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랜드’라고 불렀던 놀이공원과 제주에 몇 없던 영화관이 있었고, 지하상가와 칠성통과 가까웠던 탑동. 친구들과 쇼핑을 하고, 같이 영화 한 편 보고 나서 타가다(디스코팡팡)를 타고, 동문시장 떡볶이를 먹는 코스까지 도보로 가능했던 그곳은, 초·중학생 시절 나에게는 그야말로 ‘TOP’동이었다.
그러나 영화관은 사라진 지 오래고 놀이공원은 운영하지 않으며 옷도 주로 인터넷에서 구매하니, 성인이 되고 나서의 탑동은 가끔 대형마트를 들르기 위해 가는 곳이거나 친구들과 바다를 보며 맥주 한 잔 부담 없이 노상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매년 여름밤이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끌벅적하게 노상을 하는 활기찬 탑동이지만, 올해 여름은 코로나19로 인해 여태껏 느낄 수 없었던 한산한 탑동일 것이다.
제주 출신 싱어송라이터 ‘강아솔’의 정규 3집 <사랑의 시절>(2018)의 수록곡 ‘탑동의 밤’은 여름밤 한치잡이 배의 등불을 별빛 삼아 함께 탑동의 방파제를 걸었던 사랑의 시절을 이야기한다.
풋풋한 사랑의 설렘과 복잡한 도시에서 잠깐 벗어나 느낄 수 있는 여름밤의 탑동의 낭만을 잘 담은 곡이다. 여름밤 탑동 방파제를 산책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느꼈던 그 정취를 노래하는 곡이니, 쉽게 공감하며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강아솔은 이 곡 외에도 제주의 특정한 장소를 노래했는데, 정규 2집 <정직한 마음>(2013)의 첫 트랙 ‘사라오름’은 마침내 정상에 도달해 시야에 들어오는 산정호수와 푸른 하늘의 모습을 가사 없이 악기로만 표현했다.
한국 재즈의 전설 피아니스트 ‘임인건’의 <임인건 All That Jeju>(2015)의 수록곡이자 강아솔이 노래한 ‘하도리 가는 길’에서는 억새가 보이는 옛길을 통해 하도리로 가는 여정을 따뜻하게 그린 곡이다. 임인건의 이 앨범은 제목과 같이 제주의 다양한 모습을 각각 다른 뮤지션의 목소리로 담은 앨범으로, 재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편하게 들으며 제주의 풍경을 음악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제주 출신 밴드 ‘B동 301호’의 정규 2집 <나는 즐거우십니까>(2009)에 수록된 ‘겨울새벽 탑동에서’은 방파제를 넘어오는 거친 파도와 세찬 바람 그리고 고깃배의 아른거리는 조명의 이미지와 그 속에 고독하고 무기력한 화자의 감정의 사운드를 담은 곡이다.
‘B동 301호’의 중심인 '채동원'은 솔로 활동으로 이전의 음악보다 더욱 철학적인 가사와 허무와 냉담, 염세의 사운드와 멜로디(마치 백현진이 떠오르는 것만 같은)의 EP앨범 <인간의 오후>(2014)를 발매하였고, 또 다른 장소 ‘동문로타리’를 노래하였다. 두 곡 모두 오후 내내 가득했던 활기가 사라져버린 새벽의 그 장소에서 홀로 냉담하게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듯하다.
강아솔의 ‘탑동의 밤’은 여름밤의 사랑스러운 탑동의 따뜻함, ‘B동 301호’의 ‘겨울새벽 탑동에서’는 겨울 새벽의 적적하고 쓸쓸한 탑동의 차가움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나에겐 ‘탑동의 밤’은 초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했던 그 시절의 감정이고, ‘겨울새벽 탑동에서’는 지난 겨울 새벽까지 술을 잔뜩 마신 상태에 적막한 탑동의 모습을 보고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쉰 그 시간의 감정이다. 이렇게 같은 장소여도 시간과 계절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고… 특히 이 두 음악을 통해 극단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지금 이 시국의 탑동의 밤은 어떨까? 여름밤의 낭만적인 탑동보다는 ‘빌어먹을’ 역병으로 인해 이전의 활기는 찾아볼 수 없는, 허무와 우울의 탑동의 밤이 아닐까 싶다. 탑동뿐만이 아니라 제주의 밤 역시 이전 여름과는 사뭇 다른 시기를 겪고 있다. 하루빨리 이 역병이 수그러들어서 이전의 활기와 낭만이 가득한 제주의 밤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 멀리 탑동 앞바다의 한치잡이 배의 불빛처럼 밝고 선명하게 말이다.
잡식성 음악 애호가이자 음반 수집가. 중학생 시절 영화 <School Of Rock(스쿨 오브 락)>과 작은누나 mp3 속 영국 밴드 ‘Oasis’ 음악을 통해 ‘로큰롤 월드’에 입성했다. 컴퓨터 앞에 있으면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컴퓨터과학과 입학 후 개발자로 취직했다가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기획자로 전향. 평생 제주도에서 음악과 영화로 가득한 삶을 꿈꾸는 사람.
한 달에 한 번 제주와 관련된 음악을 이야기합니다. 가끔은 음식, 술, 영화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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