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어딜가나 돌담을 보게 된다. 제주의 돌담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규칙도 없으며 무한한 곡선의 향연이다. 제주의 아름다운 색채들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흑룡만리’라는 멋진 이름이 있다. 까만 용이 1만 리에 걸쳐 이어져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어떤 이들은 불멍 바다멍처럼 하나의 힐링용어으로서 '돌담멍'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무질서해 보이는 제주 돌담은 자연재해가 강력한 제주에서도 어지간해선 무너지지 않는다.
'그렝이 공법'이라는 한국의 전통건축기법으로 지어 태풍에도 끄떡없다. 돌들을 반듯하게 깎아서 쌓아올리면 홍수와 바람, 지진에 무너지지만 자연적으로 돌들이 맞닿게 하면 흔들리면서도 제자리로 돌아와 무너지지 않는다.
오래된 돌다리, 주춧돌 위에 나무를 올려놓아 만든 전통 한옥의 기둥, 지진대 위에 돌을 쌓아 만든 불국사까지, 이 '그렝이 공법'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들은 오랜 세월을 끄떡없이 견뎌낸다.
제주 돌담은 반듯하게 깎아진 돌이 아니라 세월에 풍화되어 불규칙한 모양의 돌을 사용한다.
불규칙한 돌들을 돌리고 돌리다보면 아귀가 맞는 면이 나타난다. 그래서 ‘돌에는 귀퉁이가 여덟 개가 있어서 돌리다보면 아귀가 맞지 않는 돌은 없다’고 말한다.
돌챙이(제주에서 석공을 이르는 말)들은 다 쌓은 돌담을 한쪽 귀퉁이에서 흔들어본다. 맞은편 귀퉁이까지 흔들리면서 제자리로 돌아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불규칙한 돌들의 면은 바람을 분산시키고 돌담에 생기는 무수한 구멍들은 바람의 힘을 약하게 만든다. 바람 많은 제주에서 바람을 막아내는 가장 완벽한 건축물인 것이다.
돌담은 제주 사람들의 모든 생활 속에 존재한다.
집을 지을 때는 축담으로, 농작물을 보호하는 밭담으로, 무덤을 지켜주는 산담으로, 바닷물을 가두는 원담으로, 물질을 끝낸 해녀들을 추위에서 보호해주는 불턱의 담으로, 방파제의 구실을 하는 포구담으로, 목장에서 말이나 소가 길을 잃지 않도록 막는 잣담으로, 왜구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성담으로, 집을 비바람으로부터 지켜주는 울담으로, 집으로 가는 골목의 올렛담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이야 길가 바투 지은 집을 더 선호하지만 옛날에는 긴 올렛담을 가진 집이 더 가치가 있는 집이었다. 까만 울담이나 올렛담 아래에는 분꽃, 마농꽃, 봉선화, 수선화를 심어서 집으로 가는 길목을 더욱 운치 있게 했다.
직선이 아니라 곡선인 것도 특징이다. 질레라고 하는 큰길에서 대문까지 구불구불 이어진 올렛담은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둥그렇게 쌓아올린 울타리인 울담은 바람을 비껴가게 한다. 이런 담들은 하늬바람이 휘몰아치는 방향인 북서쪽은 높게, 해가 뜨는 방향인 동남쪽은 낮게 하여 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 바람을 막도록 되어 있다.
돌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961년 중국 송나라 왕부가 편찬한 《당회요》안에 있는 <탐라국조> 기사다. 여기에는 탐라인들의 집은 ‘둥글게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었다’라고 되어 있다.
돌이 지천인 제주에서 돌집을 짓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니 이상할 것은 없다.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인 청동기시대 유적이나 초기 탐라국 시대의 유적지들에도 돌로 담을 쌓은 흔적이 있어서 제주의 역사는 돌과 함께 시작했다고 해도 될 듯하다.
이런 축담(집담)이나 성담 말고 제주 밭담이나 잣담은 처음 만들어진 시기가 기록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고려 명종 때인 1234년에 제주 판관으로 약 5년간 재직 했던 김구가 밭담을 쌓아 경계를 분명히 하여 백성을 이롭게 했다고 되어 있다.
당시 제주는 탐라국이 고려의 지방자치정부처럼 존재하고 있어 여전히 토호들의 힘이 강했다. 이들은 자기 밭 주변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의 수확물을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인양 뺏어가기 일쑤였다. 이것을 본 김구가 그들로부터 양민을 보호하기 위해 밭에 울타리를 치도록 한 것이 제주 밭담의 시작이라고 한다.
들짐승이나 가축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고, 바람을 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런 용도로 울타리를 쳐놓은 밭담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것일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자기 땅의 경계가 분명해져서 힘 있는 자들에게 수확물을 더 이상 뺏기지 않게 되었고, 아름다운 밭담이 제주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석주명은 ‘후세에 와서 돌담의 효용을 생각하면 김구는 제주도의 은인’이라고 말했다.
목장의 말이나 소가 밖으로 나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하고, 남의 밭에 들어가 농작물을 망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쌓은 담인 잣담은 1429년에 당시 상호군인 고득종에 의해 쌓기 시작했다.
잣담이란 작지, 즉 자갈로 쌓은 담이란 의미이다. 목장 주변에서 주변의 자갈들을 모으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었고, 자갈무더기를 쌓는 것도 간단한 일이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밭담들의 경계는 제각각으로 마치 모던아트를 보는 느낌마저 든다. 어떤 곳은 아주 작은 세모꼴이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동그라미인 경우도 있다. 경작지가 직선이었을 때 훨씬 효율적인데도 이렇게 다양한 모양을 띌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다.
제주는 화산이 폭발한 후 용암이 굳으면서 만들어진 ‘빌레’라고 하는 커다란 바위가 덮여있었다. 세월이 지나 풍화된 흙들이 낮은 곳에 모이고, 이곳을 경작하다보니 작고 옴팡한 밭이 만들어졌다. 이 밭들을 ‘옴팡밧’이라고 하고, 작은 밭의 경우는 ‘돌렝이’라고 한다.
농기구가 발달하면서 비로소 경작지가 넓어지고 그로 인해 큰 밭이 생겼다. 이런 큰 밭은 ‘벨진밧’이라고 하는데, 일을 하다보면 별이 뜨기 때문에 별을 지고 집에 온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밭을 일구는 일은 돌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밭에는 온통 크고 작은 돌들이 넘쳐났고, 이런 돌들을 ‘골채’라고 하는 삼태기를 이용해 밭의 한구석에 모아두는데 이것을 ‘머들’이라고 한다. 밭담은 이 머들의 큰돌을 이용해서 쉽게 만들 수 있었다.
또 작은 돌인 자갈을 제주에서는 ‘작지’라고 하는데, 자갈밭인 작지왓은 바람에 물기가 날라 가지 않게 하여 습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양배추나 브로콜리같은 작물의 재배에 아주 좋다고 한다.
돌담은 크게 회갈색 조면암 담돌과 검은색이 섞인 현무암 담돌이 있다. 조면암은 백록담일대, 산방산 부근, 그리고 효돈천에 많이 있다. 그 외 지역은 모두 현무암이다.
또 해안가에서는 둥글둥글한 담돌을 쓰고 제주시 내도에선 냇돌이나 해변의 몽돌로 돌담을 쌓는다. 곶자왈 주변의 담돌들은 붉은 색 또는 회청색 용암석 담돌이 쓰이는데 화산이 폭발할 때 가스와 함께 먼저 분출한 화산송이와 함께 나온 돌들로 구멍이 많고 현무암에 비해 가볍고 표면이 거칠다.
현무암도 표면이 맨질맨질한 ‘파오이호이’ 담돌도 있고 표면이 날카로운 ‘아아’ 담돌도 있다. 자갈이 많은 곳에서는 자갈을 이용해서 담돌을 쌓기도 한는데 이런 담은 잣벡담이라고 한다. 이런 잣벡담은 ‘도’라고 하는 출입구가 없는 밭으로 가는 길로도 쓰였다. 돌담은 그 자체로 자연사박물관이면서 매력적인 예술품이기도 한 것이다.
제주대학교의 송성대 교수는 제주의 돌담의 총길이라 9700리라하여 '흑룡만리'란 이름을 지었다.
그렇다면 돌담의 총길이는 얼마나 될까? 1930년에 부산상공회의소가 발행한 <제주도의 경제>라는 책에는 우에다 코오이치로라는 일본인이 돌담의 총길이는 9900리라고 했다.
일본은 1리가 4㎞이므로 3만9600㎞에 이른다. 2007년에 농림부에서 돌담을 문화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측정한 제주 돌담의 길이는 총 3만 6355㎞, 이중 밭담은 2만 2108㎞라고 한다.
이것은 일일이 다 잰 전수조사방식이 아니라 표본을 이용한 조사였는데, 실제와는 조금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지적정보를 이용한 다른 연구에서는 2만3938㎞~2만9473㎞라는 추정치를 제시하였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필리핀의 코르디레라스 다랭이논의 논둑길이는 2만 2400㎞인데, 제주 밭담이 이 보다 더 길다는 얘기다.
제주 돌담 중 제주 밭담은 ‘돌, 바람이 많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밭담을 쌓아 바람과 토양 유실 방지, 농업 생물 다양성, 수려한 농업경관 형성’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에 청산도 구들장 논(1호)과 함께 국가 중요농업유산 2호로 지정됐다.
이어 2014년 4월에는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세계농어업유산으로도 등재됐다.
그러나 지금은 훼손이 빠르게 일어나고 있어서 보존에 대한 요구도 커지고 있다. 흑룡만리. 이 멋진 광경을 후손들도 즐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올해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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