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지 불과 2년 후인 1813년 12월 3일, 서북지방과는 수만리 떨어진 제주에서 하마터면 다시 반란이 벌어질 뻔했다는 제주목사 김수기의 장계(보고서)가 도착했을 때만해도, 미리 그 무리를 잡아서 찍어 누른 일에 대해 조선정부는 매우 흡족해했다.

장계에 따르면 무리의 주모자인 양제해는 발칙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과거 탐라국을 세운 양을나의 후손인 자신이 홍경래의 난에 자극을 받아 관리들의 횡포와 무거운 세금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삼별초의 난에서 김통정이 했던 것처럼 제주에 별국을 건설하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조정에선 이 사건을 자세히 조사하고 엄중한 조치를 내리기 위해 찰리사를 제주에 내려 보냈다. 찰리사 이재수는 관련자 47명 중 2명을 효수형에 처하고 10명은 유배형, 10명은 보석, 나머지 25명은 석방하였다. 그리고 맨 처음 이 사건을 고발한 윤광종은 그 공을 인정받아 명월만호에 올랐다.

복원된 제주 목관아의 주요건물인 연희각은 동헌이라고 하여 목사의 집무와 재판이 이뤄진다. 양제해를 비롯해 반란음모죄로 체포된 사람들은 동헌 앞에서 판관, 정의현감, 대정현감의 입회아래서 주리틀기, 곤장치기, 칼씌우기 같은 고문을 받으며 시나리오대로 허위자백을 강요당했다. (사진=고진숙)
복원된 제주 목관아의 주요건물인 연희각은 동헌이라고 하여 목사의 집무와 재판이 이뤄진다. 양제해를 비롯해 반란음모죄로 체포된 사람들은 동헌 앞에서 판관, 정의현감, 대정현감의 입회아래서 주리틀기, 곤장치기, 칼씌우기 같은 고문을 받으며 시나리오대로 허위자백을 강요당했다. (사진=고진숙)

그런데 미리 반란모의를 제압한 제주 목사 김수기와 제주목의 2인자인 판관에겐 상을 주긴 커녕 파직처분을 내렸다. 이유는 사건 처리 과정이 말도 안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엄연히 경국대전에 의해 통치되는 법률국가였다. 3심제도가 보장된 조선에서 고작 지방수령이 조사과정에서 양제해를 비롯해 지도자급 6명을 혹독한 고문과 매질로 죽여 버린 것은 직권남용이었다.

특히 민란의 경우에는 주모자급 장두를 제외하고는 아량을 베푸는 것이 관례였기에 조정에서 ‘어리석은 백성을 함부로 죽여 민심을 동요시키지 말라’는 당부까지 한 마당이었으니 더욱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재수는 사건을 마무리한 후 조정에 장계를 올려서 이번 사건의 원인은 제주도내 아전들이 상찬계라고 하는 당을 만들어 무리하게 백성들을 학대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중앙정부에서도 앞으로 또다시 반란의 빌미를 제공할지도 모르는 붕당을 제거하라고 제주목사에게 명령한다.

이렇게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대로 ‘양제해가 무리를 모아 제주도내 관원들을 살해하기로 하는 등 거병을 꾀하다 자신을 포함한 8명이 죽은 모반사건’으로 역사에 남을 뻔했다.

그러나 운명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소용돌이 쳤다. 시작은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로부터였다.

강진에서 정약용은 18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이들을 다산학단이라고 한다. 그 중에 강진사람 이강회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다산의 제자가 된 후 과거시험을 통해 입신양명하길 포기하고 해양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부강한 나라가 되려면 바다를 경영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벗어나 강진을 떠난 직후인 1818년에 이강회는 바다에서 표류하다 필리핀, 오키나와, 중국을 거쳐 돌아온 문순득이란 이가 우이도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만나러 갔다가 뜻밖에도 서쪽 섬 흑산도에 제주 사람이 유배를 와 있으며, 흑산도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전과도 마음이 통할만큼 인품이 높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강진은 과거 탐진이라고 해서 탐라국 사람들이 뭍으로 갈 때 배를 부리던 나루터란 이름이 있을 만큼 제주와는 관련이 깊었다. 해양강국을 만들려면 제주도야 말로 그 중심지라야 한다는 생각에 이강회는 배를 타고 흑산도에 가서 유배 온 제주사람, 김익강을 만난다.

흑산도에서 정약전이 장창대란 어부를 만나 <자산어보>를 지었듯이 이강회는 김익강을 만나 <탐라직방설>이라는 제주관련 인문지리서를 만들어낸다.

이 책의 말미에 이강회는 생뚱맞은 논픽션하나를 첨가했는데 그것이 <상찬계시말>이다. 이름 그대로 상찬계라는 조직의 전모를 밝힌 것으로 내용은 양제해 변모사건의 진실이었다.

칼을 쓰고 앉아있는 양제해의 모습을 표지로 하여 도서출판 각에서 발간한 '탐라직방설' . 제주의 지역문화사연구가인 현행복이 일본 교토대 하합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탐라직방설' 필사본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했다.
칼을 쓰고 앉아있는 양제해의 모습을 표지로 하여 도서출판 각에서 발간한 '탐라직방설' . 제주의 지역문화사연구가인 현행복이 일본 교토대 하합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탐라직방설' 필사본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했다.

강진은 제주에서 오는 배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평소 이강회는 제주의 항우장사라고 불리는 양제해가 누군가 궁금했었다. 왜 제주 사람들은 반란을 꿈꾸다 뭐 해보지도 못하고 자신은 물론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벌을 받은 양제해를 그토록 추앙하는가. 그 의문이 김익강을 통해서 비로소 풀렸다.

김익강에게 들은 사건의 진실은 이랬다.

당시 44살이던 제주목 중면 거마촌 -지금의 아라2동 걸머리마을 사람인 양제해는 글을 읽을 줄은 몰랐지만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강직한 사람이라 중면 향소의 수장인 풍헌에 올랐다. 향소(유향소, 향청)는 수령을 감시하고 아전들의 횡포를 막는 일도 하고, 지역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나 민원들을 직접 처리하기도 하고 관아에 올려 처리하도록 돕기도 하는 지역자치기구였다.

좌수, 별감, 풍헌, 약정 같은 향소의 지도자들을 향관이라고 하는데 제주목 중면 사람들은 자기 지역의 향관인 양제해에게 상찬계의 횡포로 인해 제주사람들이 피가 마른다고 호소했다.

조선은 경국대전에 의해 다스려지는 법치국가였는데, 정부에서 품계를 받은 공식 공무원을 제외하고는 신분도 보장되지 않았고, 심지어 봉급도 없었다.

따라서 정부의 경계가 느슨한 지역에서 아전들은 직위를 세습하고 인정이라고 하여 정부에서 허가한 방식의 약탈을 일삼아왔다. 인정이란 그야말로 나랏일을 돕느라 고생하니 인정이나 베풀어주십쇼,하고 일처리를 할 때마다 요구하는 일종의 봉사료였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 인정이 넘치는 나라가 되어, ‘공물은 꼬치에 꿰고 인정은 바리에 싣는다’고 할 만큼 사회문제가 되었다.

동헌에서 제주목사가 아전의 도움을 받아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제주 목관아 내에 복원해놓은 것이다. 제주에는 목사, 판관, 현감, 교수 등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임명한 관리와 이들을 도와 문서작성부터 잡무를 처리하는 아전(서리) 그리고 지역자치기구 지도자인 향관, 이렇게 세 가지 권력구도가 존재했다. 그런데 상찬계를 조직한 아전은 제주목사가 임명되는 그 순간부터 한양에서 뇌물을 바치며 포섭하는 등 치밀하게 제주사회를 지배하는 이너써클로  오래도록 군림한다. 찰리사 이재수도 그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보여지는 잘못만 바로잡고 말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재수는 제주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사진=고진숙)
동헌에서 제주목사가 아전의 도움을 받아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제주 목관아 내에 복원해놓은 것이다. 제주에는 목사, 판관, 현감, 교수 등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임명한 관리와 이들을 도와 문서작성부터 잡무를 처리하는 아전(서리) 그리고 지역자치기구 지도자인 향관, 이렇게 세 가지 권력구도가 존재했다. 그런데 상찬계를 조직한 아전은 제주목사가 임명되는 그 순간부터 한양에서 뇌물을 바치며 포섭하는 등 치밀하게 제주사회를 지배하는 이너써클로 오래도록 군림한다. 찰리사 이재수도 그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보여지는 잘못만 바로잡고 말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재수는 제주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사진=고진숙)

제주는 인조 때 출륙금지령*이 내려지면서 고립된 섬이었고, 외지에서 오는 관리라곤 혈혈단신 들어오는 제주목사 하나뿐이니 그를 구워 삷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오직 향관들만이 문제였지만 제주목사의 힘을 넘을 수 없었다.

결국 자신들이 가진 밤톨만한 권리를 한라산만한 권력으로 바꾸기 위해 어느 아전의 건의로 300여명이 똘똘 뭉쳐 상찬계라는 조직을 만들어냈다. 대략 1790년 무렵으로 이때는 출륙금지령이 일부 해제되어 상업활동이 가능해진데다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자유로운 상업활동이 이뤄지면서 제주도를 오가는 상선들이 많았다. 그만큼 아전들이 털어먹을 이권이 커졌고 상찬계의 힘은 하늘을 찌를 기세가 되었다.

이들은 신분이 높아질 가능성이 없는 만큼 돈을 신이라 하며 오로지 돈만 숭배했다. 세금을 거둘 때 인정을 바리바리 챙기는 것 정도는 애교였다. 온갖 명목의 벌금을 매기고, 뇌물을 챙겼으며 형벌을 제멋대로 조작했다.

인사권에도 개입했다. 1794년 갑인년 흉년은 제주에 ‘갑인년 흉년에도 물은 넘쳤다’는 속담을 남길 만큼 지독해서 김만덕이 구휼미를 베풀어 이름을 남긴 때이기도 했지만 사망자가 속출해서 호적을 새로 만들어야 할 형편이었다. 이것을 이용해서 자신을 거슬렸던 사람을 비천한 신분인 목자(말테우리)로 떨어뜨려 그 딸이 비관자살한 일도 있었다.

이를 두고 이강회는 이렇게 말했다.

‘신(神), 즉 돈을 모으는 방법은 촘촘하기가 체의 구멍과 같고 좁기가 가죽 구멍 같으며 넓기로 말하면 성문과도 같아서 아무리 작은 것도 빠뜨리지 않고, 제 아무리 커도 벗어날 길이 없었다.’

견디다 못한 제주목 중면 사람들이 모여 주민대책회의인 향소모임에서 등소, 즉 집단민원을 제주목사에게 올릴 때 장두로 나서줄 것을 양제해에게 요구했다. 양제해는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차차 어찌할 지 계획을 세워보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그런데 그 자리에 윤광종이 있다가 즉시 김재검에게 알렸다. 윤광종은 상찬계 쪽과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김재검은 상찬계의 실질적 우두머리였는데, 일이 심상치 않다고 여겼다. 양제해와 김익강은 향관을 여러 번 지내며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 상찬계에서 둘을 포섭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었다. 그런 그들이 본격적으로 상찬계를 공격하려 한다면 상찬계는 위험에 빠질 터였다. 뇌물로 무마할 수 없다고 생각한 김재검은 역공을 생각해냈다. 즉시 계원 무리를 모아 목관아에 들이닥쳐 양제해 일당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이미 제주목사나 판감, 현감 따윈 상찬계의 품에서 놀아난 지 오래었다. 그 밤에 양제해와 주민대책회의 참가자들이 체포되었고, 제주목사는 정부에 반란을 모의하던 역도들을 잡아들였다는 장계를 올렸다. 물론 모든 각본은 김재검이 만들어낸 대로였다.

이들은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양제해를 비롯해서 6명에게 쉴 새 없이 곤장을 때려 결국 죽게 만들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양제해의 장인인 김익강의 운명도 풍전등화였다. 향소의 별감을 5번이나 지내고 수장인 좌수도 거친 사람으로 양재해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진 그가 바른 말을 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목사는 기필코 김익강을 고문으로 죽일 작정으로 곤장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곤장 치는 사람이 끝까지 거부하는 바람에 이웃 정의현에서 사람을 데려다 곤장을 쳐야만 했다. 옥에 갇혔을 때도 옥졸들이 수령의 눈을 피해 칼을 느슨하게 하였다. 칼을 조이면 곤장을 맞다가 까딱하면 목이 잘려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할머니들은 몰래 빙떡이나 엿 같은 음식을 들여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그를 돕는 사람들이 있어 추운 겨울에 72여일을 버티며 죄를 부인한 끝에 살아남았다.

마침내 찰리사 이재수가 도착하였고, 제주 목사 김기수가 길길이 날뛰며 글도 모르는 양제해 따위가 아니라 진짜 주동자는 김익강이라고 했지만 조사 결과 증거가 없었다. 이재수는 그에게 반란죄를 물을 수 없고, 단지 사위의 반란 모의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를 물어 멀리 흑산도로 유배를 보냈다

이것이 ‘양제해 반란 모의 사건’의 진실이었다. 즉 양제해 반란 모의사건은 사실은 상찬계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은폐조작사건이었던 것이다. 이강회는 이 사실을 혼자 알고 있을 수 없다고 여겨서 <탐라직방설>의 말미에 덧붙였다.

약 200년 후인 2008년 일본에 교토대에서 소장중이던 <탐라직방설>에 수록된 <상찬계시말>이 발굴되면서 영원히 묻힐 뻔 했던 상찬계의 어두운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양제해의 고향인 아라동에 있는 양제해의 묘. 묘비는 5대손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유향별감 양공제해’라고 새겨져있다. (사진=고진숙)
양제해의 고향인 아라동에 있는 양제해의 묘. 묘비는 5대손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유향별감 양공제해’라고 새겨져있다. (사진=고진숙)

제주 최초의 향토사학자 김석익은 일제강점기때 쓴 <탐라기년>이라는 탐라의 역사 저술에서 제주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어오던 윤광종과 김재검의 말로를 전했다.

양제해를 고발한 공로로 명월만호가 된 윤광종은 말에서 떨어져 죽었고, 그 무덤마저 성이 무너져 짓눌렸다고 한다. 사건을 조작하는데 앞장선 상찬계 인물인 김재검의 자손들 역시 잘못된 죽임을 당했다. 제주인들은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믿었다. 하늘은 바른 길을 간다고 믿는 것이 제주 사람들만의 독특한 복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탐라직방설>의 발견으로 새로운 진실이 밝혀진 후 제주에서는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걸고 상찬계에 맞서려고 했던 양제해에 대한 추모를 시작함으로써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출륙금지령: 조선시대 제주는 왜구에 시달리고 감귤,전복,말 같은 특산품 진상에 억눌리면서 육지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1629년(인조 7) 8월 13일 조선 정부에서는 제주도민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인 출륙금지령을 실시 대략 200년간 유지된다.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올해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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