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제주 동쪽 마을인 월정리에서 전신주 교체 공사를 하던 한전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감쪽같이 전신주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 자그마한 사고 하나가 놀랄만한 일을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그 전신주가 빠진 구멍 때문에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굴하나가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동굴이 용천동굴이다.

용천동굴 입구 들어갈 수 없도록 입구를 막아놓았다. (사진=고진숙)

유네스코는 1972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보호협약'을 채택하고, 인류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문화와 자연이 특별히 뛰어난 지역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시작하였다. 2001년부터 정부와 제주도는 화산섬 제주를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유네스코는 꽤 망설였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실사단이 용천동굴을 보고는 '이토록 아름다운 용암동굴은 없다'고 극찬했고 곧바로 마음을 바꿨다. 마침내 2007년에 등재된 정식 명칭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로 세계에 있는 수많은 화산과 용암동굴 중에서도 제주의 한라산, 성산일출봉과 함께 용천동굴이 포함된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가 가지는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용천동굴 속 아름다운 호수 수심이 12m에 이르는 이 호수가 용틀임하며 솟아오르는 용과 같다고 해서 ‘용천동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길이가 800m나 되며 바다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유네스코 3관왕 자료집)
용천동굴 속 아름다운 호수 수심이 12m에 이르는 이 호수가 용틀임하며 솟아오르는 용과 같다고 해서 ‘용천동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길이가 800m나 되며 바다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유네스코 3관왕 자료집)

제주도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빌레못 동굴을 비롯해서 많은 용암동굴들이 있다. 용천동굴이 발견된 김녕-월정지역에만 해도 용암 동굴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폭이 무려 18m인데다 높이도 23m에 이르는 입구를 가진 세계적으로도 큰 규모의 동굴이면서도 내부의 형태와 지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드문 경우라며 전세계의 격찬을 받아온 만장굴도 있다.

만장굴 개방구간 끝에서 볼 수 있는 약 7.6m 높이의 용암석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월드클라스급 용암동굴인데도 불구하고 이 동굴은 유네스코 심사단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었다. 그런데 왜 용천동굴이 세계 지질학자들의 찬사를 받으며 유네스코의 결심을 이끌어낸 것일까?

용천동굴 안 곳곳에는 석회동굴에서만 볼 수 있는 종유관, 종유석, 석순, 석주, 동굴산호 등이 아름답게 펼쳐져있다. 이런 동굴을 유사석회동굴이라고도 한다. 용암동굴로 태어났지만 석회동굴로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결심을 이끌어낸 주요한 이유는 아니다. 이미 유사석회동굴은 1994년에 월정 바닷가 바로 앞에서 발견되었었기 때문이다. 이 동굴이 당처물동굴로 이곳 안에도 석회암생성물이 가득하다. 하지만 길이가 100미터에 불과했기 때문에 심사단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반면에 용천동굴은 우선 길이가 3.4㎞로 굉장히 길었다. 용천동굴의 끝부분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고요한 어둠속에 잠자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동굴내 호수이다.

석회생성물들로 가득한 당처물동굴 내부 모습. 김녕해수욕장 바로 앞에서 밭을 일구던 농부에 의해 당처물동굴이 발견되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유네스코 3관왕 자료집)

무엇보다 전세계 동굴학자와 지질학자들을 흥분시킨 것은 종유석이었다. 나무뿌리가 물을 찾아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다 지하 8미터 깊이에서 용천동굴의 천장 안으로 들어왔고, 그 뿌리 위로 탄산칼슘이 덮여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밝은 세상의 나무가 어두운 동굴과 이어져 아름다운 얼굴로 변신한 것이다. 이런 종유석은 세상 그 어디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유네스코는 세계자연유산 등재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용천동굴은 뛰어난 시각적 충격을 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굴이다.”

용천동굴 안 종유석의 모습. 천정을 뚫고 내려온 식물의 뿌리위에 흐르는 탄산칼슘에 의해 종유석이 1년에 0.02cm정도가 자라고 지금도 자라고 있다고 한다. (사진=세계자연유산센터 블로그)

현무암질 용암이 흘러가면서 만들어낸 용암동굴에 도대체 왜 이런 석회암 종유석이 생긴 것일까? 그 열쇠가 1900년 음력 2월 2일에 서귀포시 효돈마을 앞바다에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 속에 있다.

제주대 사학과 교수인 고창석에 의해 발굴된 고문서속에는 1900년 음력 2월 2일에 벌어진 나무바가지 분실사건이야기가 들어있다. 보목동 강씨가 잃어버린 나무바가지를 찾고 보니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고 있는 이웃마을 효돈동 김씨의 구덕(바구니)속에 있었다. 강씨가 바가지를 내놓으라고 했더니 오히려 김씨가 적반하장으로 강씨를 구타한다. 이에 강씨의 조카가 마을 경민장(이장)과 함께 억울하다는 호소문을 올린 것이다.

고광민 저서 '제주생활사' 생활사 연구자인 고광민이 내놓은 역작으로 저자가 제주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채록한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제주사람들의 삶을 해석해낸 명작이다.

사건은 이렇게 단순하다. 하지만 스스로를 제주 서민생활사 연구자라고 하는 고광민 선생은 자신의 저서 <제주생활사>와 제주투데이에서 개최한 ‘서민생활사 연구자과 함께하는 제주 이야기’라는 강연에서 이 이야기 속에 담긴 제주 사람들의 눈물겨운 분투기를 드라마틱하게 펼쳐냈다.

사건이 벌어진 그날은 밀물과 썰물차이가 큰 한사리이다. 그래서 강씨가 바다에 나가 바다 속 모래를 떠내다가 그만 바가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바가지는 바닷물 위에 둥둥 떠서 흘러가다가 근처에서 조개를 파던 김씨 앞까지 왔다. 김씨는 옳다구나,하고 바가지를 챙겼다. 왜냐하면 그 바가지는 절도, 즉 모래도둑질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아니, 바닷에 흔해 빠진 게 모래인데 그까짓거 한바가지 퍼냈다고 이런 일을 벌일까 싶겠지만, 그 모래는 그냥 모래가 아니라 ‘모살걸름’이었다. 모살은 모래의 제주어이다. 그러니까 ‘모래거름’이란 말이다. 모래를 거름으로 하다니, 하겠지만 제주에서는 그게 가능한 이야기이다.

지구상의 모래의 대부분은 화강암이 풍화되어 만들어진 투명한 석영과 같은 규소덩어리이다. 이런 모래는 거름으로 쓸 수 없다. 하지만 바다 속 산호와 조개가 오랜 시간이 지나 잘게 부서져 만들어진 하얀 모래는 그 자체로 칼슘덩어리이다. 이 칼슘이 산성토양을 중화시켜낸다. 이 모래가 제주 바다에 있었던 것이다.

서귀포시 토평동, 보목동, 효돈동 일대의 농경지는 산성토양이라서 이 모래가 필요했다. 그들은 밭에 모래를 거름으로 주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보목동 앞에도 바다가 있고, 모래도 있는데 어째서 강씨는 굳이 자기 동네 앞바다가 아니라 이웃동네인 효돈동 앞바다까지 가야했을까? 이유는 베르누이 정리라는 물리학법칙 때문이다. 보목동 앞바다는 앞에 섶섬이 있기 때문에 물살이 세서 모래를 퍼내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베르누이정리: 유체의 속도가 좁은 곳에서는 빨라지고 넓은 곳에서는 느려진다는 이론으로 물살은 좁은 곳에서 빨라진다. 가파도, 우도, 차귀도와 같이 앞에 섬이 있는 바다의 물살이 훨씬 세다.

바가지 탈취사건이 벌어졌던 쇠소깍 앞 바다 개우지코지와 그 주변 모습을 정리한 그림이다 (고광민 제공)
바가지 탈취사건이 벌어졌던 쇠소깍 앞 바다 개우지코지와 그 주변 모습을 정리한 그림이다 (고광민 제공)

반면 효돈동의 개우지코지는 조류를 타고 바다 속 모래가 끝없이 밀려드는 곳이다. 천연 모래광산인 셈이다. 그날의 사건은 밭에 뿌릴 모래거름이 절실했던 강씨가 몰래 남의 바다에 침입했는데 김씨가 바로 그 절도의 증거로 바가지를 얼른 챙겨두었다가 응징을 한 이야기인 것이다.

제주에서 모래거름을 얻기 위한 분투는 눈물 날 정도이다. 고광민 선생이 찾아낸 자료에 의하면, 서홍리의 밭주인은 600평 밭 중에서 무려 450평을 모래거름 값으로 경작권을 내줬다고 한다. 150평 밭에 고구마를 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직접 채취하면 될 텐데 왜 굳이 그런 출혈을 감수하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래는 채취하고 말리고 다시 소의 등에 실어 나르는 데 무려 60일이나 걸리는 큰일이었다. 제주사람들은 이 일을 ‘모살역시’라고 불렀다. 모래역사(役事)라는 뜻이니 말 그대로 역사(役事)가 아닐 수 없다.

그토록 힘들게 모래를 채취하고 날라다 뿌렸지만 5,6년이 지나면 다시 그 기운이 사라진다고 하니, 고구마 한 개의 가치가 금보다 더 귀한 곳이 제주인 셈이다. 물론 지금은 비료가 있어서 이런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이런 ‘모살역시’의 전통이 한라산 북쪽, 즉 제주도 북쪽지역엔 전혀 없다. 바로 이것이 용천동굴이 신비를 만들어낸 이유이기도 하다. 원인은 바람이다. 제주북쪽은 겨울철 북서풍이 쉴 새 없이 분다. 남명소승을 지은 조선 중기 시인인 임제는 이렇게 말했다.

‘한라산 북쪽에는 항상 북풍이 많다. 바람이 일 때면 해수입자가 비 온 듯하여, 바다 가까운 10리 사이에 초목은 모두 짠 기운에 젖는다. 산북은 비록 하늘이 무너지고 바다가 뒤집힌다 하더라도 산남은 가는 풀도 움직거리지 않는 까닭에 땅이 한층 따뜻하고 장기가 심하다.’

*산북은 한라산 북쪽, 산남은 한라산 남쪽, 장기는 습기를 뜻한다.

이 춥고 건조한 북서풍이 북쪽사람들에게 ‘모살역시’의 고된 노역을 면제해줬다. 바닷가 모래가 바짝 말려져서 북서풍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 북쪽 지대 밭들에 뿌려주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야말로 공평하다.

제주의 바다의 색은 에머랄드색이라고 한다. 규소모래가 아니라 탄산칼슘모래이기 때문에 제주바다의 모래는 더 하얗고 그래서 바다는 아름다운 에머랄드 빛이 된 것이다. 김녕 앞바다는 하얀 모래밭으로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조선후기 제주목사로 왔던 이원진은 <탐라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결에 의하여 쌓인 (김녕앞바다의) 모래가 썰물에 뜨거운 햇빛에 말려져서 바람을 타고 날려 가까운데서 멀리까지 이른다. 낮은 것이 높아져 쌓임이 점점 커지면 초목을 매몰하고 언덕을 이루어 산을 만든다. 만약 전답이 있는 곳이라면 그 밭의 소재를 잃어버린다.’

위성사진으로 보는 용천동굴 부근 사진. 김녕해수욕장에서 불어온 모래바람이 북서풍을 타고 용천동굴 위를 지나 길게 흘러간 모습이 뚜렷하다. (붉은 색 화살표) 카카오맵
위성사진으로 보는 용천동굴 부근 사진. 김녕해수욕장에서 불어온 모래바람이 북서풍을 타고 용천동굴 위를 지나 길게 흘러간 모습이 뚜렷하다. (붉은 색 화살표) 카카오맵

김녕 앞바다의 모래는 조개껍질과 성게부스러기가 닳아 만들어진 천연 탄산칼슘이라고 한다. 그 모래가 북서풍을 타고 남동쪽에 있는 당처물동굴과 용천동굴 위를 덮었다. 용암동굴 속 아름다운 석회생성물의 고향은 여기이다. 식물의 뿌리가 만들어낸 틈으로 모래 흘러들어가 녹은 탄산칼슘이 느리지만 아름다운 석회 생성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제주의 바람은 용천동굴의 신비로움을 만들고 척박한 제주 북쪽 땅에는 거름을 뿌려주었다.

제주에 유배를 왔던 선조의 손자 이건은 고달픈 제주살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조밥이고, 가장 두려운 것은 뱀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다.”

-제주풍토기-

바람은 제주인들에게 고달픈 삶을 선사하고 외로운 유배객에게는 그 쓸쓸함을 더하는 것이지만 그로인해 제주는 더없이 아름다운 섬이 되었으며 세계가 찬사를 보내게 되었다. 제주를 만든 것은 화산이지만 제주를 이룬 것은 바람이다. 제주는 바람의 노래가 가득한 섬이다.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올해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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