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의 또 다른 이력은 제주도 연구가이다. 그것도 그냥 연구가가 아니라 제주도학이란 개념을 새롭게 만들어낸 지금의 제주학의 선구자이다. 제주 민요 오돌또기를 최초로 채록해서 세상에 알렸고 후렴구인 ‘둥구레당실 둥구레당실’을 늘 흥얼거리며 스스로를 반(半)제주인이라고 말할 만큼 제주를 사랑했다. 평양출신의 나비학자가 어쩌다 제주에 푹 빠지게 된 것일까.

석주명은 1908년 평양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에는 만돌린(후에 기타)을 연주하고 뮤지컬 공연도 하는 등 음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재능의 한계를 깨닫고 농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덴마크가 낙농업으로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가난한 조선 청년의 가슴을 뛰게 했다.

석주명 송도고보 박물교사로 재직당시인 1941년 9월에 찍은 사진.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석주명 송도고보 박물교사로 재직당시인 1941년 9월에 찍은 사진.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농학자가 되기 위해 일본의 가고시마고등농립학교에 입학했지만 농학이나 축산학을 포기하고 생물학을 전공한다. 그것은 그가 식민지 조선의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철저하게 조선인이 이공계 계통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과학기술에서 조선인의 자립을 두려워했고 경성제대에도 이공학부는 만들어주지 않았다. 이공학부가 생긴 것은 경성제대가 설립된지 14년이 지난 1938년으로 중일전쟁이후 군수산업인재가 필요해졌을 때였다. 설령 외국에서 이공학 박사학위를 받아 온다고 해도 조선인은 실험실습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고도의 첨단실험장비를 갖춘 모든 실험실습실은 일본인이 독점했다.

우수한 이공계 과학기술자가 될 가능성이 없는 조선인들은 박물학(생물학)을 선택했다. 생물학은 오로지 부지런하기만 하면 식민지청년도 할 수 있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과학은 생물학과 동의어가 되었고, 당시 만들어진 ‘과학데이’도 찰스 다윈의 탄생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생물학을 선택한 석주명은 나비의 생태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농업학교에서 나비연구는 매우 중요한 영역이었다. 나비는 인류가 농업혁명을 시작한 이래 최대의 관심사였다. 농사를 짓거나 하다못해 텃밭농사라도 해본 사람들은 다 안다. 나비는 보기에는 아름답고 식물의 수정을 돕기도 하지만 농작물을 해치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송도고보 박물교사(생물교사)가 된 후 본격적인 나비연구를 시작했다. 송도고보는 지금처럼 학군제가 있던 때가 아닌 당시 명문학교였기 때문에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석주명은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해 고향으로 돌아갈 때면 나비채집숙제를 내줬다. 전국의 나비분포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학생들이 채집하지 못한 지역이나 계절의 나비는 발로 돌아다니며 채집했다.

이렇게 한반도 최북단에서 최남단, 수많은 섬, 심지어 해외까지 돌아다니면서 무려 60만 마리의 나비표본을 얻었고, 이를 끈질기게 연구한 결과 고작 초급대학 출신의 시골 중학교 생물교사인 석주명은 세계적인 곤충학자이자 농학박사이며 이학박사인 일본인 대학자 마쓰무라의 논문을 반박하며 나비계의 일약스타로 발돋움하였다.

영문타자기. 영국왕립아시아학회로부터 영문논문을 발표해달라는 부탁을 받자 석주명의 어머니 김의식은 당시 황소 한 마리값을 주고 영문타자기를 구입해준다. 이 타자기로 10년의 연구결과 나온 '조선산 접류 총목록'을 집필한 후 석주명은 책의 첫페이지에 ‘평생토록 나의 연구를 변함없이 도와주신 어머니의 영전에 바칩니다’라는 글을 남긴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영문타자기. 영국왕립아시아학회로부터 영문논문을 발표해달라는 부탁을 받자 석주명의 어머니 김의식은 당시 황소 한 마리값을 주고 영문타자기를 구입해준다. 이 타자기로 10년의 연구결과 나온 '조선산 접류 총목록'을 집필한 후 석주명은 책의 첫페이지에 ‘평생토록 나의 연구를 변함없이 도와주신 어머니의 영전에 바칩니다’라는 글을 남긴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세계 각국에서 조선의 나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석주명에게 표본을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그 대가로 보조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국왕립아시아학회의 보조금을 받은 유일한 조선인이 되었고, 세계적인 논문들을 수없이 발표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제주에 오게 된다. 1936년 미국자연사박물관의 지원을 받아 한 달 간 채집여행을 하기 위해 제주에 발을 디딘 것이다. 이것이 제주와의 첫 인연이었다.

한가롭게 제주의 곳곳을 여행하며 채집여행을 다니던 석주명은 어느 들판에서 조를 파종한 후 소와 말로 밭을 밟게 하고 그 뒤를 따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뭔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포충망을 옆에 두고 앉아서 넋을 놓고 그 노래를 들었다. 뭔가 알 수 없는 감상이 그의 가슴을 때렸다. 한때 음악가를 꿈꿨던 나비학자가 제주에 빠져든 순간이었다. 제주는 이상한 말을 쓰고 이상한 문화를 가진 변방의 섬이 아니라, 아주 매력적이고 독자적인 언어, 문화, 역사를 가진 곳이라는 깨달음이 섬광처럼 스쳤다.

오돌또기 악보. 제주민요 ‘오돌또기’를 채록하여 발표함으로써 한국의 대표민요가 될 수 있도록 한 악보이다. 석주명은 제주 여행에서 돌아와 제주도 총서를 발표하기에 앞서 이 악보를 세상에 공개한다. 그리고 육지에서 사라진 ‘개나리고개’가 제주에 있는 것을 보고 역시 채록해서 발표한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오돌또기 악보. 제주민요 ‘오돌또기’를 채록하여 발표함으로써 한국의 대표민요가 될 수 있도록 한 악보이다. 석주명은 제주 여행에서 돌아와 제주도 총서를 발표하기에 앞서 이 악보를 세상에 공개한다. 그리고 육지에서 사라진 ‘개나리고개’가 제주에 있는 것을 보고 역시 채록해서 발표한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어쩌면 그가 나비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나비를 통해 세계란 결코 차별이 아니라 차이가 있을 뿐이란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딸인 석윤희가 아버지를 반제국주의자이자 반자본주의자였다고 기억하는 이유였다. 석주명이 에스페란토*를 통해 지배자나 강대국의 언어가 아니라 인류보편의 언어를 추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도 자신의 이름을 평안도식 발음인 ‘석두명’의 이니셜을 따서 D.M.Seok이라고적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에스페란토는 1887년 폴란드의 자멘호프 박사가 창안한 국제어. 강대국 중심의 언어를 대신하여 중립적인 언어를 통해 각 민족은 자국의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외국인과 소통할 때는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는 운동 전개. 에스페란토는 ‘희망하는 사람’이란 뜻의 인공어이다.

명함. 해방 전 수원중앙농업시험장 ‘경성제국대학부속생약연구소’시절 사용했던 명함. 1926년 송도고보 졸업기념 사진에는 CH.M.Suk라고 했지만 제주를 다녀온 뒤부터는 이렇게 D.M.Seok라고 해서 이름의 평안도식 발음을 이니셜로 사용한다. 
명함. 해방 전 수원중앙농업시험장 ‘경성제국대학부속생약연구소’시절 사용했던 명함. 1926년 송도고보 졸업기념 사진에는 CH.M.Suk라고 했지만 제주를 다녀온 뒤부터는 이렇게 D.M.Seok라고 해서 이름의 평안도식 발음을 이니셜로 사용한다. 

강렬한 한 달 간의 채집여행을 뒤로 하고 떠난 석주명은 제주에 대한 갈망을 놓지 못했다. 교편을 놓고 경성제대 부설 농업연구소에 취직하고 곧 새로 생긴 제주도시험장으로 자원하여 제주를 찾는다. 이번에는 1년 임기를 1년 더 연장하면서까지 장기간의 체류를 선택했다. 그렇게 제주에서의 석주명의 빛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2년간 석주명은 제주 구석구석을 누비며 곤충채집, 사투리 수집, 전설수집, 민요채록, 인구조사를 비롯해서 제주도에 관한 문헌과 자료를 모조리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제주는 한국문화는 물론 세계문화의 빛나는 원석이었다. 제주도 방언을 단순한 지역의 사투리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로 인정, 제주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사라져버린 역사와 문화가 제주에서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이것의 가치를 탐구하기 위해 제주도학이라는 분야를 창조한다.

제주방언집. 석주명은 나비를 분류하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제주도 방언을 수집하고 분류한다. 단어나 음절을 들으면 카드에 작성하는 방식으로 채록한 방언은 무려 7000여개로, 이것을 사전처럼 묶어 1947년에 제주도총서 제1집 '제주방언집'으로 발표한다. 석주명은 제주어를 수집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한반도의 다른 지역, 고어,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는 물론 심지어 필리핀과 말레이어와의 유사성도 찾으려고 하는 등 제주어가 가진 세계성과 고유성에 주목한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었다. (단국대학교 퇴계기념중앙도서관)
제주방언집. 석주명은 나비를 분류하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제주도 방언을 수집하고 분류한다. 단어나 음절을 들으면 카드에 작성하는 방식으로 채록한 방언은 무려 7000여개로, 이것을 사전처럼 묶어 1947년에 제주도총서 제1집 '제주방언집'으로 발표한다. 석주명은 제주어를 수집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한반도의 다른 지역, 고어,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는 물론 심지어 필리핀과 말레이어와의 유사성도 찾으려고 하는 등 제주어가 가진 세계성과 고유성에 주목한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었다. (단국대학교 퇴계기념중앙도서관)

제주를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이 되었다. 식민지 시절 그토록 열정적으로 논문을 발표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석주명은 해방 후 3년간 두문불출한다. 제주에서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제주도 총서 집필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제주도에 대한 신문기사를 빠짐없이 챙기는 등 제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조금도 식지 않았다.

총 10권을 펴낼 생각이었던 제주도 총서는 5권은 그의 생전에, 나머지 한권은 그가 죽은 뒤 누이동생인 석주선에 의해 간행된다. 그가 생각했던 나머지 4권의 책은 결국 출판되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한국전쟁의 와중에 서울에서 괴한들에 의해 어처구니 없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42살의 짧은 삶이었다.

제주도의 생명조사서 -제주도 인구론. 석주명은 1944년 2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제주도의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16개 마을을 표본으로 삼아 인구생태조사를 통해, 제주도의 특수성을 찾아내어 두 번째 제주도 총서로 발표한 이 책은 소위 말하는 레전드, 즉 고전이 되었다. 1949년에 출판되었을 당시 제주의 많은 마을이 제주 4.3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16개 마을 중 한 마을은 필자의 고향이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아주 작은 우리 마을에 다녀갔다고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설레었다.(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제주도의 생명조사서 -제주도 인구론. 석주명은 1944년 2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제주도의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16개 마을을 표본으로 삼아 인구생태조사를 통해, 제주도의 특수성을 찾아내어 두 번째 제주도 총서로 발표한 이 책은 소위 말하는 레전드, 즉 고전이 되었다. 1949년에 출판되었을 당시 제주의 많은 마을이 제주 4.3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16개 마을 중 한 마을은 필자의 고향이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아주 작은 우리 마을에 다녀갔다고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설레었다.(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1995년에 제주에서는 제주 방언 사전을 만들 때 <제주어사전>으로 이름지었다. 변두리에서 벗어나 국어와 같은 개념으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제주학연구센터’가 2011년에 세워짐으로써 제주의 역사,문화,자연을 총망라한 새로운 가치탐구가 시작되었다. 석주명이 뿌린 씨앗이 비로소 발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제주학의 선구자로서 석주명에 대한 새로운 조명도 시작되었다.

이제 제주는 단순히 지구의 어느 섬, 한국의 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인류문화의 보고이자 아름다운 유산을 간직한 곳으로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세계 그 어느 누구도, 아니 한국의 그 어느 누구도, 심지어 제주 사람 그 누구도 몰라보았던 가치를 알아차리고 세상에 소개한 석주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석주명 기념비. 석주명이 제주도에 머물르며 근무했던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은 지금은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로 바뀌었다. 바로 그 앞 토평사거리에는 석주명을 기리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석주명은 제주도시험장에 머물면서 유채씨를 일본에서 도입하여 제주에 재배하도록 한다. 제주의 노란 유채밭은 그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이기도 하다. (사진=고진숙 작가)
석주명 기념비. 석주명이 제주도에 머물르며 근무했던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은 지금은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로 바뀌었다. 바로 그 앞 토평사거리에는 석주명을 기리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석주명은 제주도시험장에 머물면서 유채씨를 일본에서 도입하여 제주에 재배하도록 한다. 제주의 노란 유채밭은 그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이기도 하다. (사진=고진숙 작가)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올해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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