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석은 한여름 내내 참외를 훔쳐먹었다. (사진=김연주 제공)
그녀석은 한여름 내내 참외를 훔쳐먹었다. (사진=김연주 제공)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잠을 잘 이룰 수 있어 더없이 좋다. 당근솎기에 바쁜 요즘 밭에서 일하기에는 여전히 땀을 많이 흘리게 되지만 잠자리에선 두툼한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며 행복한 미소를 나도 모르게 짓게 된다. 

이런 날씨가 시작되면 보리차가 맛있어진다. 달콤한 봉지커피도 더 맛있어지고 작두콩차를 찾는 소비자도 하나 둘 늘어간다. 올해는 작두콩을 하나도 수확하지 못했으니 이런 날을 즐길 다른 차를 더 준비해 두어야겠다. 작두콩만이 아니라 땅콩도 한 알을 건지지 못했으니 수확 철을 맞아 조금 억울한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 농사를 거들기도 하고 때때로 방해도 하는 자연과 바람과 여러 가지 생명들에 대해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고 싶어진다. 유독 비가 많았던 올해는 열매들이 모두 부실하다. 작두콩도 수정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콩꼬투리가 수확하기 민망할 정도로 듬성듬성 열려 내년 씨앗이나 제대로 마련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정도이고, 콩이나 동부류도 줄기만 무성하고 열매를 거의 달지 못했다. 

몇 년째 콩 농사는 거의 폐작 수준이다 보니 내년부터는 독한 마음먹고 하지 않으리라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있다. 고구마도 올해 유독 줄기가 무성한 걸 보니 알은 영 부실할 게 뻔해 보인다. 내 조그만 당근 밭은 파종을 하면 비가 와서 잠기고 또 파종하면 비가 또 와서 잠기는 바람에 3번 파종하여 크기가 다른 3종의 당근이 사이좋게 자라고 있다. 당근을 파종하고 스프링클러를 돌리지 않은 유일한 해로 기록될 듯하다. 비야, 비야, 적당히 내려다오.

올해 나를 충격에 빠뜨린 최고의 작품방해상은 땅콩을 알뜰히 수확해 간 그 녀석에게 주고 싶다. 옆 밭 삼촌이 “땅콩 해먹지 못헌다” 할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방제를 하면 되겠지’하고 생각하고 호기롭게 넓은 면적에 땅콩모종을 심었다. 

그 녀석의 습격을 받은 토종먹골참외. (사진=김연주)
그 녀석의 습격을 받은 토종먹골참외. (사진=김연주)

몇 년의 경험으로 미루어 땅콩은 익을 때쯤 꿩 방제를 하면 되었다. 끈을 반짝이는 것으로 여기저기 달아주면 꿩은 무서워서 인지 거의 접근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웬걸. 반짝이 끈을 달아주고 한참을 괜찮았는데 땅콩이 여물기 시작하자 하루 이틀 사이에 땅콩 밭을 초토화 시켜버렸다. 

수확할 기력조차 없게 만들어 그냥 포기하고 두었더니 정말이지 알뜰하게 수확해 가버렸다. 비가 많이도 내리는 중이었는데 입구 쪽으로 녀석들이 다녔음직한 길목에 길도 만들어 놓았다. 육중한 몸이 바지런히도 나다녔는지 길이 선명하다. 

옆 휴경지로 이어지는 돌담을 넘어 어딘가에 살고 있는 녀석이다. 한여름 내 참외를 훔쳐 먹었던 그 녀석들인 것 같다. 그 녀석들이 이곳에도 살고 있다니. 내년부터는 절대로 땅콩농사는 안 지을거다. 그래도 얘들아 내년에는 제발 내 것도 남겨둬 다오.

몇 해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수수를 수확하기 며칠 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밭을 둘러보았다. 알이 튼실하게 여물어 며칠만 더 기다렸다 수확하면 맞춤하게 잘 여문 수수알곡을 수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통통하게 여문 알곡을 수확할 생각을 하니 더 없이 뿌듯했다. 며칠 후 수수를 수확하려고 여러 가지 장비를 준비하고 밭에 가 보고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많던 수수알곡은 한 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몇 알 남아 있는 것 마저 알뜰하게 몇몇 참새들이 남아 쪼아먹고 있었다. 그 후로 수수농사를 짓지 않음은 물론이다. 

참외를 그 녀석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한 알, 한 알 양파망을 씌워놓았다. (사진=김연주 제공)
참외를 그 녀석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한 알, 한 알 양파망을 씌워놓았다. (사진=김연주 제공)

해를 거듭할수록 농사는 쉬워지기는커녕 더 어려워만 간다. 몇 해 되지 않는 농민 경력이지만 올해 처음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어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한 해였다. 그동안은 자연재배를 한다고 방제도 하지 않고 묵묵히 풀을 매며 조금씩이지만 수확되는 농산물에 감사하며 살아왔건만 올해처럼 내 몫을 남김없이 싹 다 가져가버리는 상황에선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른다. 해를 거듭할수록 하나씩 둘씩 파종할 작물들이 줄어들고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 저런 농법들을 고민하게 된다. 

우리 동네 길을 가다 빨간 양파망을 뒤집어 쓴 수수를 보면서도 내 참외가 생각나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 참외도 익어 갈 무렵이면 단내를 맡은 작은 벌레들이 껍질부터 야금야금 흠집을 내어가며 알뜰하게 먹어치운다. 귀신같이 알아채 익은 것들만 먹는다. 양파망을 씌워 놓으면 그나마 나은데 참외 한 알, 한 알 양파망을 씌웠다 벗겼다하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이런 힘든 작업을 할 때면 늘상 하게 되는 고민이 ‘내년에도 해야 하나?’ 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드는 또 다른 생각은 ‘내 욕심이 커졌나?’이다. 더 많이 수확하려는 나의 욕심이 결국 이런 사단을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여러 작물을 심었을 때는 이런 일들이 드물게 일어났으니 밭 하나 가득 참외를 심어 참외를 많이 수확하고자 했던 나의 욕심탓도 분명 있었을 테다. 시원한 가을 바람이 찬바람으로 바뀌기 전에 보리차나 장만해 두어야겠다. 따뜻한 보리차를 음미하며 더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김연주.
김연주.

전업농이 된 지 3년 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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