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연주 제공)
다양한 상추를 수확한 모습. 여름철 우리의 밥상을 오래도록 건강하게 지켜준다. (사진=김연주 제공)

올해 야심 차게 상추 농사를 지어봤다. 상추 농사라고 해 봐야 다른 상추 전문 농가에 비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면적이라 어디 명함을 내밀기도 쑥스럽다. 오크상추, 청상추, 꽃상추 등 모종을 사서 심기도 하고 직접 모종을 내서 심기도 하면서 상추 재배의 재미를 느낄 때쯤 ‘내년에도 심으려면 씨앗을 받아볼까?’하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늦은 감이 있었지만 자라고 있는 토종 상추를 잘 관리하여 씨앗을 받으면 내년에는 씨앗을 사지 않고 심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 뿌듯해지고 있었다. 노란 꽃이 예쁘게 피었다. 이른 아침 해가 쨍하고 뜨거워지기 전까지는 노오란 꽃을 보여주다가 한낮이 되면 꽃이 진 것처럼 노란색은 안 보이고 줄기색으로만 보인다. 

아마 꽃잎을 다물어 버리나 보다. 호박도 이른 아침에만 활짝 핀다더니 상추꽃도 그런다는 걸 올해 처음 알았다. 상추 씨앗을 받으려고 상추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모르던 상추의 생리를 하나 더 알게 되었다. 나름 신기하고 뿌듯했다. 

상추는 이제 꽃대가 올라와 한참 씨앗을 키울 때쯤 고수는 씨앗이 영글었던가 보다. 동글동글 씨앗 부분이 거의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큰 대야를 가져다가 쭈욱 훑어 넣었다. 그리고 한번 까불리니 그대로 씨앗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 우연치않게 고수 씨앗은 쉽게 많은 양을 갈무리해 둘 수 있었다. 

그런데 그사이 씨앗이 여물고 베어 말리던 상추 씨앗은 길지 않은 장마임에도 불구하고 바깥구경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썩어서 못쓰게 되어버렸다. 어떤 게 씨앗이고 어떤 걸 까불려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도 상추 씨앗을 받다가 포기했던 것 같다. 제주는 특히 장마철과 정확히 겹쳐 씨앗 갈무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올해 상추 씨앗 받기를 실패하고 나서 더욱 더 상추 씨앗 받는 토종 농민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사진=김연주 제공)
나름 씨앗받기가 쉬웠던 고수! 내년에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해본다. 아자!(사진=김연주 제공)

씨앗 받기 어려운 작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시금치다. 우리네 제사상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올라가니 거의 일 년 내내 찾지만 겨울을 난 봄 시금치야말로 달달하고 제철이다. 좋아하는 나물이어서 씨앗을 받아 농사지어 보겠노라고 몇 번을 시도해 보았지만 시금치는 씨앗이 맺히는 것조차 어려웠다. 

혹 ‘제주 기후에서는 채종이 어려운 작물이어서 그럴 수도 있을 거야’라며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웬걸 대정에 사는 여성농민 친구는 엄청난 양의 시금치 씨앗을 받아 여성농민회 회원 모두에게 양껏 분양해 준적이 있다. 토종 시금치 씨앗도 받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난 한 번도 씨앗받기에 성공한 적이 없다. 

토종농민으로 살면서 많은 종류의 씨앗을 직접 받아서 쓰거나 다른 여성농민에게 분양받아 농사짓고 있다. 씨앗받는 작업의 수고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필요한 만큼만 받고 받아 온 씨앗은 물론 꼭 대를 거듭하여 살아 있는 씨앗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고수처럼 씨앗 받기가 어렵지 않은 작물들도 더러 있다. 잡곡이나 두류, 혹은 서류 등은 우리가 먹는 부분이 다시 씨앗으로 사용되니 따로 무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고추, 상추, 토마토, 배추, 무, 당근 등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씨앗을 받기 위해서는 재배기간만큼의 기간과 노력이 더 필요해진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는 무나 당근의 경우를 보자. 무나 당근은 뿌리를 주로 먹는데 주 수확기인 겨울이 지나면 보통의 밭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요즘은 씨앗을 받아 농사짓는 농민을 보기가 매우 어려워진 탓이다. 종자회사에서 나온 씨앗으로 파종하고 무뿌리만 수확하고 나면 내년 씨앗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씨앗은 내년 파종기에 더 좋은 종자라며 종자회사에서 친절하게도 판매할 테니까. 반면 예전에는 무뿌리 수확을 다 마치고 나서도 무가 밭 한 켠에는 남아 있었고 씨앗용으로 내년 농사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봄이 되면 하얀 무꽃이 만발하였다가 큼직한 꼬투리가 달리고 씨앗이 맺히면 잘 갈무리해 두었다가 내년에 사용하곤 했었다.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빠르면 12월에 무밭을 정리하고 다른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데 반해 무 종자용은 늦으면 5월까지도 밭 한 켠에 남아 있으니 요즘처럼 큰 농기계가 일을 하기엔 여간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다. ‘그까짓 씨앗 종묘상에 가면 언제든 값싸게 구할 수 있는 걸 미련하게 쯧쯧’ 토종씨앗을 이어가는 전국의 여성농민들이 남편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일 것이다. 

깨끗이 갈무리된 토종 상추씨앗.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채종농민에게 보낸다(사진=김연주 제공)
깨끗이 갈무리된 토종 상추씨앗.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채종농민에게 보낸다(사진=김연주 제공)

왜 미련하단 이야기를 감내하며 토종 씨앗을 심고 가꾸고 대를 이어 재배하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재배하는 상추는 그 어떤 상추보다도 맛이 좋아서 일 수도 있겠고, 종자기업에게 넘어간 씨앗의 권리를 농민에 손에 꽉 쥐어 우리의 것으로 지켜내고자 하는 종자 주권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처음 씨앗을 받아 농사짓는 농민이 되겠다는 나의 첫 다짐은 원초적인 이유에서였다. 자연재배를 할 것이고 투입을 최대한 하지말자는 차원에서 씨앗을 사는 비용지출도 최대한 줄이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모두의 이유에 더해 두 가지 이유가 더 있다. 하나의 이유는 토종씨앗이 자연재배에 가장 적합한 씨앗이기 때문이다.

녹색혁명형 농업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전통적인 방식으로 농사 짓고 대물림해 오던 씨앗이므로 투입이 거의 없는 자연재배에 적합한 씨앗은 아마도 토종씨앗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다양성의 문제다. 상추의 경우만 보더라도 봄에 시장에 가면 모종으로 다양하게 나와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하다고 할 수 도 있겠다. 그런데 청상추는 그냥 청상추 한 종류이다. 토종씨앗을 수집한 자료만 보더라도 전국 각지의 청상추는 모양도 맛도 재배 적기도 참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쓴맛이 강하게 나는 것과 쓴맛이 거의 없는 것, 부드러운 것과 약간 질겨 식감이 좋은 것, 추대가 빠른 것과 추대가 늦어 장마까지 먹을 수 있는 것 등 정말이지 다양성의 보고라고 볼 수 있다. 청상추 하나만 보아도 이럴진대 이렇듯 다양한 토종씨앗들을 대를 잘 이어 지역에서 재배되고 식탁에 오른다면 코로나 위기 같은 병약한 삶과는 거리가 먼 건강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연주.
김연주.

전업농이 된 지 3년 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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