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0년 6월. 삼별초가 난을 일으켰다. 멀고 먼 강화도에서 벌어진 일은 탐라국을 뒤흔들었다.

무신정권이 마침내 무너지고 개경으로 고려정부가 환도를 결정하자 삼별초는 말하자면 초개와 같이 버려졌다. 초개란 제사에서 신의 모형으로 만들어 받들어지지만 제의가 끝나면 버려져서 아무나 짓밟는 존재란 뜻이다. 고려 유일의 엘리트 군사집단으로서의 자부심이 땅바닥에 떨어졌으니 고려정부가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 해체할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대몽항쟁의 유일한 정예군으로서 탄력을 받아 나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결과는 역사가 알려주는 것과 같다. 그들은 강화도를 탈출하여 진도로 갔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고려의 정통정부를 천명했다. 고려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왕위에 올려 황제라 불렀고 일본에 사신도 보냈다. 진도에서 배가 닿는 모든 곳은 곡창지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바닷길로 개경을 향하던 조운선을 격파해서 쌀을 빼앗아 왔고, 일본원정을 준비하는 몽골의 배를 습격해서 부쉈다. 행정관리들을 납치했고,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기술자들도 데려왔다.

진도는 입지가 좋았고 오래전부터 왕궁을 지어 야심을 준비해온 곳이긴 했지만 육지와 너무 가까웠다. 삼별초 정부로서는 제주도를 손에 넣어 보다 더 탄력적으로 대응하고 싶어했다. 이를 눈치 챈 고려정부에서는 가까운 곳의 장수인 영암부사 김수와 고여림을 제주로 보냈고 바닷가 앞에 돌담으로 환해장성을 쌓으며 대비했다.

애월환해장성 에 의하면 제주의 환해장성을 고여림이 병사 1천명을 거느리고 삼별초를 방비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적고 있다. 두 사람이 거느리고 온 병사는 달랑 270명이었으니 탐라국 사람들을 동원해서 삼별초가 들어오리라 짐작된 포구인 애월에서부터 환해장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제주 고씨 족보에 의하면 고여림은 제주성주, 즉 성주가문의 수장이었다. (사진=고진숙)
애월환해장성 에 의하면 제주의 환해장성을 고여림이 병사 1천명을 거느리고 삼별초를 방비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적고 있다. 두 사람이 거느리고 온 병사는 달랑 270명이었으니 탐라국 사람들을 동원해서 삼별초가 들어오리라 짐작된 포구인 애월에서부터 환해장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제주 고씨 족보에 의하면 고여림은 제주성주, 즉 성주가문의 수장이었다. (사진=고진숙)

고여림은 야별초 지휘관으로서 무신들 사이의 권력다툼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권력다툼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제주 성주가문이 왕자 양호에게 밀려난 이유일 수도 있겠다. 그 사이를 비집고 제주 왕자 양호는 쿠빌라이 칸을 만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직후, 강화도의 상황은 급변했다. 고여림에겐 천만다행으로 무신정권은 몰락했고 지금의 차관급인 시랑에 오른다.

삼별초가 난을 일으키자 고여림은 그들과 결별, 고려정부군 장교가 되어 진도공격에 나섰지만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때 삼별초가 제주를 눈독 들인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사병 70명을 이끌고 제주로 간다. 곧이어 영암부사 김수가 관군 200명을 이끌고 건너왔다.

1270년 11월, 명월포(한림읍 옹포리)에 이문경이 이끄는 삼별초의 별동대가 닻을 내렸다. 별동대는 동쪽으로 진출하여 동제원에서 관군과 맞섰다. 삼별초는 고려 역사상 가장 뛰어난 특공부대였다. 뒤로 물러날 자리가 없었기에 죽기 살기로 싸웠다. 싸움은 치열했지만 결과는 삼별초군의 승리였다. 이에 대해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종 11년 진도의 삼별초군이 제주를 공격해서 함락하는데 성공한 것은 제주민의 도움 때문이었다.’

동제원터 표지석 동제원은 조천포구와 제주성 사이에 있었던 관원들을 위한 숙소이다. 고여림과 김수의 군사들은 이곳에 주둔하다가 이문경이 이끄는 삼별초 별동대와 전투를 벌여서 대패했다. 사진=부경혜 제공
동제원터 표지석 동제원은 조천포구와 제주성 사이에 있었던 관원들을 위한 숙소이다. 고여림과 김수의 군사들은 이곳에 주둔하다가 이문경이 이끄는 삼별초 별동대와 전투를 벌여서 대패했다. (사진=부경혜 제공)

제주 사람들은 왜 삼별초를 도왔고, 그들은 누구일까? 관군은 고려정부군과 고여림의 개인사병 즉 성주가문의 군사들이었다. 탐라국 사람들은 이 둘로부터 지긋지긋하게 착취당하고 핍박받아왔다. 그들에게 삼별초군은 해방군인 셈이니 돕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그런데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삼별초 별동대의 칼날은 양호를 향했다. 양호는 쿠빌라이 칸에게 100척의 배를 지어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것을 통해 탐라국이 세계사의 격전 속에서 한몫을 챙겨 독립을 꿈꾸던 왕자였다. 몽골이라면 칠색 팔색한 삼별초는 양호를 죽였다. 참으로 허무한 결말이었다.

그때 정부행세를 하는 삼별초를 가만 둘 수 없었던 개경정부와 일본원정의 발목을 잡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몽골은 연합군을 만들어서 진도를 공격했다. 대규모 여몽연합군에 의해 삼별초정부는 궤멸상태에 빠졌다. 1만명의 넘는 군사와 지도자 배중손, 그리고 명목상으로나마 왕으로 추대된 왕온마저 잃은 삼별초 잔여병은 분노와 무력감을 안고 다음 목적지 제주로 향했다.

하급무관인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군은 제주에 자리를 잡았지만 진도에서와는 달랐다. 진도의 삼별초는 정부를 자처했다. 진도의 백성도 주변 백성도 다 삼별초의 백성이었다. 하지만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군은 탐라국을 인정한 까닭에 제주 사람들은 탐라국 백성이었고, 삼별초는 말하자면 셋방살이 신세였다. 항파두리에 내외성을 쌓고 궁을 짓고 다시 300여리에 이르는 환해장성을 쌓으면서 제주사람들을 동원하자 제주 사람들은 불만이었다. 이거야말로 셋방사는 주제에 주인집 아들을 종처럼 부리는 격이었다.

항파두성 내성지 항파두성은 물항아리 가장자리 모양을 닮은 지형이라서 항파두리라 불리는 곳에 지어진 성이다. 주변은 소왕천과 고성천이 천연 해자 역할을 하고, 장수물을 비롯 구시물, 옹성물 등 물이 풍부하다. 높은 곳에 있어서 바다와 주변 조망까지 완벽한 입지조건을 가졌다. 그런 곳을 찾아내는 것만 보아도 그리고 강화내성, 진도 용장성 제주 항파두성까지 성을 만든 기법이 같다는 것을 보아도 그들 내부에 전문가 집단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곳에 내성은 돌로 쌓았고 그 안에는 궁궐, 관아, 막사 등이 있었다. 그 밖으로는 27만평에 달하는 외성을 흙으로 쌓았다. 이 안에 백성들이 살게 했는데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었다. 여몽연합군에 의해 정벌된 뒤 항복한 사람 1천 3백여명을 끌고 갔던 것으로 보아 백성들이란 강화도, 진도에서 같이 했던 이들로 제주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진=고진숙)
항파두성 내성지 항파두성은 물항아리 가장자리 모양을 닮은 지형이라서 항파두리라 불리는 곳에 지어진 성이다. 주변은 소왕천과 고성천이 천연 해자 역할을 하고, 장수물을 비롯 구시물, 옹성물 등 물이 풍부하다. 높은 곳에 있어서 바다와 주변 조망까지 완벽한 입지조건을 가졌다. 그런 곳을 찾아내는 것만 보아도 그리고 강화내성, 진도 용장성 제주 항파두성까지 성을 만든 기법이 같다는 것을 보아도 그들 내부에 전문가 집단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곳에 내성은 돌로 쌓았고 그 안에는 궁궐, 관아, 막사 등이 있었다. 그 밖으로는 27만평에 달하는 외성을 흙으로 쌓았다. 이 안에 백성들이 살게 했는데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었다. 여몽연합군에 의해 정벌된 뒤 항복한 사람 1천 3백여명을 끌고 갔던 것으로 보아 백성들이란 강화도, 진도에서 같이 했던 이들로 제주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진=고진숙)

조운선을 습격해서 쌀을 뺏아 왔지만 제주 사람들에게 나눠줄 리 만무했다. 자기 백성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동안 고려 관리들에게 시달리던 제주 사람들로서는 삼별초군이 들어오자 해방군이라 느꼈지만 점점 벽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몽골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원한 같은 것도 없었다. 몽골군은 곳곳을 휘젓고 다녔지만 그때까지 제주에는 코빼기도 보인 적 없었다. 삼별초와 제주 사람은 서로 다른 곳을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1273년 4월, 160척의 배에 병력 1만 2천에 이르는 여몽연합군이 제주에 왔고 이로서 3년간의 삼별초의 항쟁도 끝이 났다.

실존 인물 중에 제주에서 가장 많은 신화와 전설을 갖고 있는 인물이 김통정이다. 제주 사람들로서는 섬이 생긴 이래 대부대가 격돌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처음 보았고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그것이 그 많은 설화와 전설을 남긴 이유일 것이다.

장수물은 김통정이 토성을 뛰어넘어 달아날 때 파인 바위의 발자국에서 샘이 솟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김통정에게 우호적인 신화를 갖고 있는 곳의 특징은 이렇게 물과 관련되어 있다. 물을 찾는 법을 알려준 곳 사람들에겐 김통정은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장수물은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사진=고진숙)
장수물은 김통정이 토성을 뛰어넘어 달아날 때 파인 바위의 발자국에서 샘이 솟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김통정에게 우호적인 신화를 갖고 있는 곳의 특징은 이렇게 물과 관련되어 있다. 물을 찾는 법을 알려준 곳 사람들에겐 김통정은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장수물은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사진=고진숙)

김통정 신화의 마지막은 왜 삼별초가 제주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망했는지 보여준다. 그것이 ‘애기업개이야기’이다. 신화에 의하면 여몽연합군 부대가 들이닥치자 항파두리 성문을 닫았는데 그만 애기업개를 들여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 난 애기업개는 여몽연합군 수장인 김방경에게 성문을 열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김통정이 어디로 탈출할지, 어떻게 하면 생포할 수 있을지 알려준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에겐 이런 말이 있다.

“애기업개말도 들으라.”

애기업개는 아기를 업은 사람이란 뜻으로 제주에서는 아기를 돌보는 사람을 말한다. 나이도 어리고 어리숙한 사람이란 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민초란 뜻으로 삼별초가 자신의 성문 안에 들이지 않은 제주 사람들이다. 고려정부와 탐라국 토호들에게 당할대로 당하지만 묵묵히 견뎌왔던 제주 사람들을 삼별초가 자신의 품안에 품었다면 어땠을까? 세금을 감면하고, 성주와 왕자를 몰아내서 탐라국을 해체하고 토호들의 횡포를 벌줬다면 어땠을까? 조운선을 습격해서 빼앗아온 식량을 나눠주고 선진적인 문물을 배워줬으면 어땠을까? 삼별초여, 애기업개말 좀 듣지 그랬어. 물론 그렇다고해서 역사가 바뀌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역사 속에서는 비극적인 인물이었지만 신화 속에서 김통정이야기는 해피엔딩이지 않았을까.

모든 것이 끝난 뒤 진정한 승자는 문씨가문이었다. 그들은 양호가 죽은 뒤 비어있던 왕자의 자리를 꿰찬다. 삼별초의 진압을 도운 이들이 문씨가문이었고, 그 결과 양씨가문이 지배하던 제주 서쪽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후 조선 태종 때 탐라국이 완전히 해체할때까지 왕자가문으로 군림한다.

남라왕자 추모탑 당시 성씨를 가진 사람은 특별한 가문의 사람만의 특권이었다. 제주에서 성씨를 가진 가문은 고,양,부 즉 탐라건국씨족을 제외하곤 없었다. 문씨가문이 제주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성주가문이 중앙정부에 줄을 대기 위해 끈질긴 노력 끝에 찾아낸 문벌귀족이었다. 제주에 들어와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입도조라고 하는데, 탐라국 지배가문 외에 성씨를 가진 첫 번째 입도조가 바로 이들이다. 그들은 성주가문의 초청손님으로 들어와서 성주가문과 결혼동맹, 즉 사위가문이 된다. 남평문씨 후손들은 입도조와 탐라왕자들을 위한 추모공원을 조성하여 매년 4월5일 청명가절에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사진=고진숙)
남라왕자 추모탑 당시 성씨를 가진 사람은 특별한 가문의 사람만의 특권이었다. 제주에서 성씨를 가진 가문은 고,양,부 즉 탐라건국씨족을 제외하곤 없었다. 문씨가문이 제주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성주가문이 중앙정부에 줄을 대기 위해 끈질긴 노력 끝에 찾아낸 문벌귀족이었다. 제주에 들어와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입도조라고 하는데, 탐라국 지배가문 외에 성씨를 가진 첫 번째 입도조가 바로 이들이다. 그들은 성주가문의 초청손님으로 들어와서 성주가문과 결혼동맹, 즉 사위가문이 된다. 남평문씨 후손들은 입도조와 탐라왕자들을 위한 추모공원을 조성하여 매년 4월5일 청명가절에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사진=고진숙)

성주가문과 왕자가문은 고려, 원, 삼별초가 제주를 무대로 벌인 세계사의 격동 속에서 아슬아슬 줄타기에 성공했다. 원, 고려, 탐라국 성주,왕자까지 가세한 층층시하 핍박으로 탐라국 사람들은 다시 고통 속에 빠졌다. 견디다 못한 탐라사람들이 민란을 일으켜 성주와 왕자를 내쫓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고려와 원을 등에 없은 성주왕자가문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삼별초가 벌인 타협의 결과였다. 삼별초여, 애기업개말 좀 들을 걸 그랬잖아.

고진숙

고진숙 작가

그동안 <제주옛썰>을 아껴주신 독자여러분과 지면을 내주신 ‘제주투데이’에 감사드립니다. 스무살에 제주를 떠난 저는 제주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온 시간이 길었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 기억속의 제주는 그다지 알고 싶거나 알리고 싶은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긴 시간이 지나 다시 제주를 살펴보니 제주의 가치는 ‘원석’ 그대로의 날것의 가치로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주옛썰>은 그런 가치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26회에 걸쳐 제주라는 곳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여행은 제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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