컴퓨터과학과 입학 후 개발자로 취직했다가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기획자로 전향. 평생 제주도에서 음악과 영화로 가득한 삶을 꿈꾸는 사람. 한 달에 한 번 제주와 관련된 음악을 이야기합니다. 가끔은 음식, 술, 영화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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