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2일 저녁 한국요리 이자카야(居酒屋:선술집) <기요시>에 혼자 갔었다.

이쿠노쿠 다시마(田島)에 있는데 제주향토요리의 원조 가게이다.
필자의 졸저 중편소설(이쿠노 아리랑)에도 나오지만, 유명한 단골집이어서 뜻밖의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이날도 그런 날의 한날이었다. 60대 부부인 김용팔(金龍八:통명 가나지와 (金澤)씨와 부인 이영자(李榮子)씨를 만났다. 재일동포 2세 분들이다.

십여년전 필자가 민단 사무부장으로 있을 때 민단 주최 제주도 연수에 김용팔씨도 참가했었는데 그때 처음 알았다. 그후 <기요시>에서 우연히 가끔 만났었다.

지난해에 만났을 때 자기 아는 분의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어머님이 정신적 고통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아주 어렵다면서 일본 행정당국에 상담 절차를 아르켜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니 자세한 내용을 조사해서 전화해달라고 명함을 드렸는데 연락이 없었다.

이날 이건에 대해서 물었더니 본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일본 행정 당국까지 상담할 필요 없다고 해서 그만 두었다고 했다.

이러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김용팔씨 차남이 재작년 3월 28일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 차남 이름은 김승홍(金勝弘)씨이며 항년 36세로서 독신이었다.

돌발적으로 일어난 너무 애석한 사고여서 필자가 위로의 말을 드렸더니 부부가 눈물을 흘리면서 지금까지의 심경을 털어 놓았다.

<기요시>마마 강신생((康辛生)씨가 부탁이 있다기에 혼자와서 카운터에서 마시던 필자는 부부가 앉아서 식사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차남에 대한 그분들의 절절한 사연을 도중에서 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작은 아들의 유품을 언제나 갖고 다니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가방에서 꺼내서 보여 주셨다.

사진 몇장과 염주와 도장케이스와 같은 것이었다. <이 속에는 작은 아들의 유골이 들어 있습니다> 필자는 깜짝 놀랐다. 도장 케이스 비슷한 그 속에 유골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사진과 유골 앞에 합장을 했다. 유품이 아니고 바로 차남의 일부분인 유골이었다.

텔레비에서 가끔 유골을 가열시켜 보석처럼 만들어서 목걸이나 반지로 디자인 한다는 방송을 본적은 있었지만 유골을 언제나 지니고 다니신다는 얘기는 처음들었고 보았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돌아가신 분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극치였다.
김용팔씨 부부의 자녀는 2남1녀였지만 지금은 장남과 장녀뿐이다. 자녀는 결혼했지만 연령 관계로 아이들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 차남의 불행한 사고자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면서 계속 눈물을 흘렀다.

오늘도 부부 둘만이 사는 집에서 식사하는 것이 괴로워서<기요시>에 왔다고 한다. 김길호씨가 두분을 다시 울리게 했다면서 <기요시>마마가 진담반 농담반으로 필자를 나무랬다.

일요일마다 나라(奈良)에 있는 산소를 부부가 찾아가니, <승홍이는 기뻐하겠지만 주위 무덤에 잠들어 있는 분들은 질투 할테니까 너무 가지 말라>고 장남이 말하드라면서 들려주는 웃음의 농담이 다시 눈물로 변했다.

주위 사람들은 차남이 배우 이동건씨와 닮았다고 한다기에 다시 사진을 보니 역시 그랬다. 그래서 이동건씨 남동생이 호주에서 칼 맞고 비명에 돌아갔다고 하니 다시 서럽다면서 운다.

2년전 차남이 사망하기전 그대로 그방을 보전하고 있으며 그곳에 상을 차렸다고 한다. <기요시>에서 5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자택이 있다기에 그길로 같이 갔다. 2층에 방이 있었다. 

2년전에 주인없는 방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정도였다. 금방이라도 “다다이마”(지금 왔습니다)하고 차남이 1층에서 올라올 것 같은 분위기 였다.

필자는 향을 피우고 상 앞에서 절을 했다. 교과서적인 위로의 말을 필자는 많이 늘어 놓았지만 언어에 한계를 느끼는 만남이었다.

3월 27일이 2주기인데 고 김승홍씨의 명복과 가족들이 하루빨리 이 슬픔의 블랙홀에서 나올 수 있기를 기원한다. <제주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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