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썼을까? 고대사서에는 한라산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때까지만 해도 본토의 입장에서 제주는 외국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행정단위가 된 숙종 때로부터도 거의 200년이 지나서야 요즘 말로 ‘셀럽’인 사람이 찾아왔고, 비로소 한라산이란 말이 등장한다.

한라라는 이름을 처음 등장시킨 셀럽은 대략 1300년을 전후로 제주에서 활동한 혜일이란 승려였다. 혜일은 ‘한라의 높이는 몇 길이던가…’로 시작하는 시를 남겼다.

<고려사>에는 1374년 최영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에 들어와 '모든 장수들이 한라산 아래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하였다.'는 기록이 유일하게 남겨져있다.

왜 한라라고 불렀는지를 처음으로 밝힌 기록은 조선 성종 때인 145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이다. 여기에 따르면 '한라라고 하는 것은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비행기에서 찍은 한라산 한라산은 광주 무등산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머리 없는 산에 사는 사람'은 바다건너 한라산만 보이던 남해안 일대 사람들이 제주사람들을 일컫는 이름일 것으로 여겨진다. 비하의 의미가 담긴 말이다. (사진=고진숙)
비행기에서 찍은 한라산 한라산은 광주 무등산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머리 없는 산에 사는 사람'은 바다건너 한라산만 보이던 남해안 일대 사람들이 제주사람들을 일컫는 이름일 것으로 여겨진다. 비하의 의미가 담긴 말이다. (사진=고진숙)

그 외에도 한라산은 육지로 가는 태풍을 막아주는 거대한 방어진과 같다고 해서 진산, 높고 둥글다해서 원산, 정상에 못이 있어 물을 담는 그릇을 닮았다 해서 부악, 중국 <사기>에 신선이 산다고 나오는 영주산까지 많은 이름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두무악(頭無嶽)이다. 머리가 없다는 뜻의 두무악이란 말에서 나온 것인데, 한라산 꼭대기가 마치 머리 없이 목만 남은 모양이라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한라산을 일컫는 이 이름이 어쩐 일인지 조선시대 육지 사람들이 제주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한글이 없던 시대다보니 의사소통이 글이 아니라 말로 이어졌고, 두무악, 두모야지, 두독야, 두독야지, 두독같이 들리는 대로 불렀다. 그리다가 임진왜란에서 맹활약하면서 그들은 하나의 신분이 되었는데 그것이 ‘두모악’이다.

전설에 의하면 화가 난 설문대할망 혹은 옥황상제가 한라산의 머리를 뽑아서 던져버렸는데, 그것이 산방산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백록담 분화구와 산방산의 크기가 비슷하고 같은 조면암으로 만들어졌다. 멀리서 보면 전설이 그럴 듯 해보이지만 지질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산방산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80만년 전에 만들어진 오름이고, 백록담은 불과 2만여년 전에 마지막 분화가 일어났다.(사진=고진숙)
전설에 의하면 화가 난 설문대할망 혹은 옥황상제가 한라산의 머리를 뽑아서 던져버렸는데, 그것이 산방산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백록담 분화구와 산방산의 크기가 비슷하고 같은 조면암으로 만들어졌다. 멀리서 보면 전설이 그럴 듯 해보이지만 지질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산방산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80만년 전에 만들어진 오름이고, 백록담은 불과 2만여년 전에 마지막 분화가 일어났다.(사진=고진숙)

뭍사람들이 제주사람들을 부르던 이 이름이 역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사회문제가 된 것은 조선 성종 때였다.

‘연해에는 두무악이 매우 많은데, 제주의 한라산을 혹 두무악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세속에서 제주사람을 두무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두독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성종실록> 성종23년2월8일 기유

그들은 언어와 문화가 육지와 달랐기 때문에 뭍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지 못했다. 남해안 주변의 포구나 버려진 섬을 떠돌며 고기 잡고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아야 했다. 두모악은 조선시대의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였다. 왜 고향을 떠나야 했을까?

고려 말 삼별초의 난으로 깜짝 놀란 정부에서 섬들을 비우도록 했고 해상세력들을 완전히 뿌리뽑아버렸다. 그 결과 고려 말부터 벌어진 왜구들의 노략질에 속수무책이었다. 왜구들이 출몰하자 바다는 더욱더 버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바다는 완전히 막히기 시작했다. 먼 바다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고 멀리 떨어진 섬은 비워버리는 해금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김훈의 베스트셀러 소설 <칼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고려시대 지도는 섬과 해안가 지형이 자세했지만 조선시대의 지도에서 섬은 무시되었다. 조선의 모든 것을 담은 지리지에도 바다는 없었다. 조선후기가 되어서야 김려가 지은 <우해이어보>와 서유구가 지은 <난호어목지>, 그리고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라는 어류백과사전이 나왔다. 약초나 농경식물에 대한 백과사전이 조선초기부터 거듭 발간되었던 것에 비하면 조선시대에 바다는 외면 받았다.

제주는 섬인데다 경작지가 지극히 작았고, 유년기의 화산섬이라 토양층이 얇고 물빠짐이 좋은 화산회토라 논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소금, 철, 쌀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교역에 의존해야 했다. 이미 수천년전 탐라국은 탐라복(전복)과 탐라포(육포)를 일본에 팔아 원하는 것을 구해왔고, 남해안 세력들은 물론이고 중국과도 끊임없이 교역을 해왔다.

덕판배 당시 두모악의 배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체는 왜인의 배보다 더욱 견실하고, 빠르기는 더 빠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배는 덕판배일 것으로 보고 있다. 덕판배는 제주 해안에 많은 바위들을 이기기 위해서 통나무로 앞에 덧대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탐라국 시절 중국 남부, 일본, 유구국, 대만 등을 드나들던 배로 장거리 항해나 물살이 거칠거나 암초가 많은 곳에서도 끄덕 없었다. 제주에는 이 배와 이 배를 이용한 항해술이 전해내려 왔던 것이다. (‘1996년 김천년 선생님 팀이 복원한 제주 덕판배의 모습’. (해양수산부 공식 블로그)
덕판배 당시 두모악의 배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체는 왜인의 배보다 더욱 견실하고, 빠르기는 더 빠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배는 덕판배일 것으로 보고 있다. 덕판배는 제주 해안에 많은 바위들을 이기기 위해서 통나무로 앞에 덧대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탐라국 시절 중국 남부, 일본, 유구국, 대만 등을 드나들던 배로 장거리 항해나 물살이 거칠거나 암초가 많은 곳에서도 끄덕 없었다. 제주에는 이 배와 이 배를 이용한 항해술이 전해내려 왔던 것이다. (‘1996년 김천년 선생님 팀이 복원한 제주 덕판배의 모습’. (해양수산부 공식 블로그)

제주는 땅이 척박하다고 하지만 풍요로운 땅이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식물과 동물이 살아간다.

현재 한국에서 살아가는 식물 종은 4000여종인데 한라산에만 2000여 종이 있다고 한다. 식물다양성에서 압도적이라 최고급 목재와 다양한 약초와 나물, 버섯이 풍부하다. 노루와 사슴을 비롯한 야생동물도 많았다. 가죽과 말린 고기는 인기가 많았다.

중산간 지대엔 넓은 초원이 있어서 소나 말을 키우기 좋았다. 말은 육지에 도착하면 값이 3배로 뛰기 때문에 상인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져서 이들을 상대하는 제주기생들은 비단옷을 입었다고 한다.

귤은 제주에서만 나왔고, 언제나 최고급 인기상품이었다. 다양한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고 태풍마저 지나면서 바다어장을 풍부하게 했다.

제주는 근대 이전 우리나라 최고 베스트셀러를 가진 곳이기도 했다. 베스트셀러의 조건은 양반 평민 가릴 것 없이 어느 집에서나 사들여야 한다. 바로 그것이 미역이다.

우리 민족이 미역을 먹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때부터인 듯하다. 당나라에서 만들어진 백과사전인 <초학기>에는 고래가 새끼를 낳고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미역을 뜯어먹는 것을 본 고구려인들이 산모에게 미역을 먹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몽골반점이 있는 민족은 골반이 좁아서 아기를 낳을 때 출혈이 심했는데 우리 민족은 쑥과 미역을 사용해 극복했다. 16세기 이후 불어 닥친 기후위기로 흉년이 거듭되자 조선 정부에선 미역을 구황식품으로 나눠주기도 했다.

잘 팔린다는 것은 환금성이 좋다는 뜻이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이 인삼을 들고 가서 팔아 여비로 썼듯이 제주 사람들은 육지로 나갈 때 미역을 들고 나갔다. 말무역이 금지된 이후 제주에 흉년이 들면 미역을 들고 나가 쌀을 사왔다.

이 모든 것들을 바닷길로 교역만 이뤄져서 제값에 팔았다면 제주 사람들은 원하는 것은 뭐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바다는 막히고 모든 것들이 진상품이 되어 버렸다.

어디 그뿐이랴. ‘진상은 꼬치에 꿰고 인정은 바리에 싣는다’고 했다. 진상을 미끼로 해서 아전들이 ‘인정’을 챙겼다. 조선은 경국대전에 의해 관리들의 봉급이 정해진 법치국가인데 아전들은 봉급이 없다.

대신 관아의 일을 도우니 백성들이 인정이나 베풀라고 만들어진 게 인정제도이다. 말하자면 합법적인 약탈이 가능해진 것이다. 꼬치에 꿴 진상물을 서울로 보내기 위해 아전들을 위한 인정은 몇바리나 되는 등짐으로 실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포작이라는 특별한 의무를 가진 사람들의 고통이 컸다. 그들은 3월부터 9월까지 매달 전복과 오징어를 바쳐야했고 진상 떠는 관리들에게 인정을 베푸느라 허리가 휘었다.

김상헌은 1601년 <남사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제주에서 바쳐야할 전복의수가 극히 많고 관리들이 공무를 빙자하여 사리를 영위하는 것이 또한 몇배나 된다. 포작인들이 그 역을 견디지 못하여 흩어져 떠돌다가 물에 빠져죽어 열중에 두셋만 남게 되었는데도 필요하다고 거두어들이는 물건은 옛날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포작들은 생산량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관가에서 곤장을 맞거나 아니면 옥에 갇혔다. 옥에 갇힌 남편을 구하기 위해선 전복을 따와야 하는 것은 포작의 아내나 부모였다. 결국 포작은 점점 결혼 상대로서도 기피상태가 되었다.

제주도 속담에 “보재기 3, 4대민 초상을 물에 눅진다”라는 말이 있다. 보재기는 포작을 이르는 말이니, 결국 포작 3, 4대가 지나면 바다에 빠져 죽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다.

포작들은 살기 위해 제주를 떠나기 시작했다. 조선이 건국된지 50년이 지나자 제주도 인구가 무려 1만 9000명 가량 줄었다. 이것은 당시 제주 인구의 1/3이나 되었다.

제주를 떠난 그들은 폐쇄적인 조선시대에서 어디에도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 육지 사람들조차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말과 문화가 다르니 섞여 들어가기도 어려웠다. 원래 배 몰고 고기 낚고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니 그걸로 생계를 삼으면서 경상도나 전라도 해안을 떠돌았다. 심지어 중국까지 가기도 했다. 버려진 섬들에 기대어 백정들처럼 천민부락을 이루고 살던 그들이 두모악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연안 지역 수령들은 진상할 해산물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쫓아내진 않았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바다에 떠도는 것을 불온시 했지만 내버려두었다. 왜구가 침략했을 때 그들이 배 부리는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아무도 그들이 왜 떠났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출륙금지령이 내려져서 제주에서 더 이상 아무도 떠나지 못하게 될 때까지 그들은 이방인으로 살았다.

두모악이란 이름으로 최초로 사서에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바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탁월한 뱃사람들이었던 두모악들은 전쟁에서 맹활약하면서 비로소 진가를 드러냈다. 두모악이란 불온한 사회집단에서 하나의 신분으로 인정받은 이름이기도 했다.

2만명이 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두모악들 중 새로운 호적을 얻고 정착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 두모악이란 호칭은 특별한 의무가 있는 천민과 같은 의미였다. ‘두모악호’란 말하자면 천한자들에 대한 낙인이었다.

두모악이 사라진 것은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이후였다. 더 이상 현물로 해산물을 공납할 필요가 없어지자 그들의 특별한 의무도 사라졌다. 더 이상 떠돌지 않게 된 그들은 지역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살아가기 시작했다. 차츰 제주사람이란 정체성도 잊었고 두모악이란 낙인도 사라졌다.

두모악. 지금은 한라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이렇게 슬픈 이름이었다.

1609년 '경상도 울산부 호적대장'에 뚜렷하게 豆毛岳(두모악)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때 울산에 두모악은 11호 정도가 있었다. 1672년 호적엔 187호가 거주했고 1705년에는 192호, 1708년에는 185호가 있었다. 호적에 따르면 두모악의 아내의 신분도 두모악이었다. (김나영. 논문 '조선후기 제주지역 포작의 존재양태'에서 발췌)
1609년 '경상도 울산부 호적대장'에 뚜렷하게 豆毛岳(두모악)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때 울산에 두모악은 11호 정도가 있었다. 1672년 호적엔 187호가 거주했고 1705년에는 192호, 1708년에는 185호가 있었다. 호적에 따르면 두모악의 아내의 신분도 두모악이었다. (김나영. 논문 '조선후기 제주지역 포작의 존재양태'에서 발췌)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2021년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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