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원 1만7130명이 참여하고 238회에 이르는 집회와 시위를 거듭한 결과 승리를 따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비천한 신분에서 경제의 주역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일이 일제 강점기에 그것도 여성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들이 제주 해녀들이다. 3.1운동으로 시작되어 1920년대를 휩쓸고 간 항일운동이 잦아들 무렵인 1932년에 여성들만의 힘으로 가장 완벽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면서 이겼고, 그로인해 자신과 가족들은 물론 제주도의 경제지도도 바꿨다.

그들이 벌인 해녀항쟁은 한반도 변방 제주섬에 있었던 3대 항일운동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운동이자 항일운동의 하나가 되어야 하는 점은 이 때문이다.

해녀항일운동기념탑2006년에 해녀문화의 보존을 위해 해녀박물관을 개관하면서 해녀항쟁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해녀들의 2차 집결지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 연두망 작은동산에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을 세웠다. 그 앞에는 해녀항쟁의 주역인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의 흉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사진=고진숙)
해녀항일운동기념탑 2006년에 해녀문화의 보존을 위해 해녀박물관을 개관하면서 해녀항쟁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해녀들의 2차 집결지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 연두망 작은동산에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을 세웠다. 그 앞에는 해녀항쟁의 주역인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의 흉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사진=고진숙)

해녀란 말자체가 관찰자의 시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주체의 관점에서는 잠수, 잠녀가 맞는 말이고 1966년 결정된 공식 행정용어는 잠수라고 한다. 여성들이 해산물 채취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였고, 조선시대 내내 잠녀라는 말이 보편적인 용어였다. 해녀란 말은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말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 해녀항쟁을 통해 자신들의 삶은 물론 사회적 가치도 스스로 바꿔 낸 까닭에 해녀라는 표현은 단순한 직업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진 용어가 되었다.

제주가 잠수 어업을 처음 시작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단서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제주해녀의 물질은 가장 효과적인 잠수어업방식인 것만은 분명하다. 제주 해녀들의 물질이 다른 지역보다 우수한 것은 태왁이라는 도구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태왁 태왁은 자기 몸에 알맞은 크기의 박을 따서 속을 파내고 말린 후 구멍을 막아 만든 것으로 부력을 이용하여 바다에 띄어 놓고 물질을 한다. 일본해녀들은 배아래서 잠수하다 올라오면 끌어올려주는 방식이라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제주 해녀는 태왁을 들고 먼 바다까지 자유롭게 넘나들며 물질을 할 수 있다. 또 제주 해녀들은 추위에도 강했다. 동남해안의 수온이 낮은 겨울에 일본해녀들은 한 달에 일주일정도밖에 조업을 못하는데 비해 제주 해녀들은 15~20일 정도 물질을 하였다고 한다. 해녀들은 여덟살 무렵부터 얕은 바다에서 수영과 잠수를 배우고 15살이 되면 애기해녀가 되어서 숙련된 해녀들에게 폐활량을 늘이고, 수압과 차가운 물을 견디는 능력을 키우는 법을 배운다. 지금은 박 대신에 스티로폼으로 된 태왁을 쓴다. (사진=해녀박물관)
태왁 태왁은 자기 몸에 알맞은 크기의 박을 따서 속을 파내고 말린 후 구멍을 막아 만든 것으로 부력을 이용하여 바다에 띄어 놓고 물질을 한다. 일본해녀들은 배아래서 잠수하다 올라오면 끌어올려주는 방식이라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제주 해녀는 태왁을 들고 먼 바다까지 자유롭게 넘나들며 물질을 할 수 있다. 또 제주 해녀들은 추위에도 강했다. 동남해안의 수온이 낮은 겨울에 일본해녀들은 한 달에 일주일정도밖에 조업을 못하는데 비해 제주 해녀들은 15~20일 정도 물질을 하였다고 한다. 해녀들은 여덟살 무렵부터 얕은 바다에서 수영과 잠수를 배우고 15살이 되면 애기해녀가 되어서 숙련된 해녀들에게 폐활량을 늘이고, 수압과 차가운 물을 견디는 법을 배운다. 지금은 박 대신에 스티로폼으로 된 태왁을 쓴다. (사진=해녀박물관)

물질이라고 하면 여자들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 해산물을 관공서에 진상하는 일을 맡은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포작이라고 하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의 신분은 양인이었지만 노비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이들이 처음엔 전복잡이를 전담했다.

제주의 생선은 육지에서 인기가 없었다. 제주에 온 목사들이 제주 생선을 즐기기보다 하천어인 은어를 별미식으로 먹었을 정도였다. 제주 전통음식을 찾아 물밀듯이 관광객이 몰려드는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대신에 전복과 미역은 육지에서 대단히 인기가 높은 해산물이었다. 중국 초나라 굴원이 전복 맛을 알았다면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거라는 조선시대 문신 정온의 말처럼 양반들은 전복을 매우 좋아해서 김치를 담가먹기도 했다고 한다. 전복을 채취하는 일은 포작이라는 남자들의 몫이었다면 미역채취는 잠녀라고 하는 여성들의 몫이었다. 이들이 말하자면 해녀의 선구자인 셈이다.

대동법의 실시 이후 공납은 재산에 비례해 부과되었고 쌀이나 화폐로 내도록 했지만 제주만은 달랐다. 머릿수만큼 부과되고 물건을 직접 바쳐야했다. 게다가 전복을 캐거나 진상품을 싣고 바다를 건너 오가는 중에 그리고 수군으로 징발되면서 포작들은 거의 남아나지 않았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세종대 인구가 6만3093명이었는데 숙종때인 1679년 제주의 인구수는 3만4980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이 중 남자의 수는 1만5140명이고 여자의 수는 1만9840명으로 여성인구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서 여자, 바람, 돌이 많은 삼다도가 되었다.

결국 포작들의 진상물량을 여자 잠녀들이 메꿔야 했다. 미역을 캐는 일에 비해 전복을 따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워서 잠녀들도 꺼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선후기가 되면 물질은 여성들의 몫이었고, 원래 전복을 캐는 사람이라는 뜻의 비바리는 여성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들은 포작의 아내거나 첩이었기 때문에 포작이 비천한 노비 신분이었 듯 잠녀 또한 비천한 신분이었다. 집안에 잠녀가 있으면 남자들의 향교 출입이 금지되었다.

제주 어촌과 전통배인 태우제주 포작들은 배를 운용하는 기술이 남달라서 날쌔기가 이를데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왜구침입과 임진왜란으로 포작선이 전부 징발되고 포작들이 수군으로 이용되면서 포작수 크게 줄었다. 징발이 되면 대부분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워 포작들은 도망가거나 숨어버린 것이다. 정의현감 이성구는 1680년 포작들이 거의 다 죽어 남은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결국 조선후기가 되면 제주에선 어업기술이 크게 후퇴하고 바닷물이 들고 나는 곳에 돌을 쌓아 물고기를 잡는 원담이나 잠수, 간단한 낚시로 물고기를 낚는 연안어업만 남게 된다. (사진=해녀박물관)
제주 어촌과 전통배인 태우 제주 포작들은 배를 운용하는 기술이 남달라서 날쌔기가 이를데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왜구침입과 임진왜란으로 포작선이 전부 징발되고 포작들이 수군으로 이용되면서 포작수 크게 줄었다. 징발이 되면 대부분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워 포작들은 도망가거나 숨어버린 것이다. 정의현감 이성구는 1680년 포작들이 거의 다 죽어 남은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결국 조선후기가 되면 제주에선 어업기술이 크게 후퇴하고 바닷물이 들고 나는 곳에 돌을 쌓아 물고기를 잡는 원담이나 잠수, 간단한 낚시로 물고기를 낚는 연안어업만 남게 된다. (사진=해녀박물관)

개항은 해녀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더 이상 해산물은 진상품이 아니라 환금성을 갖는 상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1883년 7월 25일 「한일통상장정」이 체결된 뒤 제주바다에서 조업이 가능해진 일본어민들이 잠수기선을 몰고 와서 바다 밑바닥까지 훑어서 모조리 긁어가기 시작했다. 1800년대 말까지만 해도 껍질 크기가 24~30㎝나 되는 거대한 전복도 많았으나, 10년이 지나자 평균 18㎝ 정도로 작아지고 말았다.

결국 해녀들은 외부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것을 '출가 해녀'라고 한다. 1887년 부산으로 바깥물질을 떠난 이후 한반도 남부 지역뿐만 아니라 북부 지역, 일본, 중국의 따렌과 칭다오는 물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까지 넓어져 갔다. 이들이 벌어오는 돈은 제주에서 물질을 하는 것보다 4배는 많았다. 제주 어장이 그만큼 황폐화된 것이다.

바깥물질을 떠난 이들의 삶도 비참하긴 마찬가지였다. 외지에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출가 해녀를 모집해가는 객주들에게 미리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돈은 이자가 높았고 또 해산물도 객주에게만 팔아야 했다. 일본 상인과 손을 잡은 객주들은 저울과 물건 값을 속였다. 해녀들은 고생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이를 보다 못한 제주의 뜻있는 사람들이 해녀조합을 만들었다. 해녀가 생산한 물건을 공동으로 팔게 하며, 중개도 하여 주고, 자금을 융통하여 주는 일을 해녀조합에서 해주었기 때문에 해녀들의 바깥물질은 늘어났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경제불황이 전세계를 덮친 1920년대가 되자 일제는 한국에서의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조합을 이용했다. 축산조합·임야조합·도로보호조합·연초조합·해녀조합·어업조합 등 온갖 관제조합이 만들어져 한국인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쥐어짠 곳이 해녀조합이다. 제주 해녀조합장은 일본인 제주도사가 겸임하고 이런 일에 앞장섰다. 제주도사는 지금의 제주도 도지사의 전신격이지만 권력은 막강했다. 사법과 경찰력까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총독부와 같았다.

해녀조합은 조합비를 올리고 일본인 상인이나 조선인 중간상인을 이용하여 지정가격제를 시행했다. 그러니까 통조림 공장에서 원하는 금액으로 조합이 미리 넘겨버리는데 그 가격이 시세보다 엄청 낮았다. 게다가 해녀들이 글을 모르는 점을 이용해서 저울을 일상적으로 속였다.

저울과 저울추 해녀들은 해산물을 채취하면 저울에 달아서 상인들에게 넘겼다. (사진=해녀박물관)
저울과 저울추 해녀들은 해산물을 채취하면 저울에 달아서 상인들에게 넘겼다. (사진=해녀박물관)

고통 받는 해녀들을 바꾼 것은 해녀 자신이었다. 그 계기가 바로 야학이다.

제주도는 1920년대 제주청년회라는 진보적 성향의 항일운동조직이 만들어지고 이후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다양한 형태와 이름을 가진 비밀조직을 계속 이어갔다. 그들이 한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학교를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여성들에 대한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가파도에서는 단 한명 출가 해녀가 기회를 놓친 경우를 빼고 문맹인 여성이 없었다. 그리고 구좌 ·성산의 청년들도 야학을 만들어 해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저울 읽는 법을 가르쳤다.

하도 보통학교 부설 야학강습소 1기 졸업생이면서 해녀항쟁의 주역인 김옥련은 자신의 인생을 바꾼 일로 야학에서 글을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삶이 변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키고 돌보기 위해 뭉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해녀회를 조직해서 일산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녀항쟁의 주역들이 다녔던 하도강습소 제1기 졸업기념사진 해녀들은 청년 교사들로부터 '농민독본' '노동독본' 같은 계몽서를 배우고, 한글·한문 뿐만 아니라 저울 눈금 읽는 법까지 배웠다. 그러나 일본어는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박찬식)
해녀항쟁의 주역들이 다녔던 하도강습소 제1기 졸업기념사진 해녀들은 청년 교사들로부터 '농민독본' '노동독본' 같은 계몽서를 배우고, 한글·한문 뿐만 아니라 저울 눈금 읽는 법까지 배웠다. 그러나 일본어는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박찬식)

1930년 성산포에서 저울을 속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것을 시작으로 해녀항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예전의 해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1931년 하도리 해녀들이 캐낸 감태와 전복의 가격을 조합 측에서 강제로 싸게 매기려 하자, 해녀들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거센 항의에 부딪힌 조합측은 정상적인 매입을 약속했으나 몇 달이 지나도록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해녀들의 투쟁방식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우선 연대투쟁을 시작했다. 하도리 해녀뿐만이 아니라 같은 처지의 해녀들이 있는 구좌 ·성산 지역의 해녀들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행동을 같이하기로 뜻을 모았다. 누구와 협상을 해야할지도 정확하게 알았다. 해녀조합장인 제주도사와의 담판을 시도한 것이다. 자신들의 요구를 홍보하는 방식도 기가 막혔다. 우선 유니폼을 착용하고 행진한다. 해녀복과 머리수건, 호미와 빗창은 해녀의 상징인데 이런 복장으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세화장날을 시위와 행진의 장소로 이용했다.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은 이 유니폼만 보고 궁금해서 까닭을 물었고, 곧 너무나 정당한 주장을 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

빗창과 호미 비는 전복을 뜻하는 고유어로 빗창은 전복을 따는 도구라는 뜻이다. 꺼꾸리는 호미로 제주에선 골각지라고도 한다. 오분자기, 성게, 문어를 딸 때 사용하는데 긴것은 문어, 작고 날카로운 것은 오분자기용이다. (사진=해녀박물관)
빗창과 호미 비는 전복을 뜻하는 고유어로 빗창은 전복을 따는 도구라는 뜻이다. 꺼꾸리는 호미로 제주에선 골각지라고도 한다. 오분자기, 성게, 문어를 딸 때 사용하는데 긴것은 문어, 작고 날카로운 것은 오분자기용이다. (사진=해녀박물관)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점은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이다. 이들의 야학 선생들은 제주지역의 항일운동가들로 전도에 걸친 네트워크와 정보력을 갖고 있었다. 해녀들은 제주도사이자 제주해녀어업조합장인 다구치가 전도를 순시하던 중 세화장날인 1932년 1월 12일에 구좌면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이날이 되자 세화경찰관 주재소(지금의 구좌파출소) 동쪽 네거리에 1000여명의 해녀들이 일시에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면서 만세를 외치며 세화장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다구치가 탄 자동차를 포위해서 시위를 벌였다.

결국 다구치는 해녀와의 대화에 응했고, 1만 여 명의 구경꾼이 지켜보는 가운데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대답한다. 완벽한 승리였다. 이후 해녀들은 해산물을 제값을 받아 팔 수 있게 되었고 해녀조합비가 현실화되었다. 제주에서 나오는 생산품 중 가장 환금성이 높은 상품인 해산물을 가지고 제주 경제의 주역이 되었고, 부의 지도를 바꿨다. 더 이상 해녀를 비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감히 집안을 살리고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마을을 부유하게 하는 해녀들을 무시하겠는가. 제주에서 가장 능력있는 전문직 여성이 된 것이다.

해녀항쟁 90주년을 기념한 세화리 예술제 ‘항쟁’의 한 장면(사진=고진숙)
해녀항쟁 90주년을 기념한 세화리 예술제 ‘항쟁’의 한 장면(사진=고진숙)

일본인 다구치로서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약속을 헌신짝 뒤집듯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여성 항일운동가들의 형량은 매우 작거나 기소되지도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절대로 여자들이 주도했을거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도강습소를 만들어 해녀들에게 글을 가르쳐 준 진보적 항일운동조직인 혁우동맹 사람들을 체포해 가기 시작했다. 이에 해녀들이 항의하자 이들을 마구잡로 잡아들였다. 

30명의 해녀들과 함께 체포된 하도리 해녀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자신들이 주동자이며 해녀들끼리 함께 벌인 것이고 혁우동맹은 관계가 없다고 끝까지 주장한다.

김옥련은 이때 고춧가루 물을 코로 붓는 고문을 당하면서, 깊은 바다에서 물질을 할 때 고통을 참 듯 참았다고 한다. 고문도 지독하지만 해녀들의 물질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짐작이 된다. 고통스런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아 내는 것이 그토록 힘들었던 것이다. 세 명의 해녀들은 끝까지 버텼고, 다른 해녀들은 석방되었다. 이들도 결국 기소되지 않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물론 일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혁우동맹은 물론 그들과 관련된 제주도 항일운동조직을 찾아내어 완전히 파괴했다. 대대적인 검거결과 40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무려 22명이 실형을 받았다. 목포형무소 건립이후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형량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2003년 김옥련을 시작으로 부덕량·부춘화 해녀들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뤄졌다. 혁우동맹 사람들에 대한 서훈도 차례차례 이뤄졌다.

그러나 혁우동맹을 만들고 야학을 만들었던 하도리 해녀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교사인 오문규에 대한 서훈은 아직도 이뤄지고 있지 않다. 오문규와 그의 아들은 제주 4·3을 거치면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오문규의 며느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학살을 벌인 다랑쉬굴 비극의 희생자가 되었다. 필자는 몇 년전 오문규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돕기 위해 하도리에 있는 오문규 친척을 통해 남은 가족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해녀항쟁의 주역인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의 포장과 포장증 (사진=해녀박물관)
해녀항쟁의 주역인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의 포장과 포장증 (사진=해녀박물관)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올해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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