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때인 1702년에 나이 쉰, 지천명에 이른 이형상이 한양을 출발해 한달여를 여행한 끝에 당도한 곳은 제주였다. 알아듣기 힘든 언어, 깔그락한 밥, 미친 듯이 불어대는 습한 바람, 그런 건 참을만했다. 변방의 수령으로 가란 임금의 교지를 받들었을 때 각오한 일이니까 말이다.

제주목사 이형상(1653년~1733년)1702년에 제 156대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는 총 286명이다. 제주목사 자리는 마치 유배를 가는 것처럼 기피해서 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부모나 자기의 병을 핑계를 대기도 하고, 왔다가 가버리기도 했다. 임기가 2년 반이었지만 다 채우는 경우도 드물어서 평균 재임기간은 대력 1년 10개월 정도이다. 이형상도 당쟁의 여파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1년 만에 파직되었고 이후 30년간 관직을 얻지 못했다. (그림=제주목관아)
제주목사 이형상(1653년~1733년)1702년에 제 156대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는 총 286명이다. 제주목사 자리는 마치 유배를 가는 것처럼 기피해서 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부모나 자기의 병을 핑계를 대기도 하고, 왔다가 가버리기도 했다. 임기가 2년 반이었지만 다 채우는 경우도 드물어서 평균 재임기간은 대력 1년 10개월 정도이다. 이형상도 당쟁의 여파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1년 만에 파직되었고 이후 30년간 관직을 얻지 못했다. (그림=제주목관아)

이형상을 힘들게 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도대체 같은 조선의 백성인가 싶었다. 모든 게 달랐다. 뱀을 모시질 않나,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하질 않나 동성동본끼리 결혼하질 않나, 벌거벗고 물질을 하지 않나. 게다가 굿판은 미어지는데 서당이나 향교의 마당엔 잡초만 무성하고 문짝은 너덜거렸다.

그렇다고 좌절할 이형상이 아니었다. 심지 굳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쪽 같은 유교관리였으니 말이다. 거기에다 제주에서는 무소불위 유일무이한 권력자 제주목사가 아닌가. 하나하나 차근차근 제주를 유교화하는 일에 착수한다.

제주목관아 내에 있는 연희각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동헌이라고도 한다. 일일이 전라도 관찰사에게 결재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제주목사는 군사·행정·사법·교육·치안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품계도 다른 지역의 목사보다 하나 높은 당상관 정3품이었다. 동헌도 관찰사가 머무는 곳인 감영이란 뜻으로 영청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연고지 관리에 임명을 피하는 ‘상피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제주출신은 제주목사로 임명될 수 없었다. (사진=고진숙)
제주목관아 내에 있는 연희각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동헌이라고도 한다. 일일이 전라도 관찰사에게 결재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제주목사는 군사·행정·사법·교육·치안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품계도 다른 지역의 목사보다 하나 높은 당상관 정3품이었다. 동헌도 관찰사가 머무는 곳인 감영이란 뜻으로 영청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연고지 관리에 임명을 피하는 ‘상피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제주출신은 제주목사로 임명될 수 없었다. (사진=고진숙)

조선 중앙정부 관리로서 제주목사는 병마수군절제사라는 군사령관의 직도 겸한다. 따라서 제주목사의 임무는 국토방위와 진상이었다. 부임하면 군사시설을 점검하고 진상품을 확인하기 위해 순력을 도는 일부터 시작한다. 순력은 동쪽마을부터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형상도 부임하자마자 순력을 돌기 시작했고 가는 곳마다 마치 기록사진처럼 하나하나 세밀하게 그림으로 남김으로써 그의 놀라운 분투기는 세상에 남겨졌다. 그것이 <탐라순력도>이다. 다큐멘터리 기록영화를 보는 듯이 <탐라순력도>속에는 제주사람들이 국토방위와 진상을 위한 애환, 당시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이 고스란히 남겨짐으로써 기록화로서 더없는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는 목사, 판관, 현감 같은 정규직과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오는 순무어사 같은 별정직 등이 있었다. 그들은 유교성리학적인 가치에 따라 치러지는 과거시험을 통과한 문관 혹은 무관들로 제주사람들을 유교적 가치에 따라 교화하여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조선화하는 데 애썼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두드러진 것이 뱀신앙에 대한 저항감이었다.

제주도는 돌 사이 구멍이 많고 군데군데 용암동굴이 있고 습한 지역이라 뱀이 정말 많다. 일상에서 늘 마주쳐야 하는 뱀을 제주에선 칠성신이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뱀이 자주 나오는 고팡(광)에는 안칠성이 있다고 하여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안티(뒷마당)에는 밧칠성이라 하여 신을 모시는 집을 지어주기도 한다. 또 신당 중에도 뱀을 모시는 곳이 많다.

이렇게 뱀을 모시는 것만이 아니라 집에서 뱀을 발견하면 절대 함부로 죽여서도 안된다. 집을 지키는 뱀이라 하여 먹을 것을 주기도 한다. 조상신이나 당신이나 농경신으로 뱀신을 모시는 것은 농경사회 초기에 만들어진 신앙이라고 한다. 뱀신은 ‘잘 먹으면 잘 먹은 값, 못먹으면 못 먹은 값’을 한다거나 ‘큰 굿하면 큰 밭 사고, 작은 굿 하면 작은 밭 사는 신’이라고 해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렇게라도 희망을 가져야만 했던 시대였으리라.

그러니 제주에 온 유학자들이 뜨악한 것은 물론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선 ‘회색 뱀만 보이면 차귀신이라 하여 죽이지 않는다.’고 했고, 조광조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 온 김정은 <풍토록>에서 “풍속이 뱀을 몹시 꺼리어 신으로 받든다. 그것을 보면 주문을 외며 술을 주고 절대로 잡아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뱀신앙은 근래에 와서는 제주에서도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뱀 신앙이 강한 곳의 여자는 결혼을 못하기도 했고, 방을 빌려주지 않기도 했다. 그러니 낯선 외지인, 게다가 유교근본주의자들의 눈에 이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다 없애야할 일이었다.

조선 초에 제주 판관으로 온 서린은 이런 일들이 도무지 이해도 안되고 용납도 안되었다. 김녕 사람들이 어린 여자를 뱀에게 바친다고 하니 분기탱천해서 달려가 뱀을 죽여 버렸다. 연륜이 좀 쌓인 후였다면 그렇게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겠지만 고작 19살에 장원급제한 무관이었으니 뒤도 안돌아보고 일을 벌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서린은 부임 2달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제주 사람들은 이것을 뱀신의 복수라고 여겼을 것이니, 전설까지 만들어지며 뱀신앙을 없애긴커녕 더 도와준 꼴이 되어버렸다. 그 후 함부로 제주의 신당을 건드리는 일은 감히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유교근본주의자들이 명분을 들어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이후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유학자들은 자기만 옳고 나머지는 다 이단이고 사문난적이라 여기며 죽자 살자 당쟁을 벌였다. 싸움은 그렇게 한양에서 벌어졌는데 그 여파는 제주가 가장 많이 받았다. 유배자가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유배자가 아니라, 송시열같은 유학의 거두들이었다. 송시열이 누군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공자,주자와 동기동창급이라는 의미로 송자라고 부르던 인물이 아닌가.

귤림서원이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자 1892년에 오현의 뜻을 기리고자 제주유림들이  오현단을 세운다.오현은 제주에 온 유학의 거두들을 기린다는 의미로 김정,송인수,김상헌,정온,송시열을 가리킨다. (그림=제주목관아)
귤림서원이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자 1892년에 오현의 뜻을 기리고자 제주유림들이 오현단을 세운다.오현은 제주에 온 유학의 거두들을 기린다는 의미로 김정,송인수,김상헌,정온,송시열을 가리킨다. (그림=제주목관아)

거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제주사회는 변하기 시작한다. 유교의 역습이 시작된 것이다.제주의 상류사회 인물들이 여기에 동조했다. 1659년 유교교육기관인 장수당이 세워졌고, 1665년에는 귤림서원으로 확장 개원한다. 1682년에는 사액사원이 되어서 나라의 지원을 받았다.(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원되었다.)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왔을 때는 이런 분위기였다. 이형상은 제주의 토속신앙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사찰과 신당을 불태웠다. 절오백당오백이라고 해서 절이 오백개, 신당이 오백개가 있다고 했지만 절이라고 해봐야 신당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김만덕이 소원이었던 금강산 구경을 한 뒤 난생처음 절을 봤다고 했으니 이미 제주엔 절이 없었다.

사찰이 지어진 것은 1909년으로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관음사가 지어지면서이다. 일제 강점기때 무속신앙이 탄압받으면서 불교가 다시 부흥할 때까지 제주는 신들의 고향이었다.

이형상 목사는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바꾸는데 주저하지 않는 유교적 합리주의자이도 했다. 당시까지 알몸으로 잠수하던 잠녀들을 위해 잠수복을 고안해서 입힌다거나 동성혼과 혼욕을 금지시켰다. 산마감목관이란 직위를 세습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독점을 막고 공정성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곳곳에서 과한 진상을 줄였고, 관리들의 횡포를 막았으며 제주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몫 단단히 챙겨가던 관리들과 달리 이형상이 떠날 때 가지고 간 것은 제주사람이 만들어준 거문고 하나가 전부였을만큼 청렴했다.

'탐라순력도' 중 ‘병담병주’ 취병담 즉 용연은 한양에서 온 관리들과 유배객들이 즐겨 연회를 벌이는 곳이다. '탐라순력도'에는 이형상이 순력을 마치고 벌인 일종의 뒷풀이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기녀와 즐기는 그 옆에서는 용두암 근처에서 물질하는 잠녀들의 모습이 있다. 그들이 잡은 전복이 술상에 올라간 것은 물론이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 제주목사가 제주목 소속 화공을 시켜서 그린 것이다. (그림=제주시)
'탐라순력도' 중 ‘병담병주’ 취병담 즉 용연은 한양에서 온 관리들과 유배객들이 즐겨 연회를 벌이는 곳이다. '탐라순력도'에는 이형상이 순력을 마치고 벌인 일종의 뒷풀이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기녀와 즐기는 그 옆에서는 용두암 근처에서 물질하는 잠녀들의 모습이 있다. 그들이 잡은 전복이 술상에 올라간 것은 물론이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 제주목사가 제주목 소속 화공을 시켜서 그린 것이다. (그림=제주시)

제주 곳곳에는 이형상의 이런 분투 흔적이 남겨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사람들은 이형상을 고마운 관리로 기억하지 않았다. 제주는 1만 8천 신들의 땅이고, 제주 사람들은 그 신들의 보호 아래 살아왔다고 믿었다. 그런 제주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유교적 가치관과 충돌하는 미신행위라 여겨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당 129개를 태워버렸고 제주에서 한라산신을 모시는 대표적인 신당인 광양당과 광정당을 없애버렸다.

제주에서 무속신앙은 단순히 미개함의 상징은 아니었다. 제주섬에 건너 온 사람들은 신당을 만들고 그 신당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뤄 살았다. ‘신이 좌정하다’는 표현으로 기록된 제주 신화는 마을형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대륙에서 교회가 생기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마을이 생기듯이 말이다.

이런 전통 신앙은 보통은 중앙집권적인 정부가 생기고 보편종교나 중앙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침투하면 약화되기 마련이지만 제주는 예외였다. 제주 사람들에게 무속신앙은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저항이념과 같았다. 중앙정부는 진상이란 이름으로 제주 사람들을 핍박하는 약탈자였고 약탈자에 대항해서 자신을 지킬 이념이 무속신앙이었던 것이다.

이형상 목사가 제주를 떠나자 신당은 다시 다 복원되었고, 그토록 애써서 복구해놓은 향교들도 풀만 무성해갔다. 제주 사람들은 정신적 복수를 가하기 위해 이형상의 몰락을 암시하는 전설을 만들었고, 이형상의 가족사가 불행하자 통쾌해했다. 아무리 합리적인 가치관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을 얻지 못한 행정이란 그런 것이다.

'탐라순력도' 중 ‘건포배은’ 1802년 12월 20일에 일부는 관덕정 앞에서, 일부는 건입포 앞에서 북쪽, 즉 임금과 조선정부에 고맙다고 절하는 의례를 그린 ‘건포배은’. 그 뒤에는 검은 잿빛으로 불타는 신당이 모습이 보인다. 이형상 목사가 조정에 아뢰고픈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 신당을 없앤 일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탐라순력도' 중 ‘건포배은’
1802년 12월 20일에 일부는 관덕정 앞에서, 일부는 건입포 앞에서 북쪽, 즉 임금과 조선정부에 고맙다고 절하는 의례를 그린 ‘건포배은’. 그 뒤에는 검은 잿빛으로 불타는 신당이 모습이 보인다. 이형상 목사가 조정에 아뢰고픈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 신당을 없앤 일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그림=제주시)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2021년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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