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제주시청 부근에 위치했던 복합문화공간 '겟 스페이스'. 이곳에서는  수많은 음반을 큰 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 (사진=강영글)

지금의 서울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터줏대감이자 시초라고 할 수 있는 40년 역사의 '을지OB베어'는 특정 호프집의 끝없는 욕심으로 비롯된 만행으로 인해 지난 4월 강제집행으로 철거 '당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평양냉면의 강자 '을지면옥' 역시 재개발로 인해 37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지난 6월 영업을 끝냈다.

자본논리에 휘둘려 그 역사를 더더욱 지속할 수 없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다. 두 곳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술을 마시며 많은 추억을 남겼던 곳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최근 을지OB베어 자리에 새롭게 달린 간판 '힙지로 호프광장'을 보면 혐오감마저 들게 된다.

결국 내가 사랑하던 공간은 사라지게 됐고, 그곳에 남겨둔 많은 추억들을 희미하게 바래져간다. 이런 경험은 나이를 하나 둘 먹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당연한 것일까.

2010년대 도남시장으로 가는 길목 모퉁이에 자리했던 인디음악 전문 펍 'B동301호'에서 가수 강아솔씨가 노래하고 있는 모습. (사진=강영글)

(지인들은 잘 알겠지만) 나는 술과 음악을 유별나게 좋아한다. 그렇기에 술과 음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은 나에게 보석과 같다. 각 공간을 지배하는 사장님의 취향에 따라서 발휘되는 공간의 매력은 제각각이다. 그 매력에 흠뻑 취해버리면 쌓여있던 스트레스는 행복감으로 잠시나마 메우게 되고 자연스레 꾸준한 출석체크로 이어진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군 대체 복무로 인해 제주에서 3년간 지내게 된 나는 이러한 공간에서 지겹도록 마시고 들었고 떠들었다. 집과 가까운 제주시청 부근이 활동영역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그 공간이 존재했던 곳을 한 바퀴 쭉 돌아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했고,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 속에서 지속하고 있다.

도남시장으로 가는 길목 모퉁이에 자리했던 인디음악 전문 펍 'B동301호'은 당시 활발히 활동했던 홍대 인디 뮤지션들의 공연도 간간히 열렸던 곳이다. 제주시내의 LP바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운드 시스템을 구축했었던 '제주소년 블루스'와 '아리랑레코드' 사장님이 가게 정리 이후 운영했던 (노가리가 참 맛있었던) '아리랑'까지. 제주 시청 대학로에서 도보 5분 안에 갈 수 있는 곳에 모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이 세 곳은 문을 닫았고, 다른 가게들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자리를 옮긴) 추억의 '어머니 빵집'에서 시청 쪽으로 대로변을 건너오면 또 다른 세계가 열렸다. 외국인 손님 비중이 높았으며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앨범 커버가 눈에 띄었던 '팩토리', 옛날 음악다방 느낌을 그대로 재현한 '올드레코드'는 실제 DJ를 하셨던 사장님의 아재개그와 손님들의 신청곡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지하에 위치한 '겟 스페이스'는 꽤나 큰 규모의 공연이 가능한 공간이었고, 수많은 음반들을 큰 소리로 들을 수 있었던 곳이다. 특히 그곳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의 작은 수고와 꿈들을 하나 둘 심어두었던 곳이어서 더 애정했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도어스'. 정말 지겹도록 다녔던 공간이다. 아리랑레코드 위층에 자리했던 이곳은 미성년자라는 봉인이 해제되면 꼭 가야 할 공간이었다. 사장님과 음악·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고.

이 세 곳은 심지어 서로 가까운 공간에 자리하고 있어 도보 1분이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팩토리'는 이제 운영하지 않는다. '겟 스페이스'는 음악이 주가 아닌 공간이 됐다. '올드레코드'는 간간이 소식을 듣고 있는데 꾸준히 운영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도어스'는 사장님이 바뀌면서 가게의 구조나 음악이 많이 바뀌었는데 젊은층에게 인기가 많은 공간이 됐다.

이 모든 공간이 걸어서 10분 이내에 갈 수 있었으니 음악이 메인이 되는 곳의 밀집도가 홍대-신촌 수준으로 높았던 시기였다. 하루에 다 가기에도 벅찬 그래서 한 장소에서 마시고 들으며 그다음 차는 어디로 갈까 고민도 많이 했었다(결국 여정의 끝은 도어스였지만).

2010년대 제주시청 부근에 위치했던 '도어스'. 필자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받았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진=강영글)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4집 <Dremtalk>의 수록곡인 '다시 가보니 흔적도 없네'는 기억을 쫓아 갔던 공간의 변화를 노래한다.

"하지만 내가 변한 것에 비하면
다시 가본 그곳은 변한 것이 아닌걸 
내가 바뀐 지금을 생각한다면
흔적도 없는 그곳은 정말 그대로인걸"

잊혀지는 공간에서 변화된 자신을 돌아보는 재미있는 곡이다. 음악을 들어보면 사라지고 바뀐 공간의 모습보다 (변함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내가 더 변한 걸까 싶은 생각도 든다.

제주를 가게 되면 위 공간들이 자리했던 곳을 쭉 걸어보게 된다. 많이 바래졌지만 마시고, 듣고, 떠들던 순간들을 추억해 보면 결국 돌아오는 건 아쉬움과 허탈함이다. LP바와 뮤직펍이 젊은 층에게 많은 인기를 받고 있는 지금, 이 공간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그 공간 역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과도한 음주로 인해 숙취와 피로함은 기본값으로 갖게 됐다. 아직까지 갖고 있는 이 습관(?)은 건강을 해치고 일상생활에 무리를 주기에 종종 나 자신이 한심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같은 공간을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과 음악, 그리고 대화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앞으로도 유효하게 작용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앞으로도 이 습관을 유지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성장하고 웃으려고 한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영화 <아가씨>에서 나온 명대사다.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 그 공간과 주인장, 그리고 함께 시간을 나눈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고 싶다.

강영글.
강영글.

잡식성 음악 애호가이자 음반 수집가. 중학생 시절 영화 <School Of Rock(스쿨 오브 락)>과 작은누나 mp3 속 영국 밴드 ‘Oasis’ 음악을 통해 ‘로큰롤 월드’에 입성했다. 컴퓨터 앞에 있으면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컴퓨터과학과 입학 후 개발자로 취직했다가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기획자로 전향. 평생 제주도에서 음악과 영화로 가득한 삶을 꿈꾸는 사람. 한 달에 한 번 제주와 관련된 음악을 이야기합니다. 가끔은 음식, 술, 영화에 대해서도...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