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제주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형벌에 가까웠다. 제주는 섬이라 직접세인 토지세가 없는 대신에 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공물은 국가재정이라 흉년이나 천재지변에는 깎아주기도 했고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는 돈이나 쌀, 옷감으로 납부하면 되었다.

하지만 진상은 왕실재정이라 꿈쩍도 안했다. 제주는 마치 점령지와 같았고 진상이 진상을 떠는 곳이 되었다.

제주사람들이 왕실에 진상해야 할 품목은 귤, 해산물, 약재, 말, 흑우, 육포처럼 대부분 제주특산물들이어서 대체가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제주에서 한양까지 거리는 빨라야 한 달이 걸렸고 바다를 건너가야 했다.

다른 진상물들이야 말려서 보내면 되지만 생물로 보내야 할 귤은 운송 중에 썩는 일이 종종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귤이 상하면 귤 진상 책임자인 제주 목사는 파직되었다. 그러니 귤을 수확해 바쳐야 할 사람들만 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나라에서 직접 과원을 운영했다. 하지만 모든 국영농장이 그렇듯 관리가 잘 이뤄지지 않아 물량을 감당 못했다. 그러자 다른 의무를 없애준다며 집집마다 귤나무를 심게 했다.

그것이 굴레가 되었다. 귤꽃이 피면 일일이 그 숫자를 적었다가 겨울에 그만큼 바치라고 한 것이다. 꽃이 전부 귤이 될 리는 없는데도 말이다. 사서라도 채워야 했으니 견디다 못해 몰래 뜨거운 물을 부어서 귤나무를 죽여 버렸다. 이런 일이 거듭되다 보니 조선후기가 되자 제주의 귤나무는 전부 사라졌다. 제주의 감귤농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조선이 망한 후였다.

감귤봉진=귤진상은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보냈다. 귤은 껍질을 약재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제주에서만 나는 귀한 것이라 귤이 올라오면 황감제라고 해서 특별히 나눠주며 보는 과거시험도 있었다. 귤차와 감귤정과는 임금만 맛볼 수 있었다. 그림은 '탐라순력도'중 ‘감귤봉진’으로 제주목 관아 뜰에서 진상을 위해 귤을 상자에 넣어 포장하는 과정이 상세히 그려져있다.
감귤봉진=귤진상은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보냈다. 귤은 껍질을 약재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제주에서만 나는 귀한 것이라 귤이 올라오면 황감제라고 해서 특별히 나눠주며 보는 과거시험도 있었다. 귤차와 감귤정과는 임금만 맛볼 수 있었다. 그림은 '탐라순력도'중 ‘감귤봉진’으로 제주목 관아 뜰에서 진상을 위해 귤을 상자에 넣어 포장하는 과정이 상세히 그려져있다.

진상할 말을 관리하는 목자가 맡는 목자역은 고통스럽다는 6고역 중에서도 최고였다. 워낙 일이 고되어서 제주에서도 가장 천한 일로 여겨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천형이다. 말을 돌보다 병들거나 죽으면 그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진다. 말값이 좀 비싼가. 그렇다고 도망가면 가족이 그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6고역은 목자역,방군역(하위군병),과원역(감귤진상역), 포작역(전복과오징어납품), 잠녀역(해산물채취담당), 선격역(공마선 운송담당)

제주에 유배왔던 왕족인 이건은 <규창집>에서 이런 현실을 개탄하며 ‘목자들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다’며 안타까워했다. 제주 목사 이형상도 <탐라계록>에서 말값을 보상하기 위해 ‘부모를 판 목자가 5명, 처와 자식을 판 목자가 8명, 자신을 저당 잡힌 목자가 19명, 동생을 판 목자가 26명에 이른다’고 썼다.

말을 제주에서 서울까지 수송하는 데에는 약 2개월이 걸리고 비용도 엄청나다. 태종 때인 1418년 전라 감사의 보고에 따르면, 바다를 건너는 데 드는 비용만 양곡이 1000석이나 든다고 하였다. 말을 실은 배는 일 년에 보통 10척 정도 왕래하는데 관리와 선격이라고 하는 노를 저을 사람까지 합해 50명에서 심지어 백명 가까운 사람이 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그 많은 사람이 살아오기 어려웠다.

해남 바닷가에 버려진 현무암=말은 무게가 무겁기 때문에 바람이 강할 때 출발해야 해서 남풍이 가장 강한 때인 음력 5,6월에 제주를 떠난다. 말은 겁이 많아서 조금만 배가 흔들려도 놀라서 날뛰기 때문에 배 밑에 무거운 돌을 싣고 간다. 간혹 해적이라도 만나면 그 돌로 싸움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육지에 도착하면 그 돌을 버리고 오는데 전남 해남의 해안가에 많았다. 지금은 조경석으로 인기가 많아서 많이 없어졌다.(사진=김오진)
해남 바닷가에 버려진 현무암=말은 무게가 무겁기 때문에 바람이 강할 때 출발해야 해서 남풍이 가장 강한 때인 음력 5,6월에 제주를 떠난다. 말은 겁이 많아서 조금만 배가 흔들려도 놀라서 날뛰기 때문에 배 밑에 무거운 돌을 싣고 간다. 간혹 해적이라도 만나면 그 돌로 싸움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육지에 도착하면 그 돌을 버리고 오는데 전남 해남의 해안가에 많았다. 지금은 조경석으로 인기가 많아서 많이 없어졌다.(사진=김오진)

이렇게 가혹한 의무에 시달리자 사람들이 떠났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후 제주 인구는 세종 때의 절반까지 줄었다. 제주는 조선 정부에겐 매우 중요한 국토방위의 요충지인데다 진상품의 보고였다. 결국 비변사는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려달라고 제안했고, 인조임금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제주사람들은 1629년부터 200년간 허가 없이는 육지를 가지도 못하고 육지에서 오지도 못했다. 아름다운 제주섬은 바다 위의 푸른 감옥이 되었다.

출륙금지령이 내려진 후 극심한 기후변화로 흉년이 전국을 덮쳤다. 물론 제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주는 섬이니 흉년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때마다 조선정부는 ‘진휼’이란 것으로 대응했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말, 미역, 전복, 귤, 약재같이 돈되는 환금성 물품이 지천인 제주에서 말이다. 제주는 동아시아의 중심이었고, 바다를 이용하면 아시아의 어디든 가서 무역을 할 수 있었지만 조선 정부는 제주를 봉쇄했다.

미역은 환금성도 좋고 보관과 운반도 편리했다. 짧은 미역채취 기간 동안 추운 바다에서 캐낸 미역으로 쌀도 사고 소금도 사고 옷감도 사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미역은 제주에 온 관리들이 한몫 챙겨가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힘들게 미역을 따고 나온 잠녀들에게 벌어진 안타까운 정경을 담은 문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포구의 유사(관공리)는 관공이라고 칭하며 채취하는 대로 다 움켜쥐니, 포녀(바닷가여인)는 그 독한 주먹이 두려워서 감히 큰소리 한마디 못하고 알몸으로 발을 구르며 여울 위에 섰다가 빈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니, 이 무슨 꼴인가.’

말 한마리는 지금으로 치면 고급 승용차 한 대값이 훌쩍 넘었지만 헐값에 뺏어가다시피 했다. 그 외에 미역, 전복 등 그들은 할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돌려 한몫 잡았다. 조선시대 제주목사 1년이면 한양에 기와집을 산다는 말이 있었다.

그동안 제주 사람들의 고통은 점점 커져갔다. 진상을 위해 수없이 배를 몰고 오고 가다 고깃밥이 되었다. 무거운 의무를 가진 포작, 목자 등은 결혼기피 대상이 되어 명맥이 끊겨갔다. 극심한 기후변화로 흉년이 거듭되었고, 진휼을 위해 쌀이 도착하는데는 한두달이 걸렸다. 간혹 배가 침몰하기도 했고 그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제주 사람들은 시체가 시체를 베고 누울 정도로 죽어갔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역사상 송나라 유학자와 더불어 가장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공부도 헛된 듯이 제주에 관리로 오거나 유배를 온 유학자들은 진실을 보기보다는 오로지 제주사람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유를 삼재의 섬이기 때문이라고만 했다. 삼재란 풍재, 수재, 한재로 그러니까 바람과 비와 가뭄 때문에 척박하다고 한 것이다. 그런 제주 섬에 임금께서 진휼을 내려주시니 백성들이 기꺼이 진상을 바친다는 것이다. 말그대로 주객전도이다.

탁라 즉 제주에서 감귤을 올린 일에 대해 지은 <탁라공귤송>의 일부에 이런 생각이 적나라하게 들어있다.

돌무더기 자갈밭에 궂은 비 자주 내리니

오곡 익지 않고 들에는 푸른 열매 열리지 않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고단하고 힘겨워라

임금님 이 백성 불쌍하다 하시네.

서둘러 배에 곡식 실어 보내 먹이고

애통해하는 글 내려 백성의 마음 감동시켰네

백성들 어버이 같으신 임금님 우리를 길러 주시니

뼈를 갈아서라도 공물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네.

공물 보잘것없어 감귤과 유자뿐인데.

이후 내용은 이렇다. 진휼에 대해 고마운 나머지 귤을 보내려 했는데 큰 바람이 불어 꽃이 다 떨어져 버리니 귤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면서 나무를 붙들고 울었더니 다시 꽃이 피어서 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그런 이유로 울었을까?

더 놀라운 것은 이 글을 지은 이가 정약용이다. <목민심서>의 저자이며 조선시대 최고의 휴머니스트마저도 제주 사람들이 왜 울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물론 진휼의 대가로 진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성과 임금의 관계도 '기브앤 테이크' 관계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출륙금지령으로 닫아놓은 상태에서 진상은 제주사람들을 파멸로 몰아갔다.

출륙금지령이 내려진 후 불과 반세기가 지난 1672년 제주 인구는 무려 2만 9578명까지 떨어진다. 세종 때 인구가 6만 3000명에 이르렀던 것을 생각해보면 제주는 푸른 감옥 안에 갇힌 죽음의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 정부는 뒤늦게 제주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초에 군산에 나리포창을 두어서 제주의 해산물과 곡식을 바꾸게 했다.

하지만 출륙금지령 아래서 자유로운 상업활동이 아니었으니 효과가 나타날 리 없었다.

제주의 인구가 비로소 늘기 시작한 것은 스스로 전복을 먹지 않을 만큼 제주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했던 정조때부터였다. 정조는 진상품의 숫자와 품종을 줄이고 상업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줬고, 양태산업에 대한 독점권을 제주에 주었다. 김만덕이란 거상의 출현은 이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제주 해안은 버려졌다. 섬에서 바다를 버린다는 이 우스꽝스런 일이 벌어짐으로써 왜구들도 벌벌 떨게 하고 전세계를 누볐던 제주 해양문화의 상징인 덕판배가 사라졌다. 대신 테우를 이용하거나 원담을 쌓아서 고기를 잡는 연안어업으로 제주 사람들의 활동영역은 축소되었다. 한때 중국, 일본을 비롯 동아시아 해양교류의 중심지였던 제주는 왜소하고 가난한 변방의 섬이 되었다.

테우 제주의 해안가는 바위가 많아 배가 드나들기 힘들다. 테우는 물에 잘뜨는 구상나무로 만들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서 해조류 채취나 자리돔 잡이와 같은 연안어업에 사용했다. 테우는 가볍기 때문에 썰물 밀물을 이용해야 하는데, 물때를 놓치면 돌아오기 어려웠다고 한다.(출처=제주민속촌박물관)
테우 제주의 해안가는 바위가 많아 배가 드나들기 힘들다. 테우는 물에 잘뜨는 구상나무로 만들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서 해조류 채취나 자리돔 잡이와 같은 연안어업에 사용했다. 테우는 가볍기 때문에 썰물 밀물을 이용해야 하는데, 물때를 놓치면 돌아오기 어려웠다고 한다.(출처=제주민속촌박물관)

육지와 교류가 멈추자 제주의 신화, 언어, 문화가 고스란히 보전되기도 했다. TV드라마나 영화에서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막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소규모 어업과 농업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마을 주민간 빈부격차가 거의 없었다. 마을 주민들이 대부분 같은 일을 함으로써 아직도 마을굿이 벌어지는 등 다양한 인문학적 가치를 뽐내고 있기도 하다.

좁은 제주섬 사람끼리 결혼하다보니 전 섬이 한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이거나 친인척인 궨당사회가 됨으로써 궨당문화라고 하는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외부문화와 제주문화 간에 벌어진 충돌이 빚은 비극인 제주 4.3이 벌어진 이유도 거슬러 올라가면 출륙금지령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일본제국주의처럼 미군정,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를 점령지 그 이상으로 보려 하지 않았다. 자주정부에 대한 열망을 가진 제주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잔인한 학살로 대응한 것이다. 여전히 제주는 감옥 속에 있었다.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올해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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